칼빈주의의 폐해와 그 위험성(3)(마22:1~14)(소제: 칼빈의 5대교리의 허구성)_2016-08-19

by 갈렙 posted Aug 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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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uucGr3lBJ-s
날짜 2016-08-19
본문말씀 마태복음 22:1~14(신약 37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허구성, 칼빈의 5대교리의 속임수, 제한속죄, 전적인 타락, 불가항력적인 은혜

1. 들어가며

  칼빈의 예정론은 과연 얼마나 성경적일까?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이야말로 가장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는 하나님 제일주의요 성경과 운명을 같이하려고 하는 성경주의 사상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들은 무턱대로 어떤 사람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참된 칼빈주의자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간다. 그리고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 멈춘다"고 칼빈주의자들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칼빈주의에 관해 쓴 책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칼빈주의야말로 가장 성경적인 교리라고 철썩같이 믿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과연 칼빈주의 예정론이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교리들 중에서도 가장 성경적인 교리에 해당하는 것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칼빈이 쓴 책 <기독교강요>(1559년판)에 나오는 칼빈주의 5대교리의 근원이 되는 그의 글들을 비교분석해보고자 한다.

  칼빈주의의 예정론과 칼빈주의의 5대교리의 근간이 되는 주장들은 칼빈이 쓴 책 <기독교강요>(1559년판) 제21장에서부터 24장을 보면 된다. 특별히 "칼빈주의 5대교리"라는 말은 1618년 도르트회의를 통해 비로소 결정된 것을 우선 알 필요는 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글을 가지고, 칼빈주의 예정론과 그의 5대교리를 비교분석해보고자 한다.


2. 칼빈주의 예정론과 그 허구성

  첫째, 칼빈의 예정론이란 무엇이며 과연 이 예정론은 성경적인 주장일까? 칼빈의 예정론은 <기독교강요> 제21장에 나온다. 그는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예정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영생에 예정되며,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예정은 없다. 칼빈의 예정론을 흔히들 이중예정론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은 영생(천국)으로 어떤 사람은 멸망(지옥)으로 예정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 어디에도 어떤 개인을 영생과 멸망으로 예정해놓았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아니 한 구절도 없다. 오직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복음을 들어 믿고 회개하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또한 멸망도 만세전에 누가 미리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개인을 그렇게 예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내팽개쳐버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개인구원예정 혹은 칼빈의 개인멸망예정은 비성경적인 주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3. 칼빈의 5대교리와 그 허구성

  둘째, 칼빈의 5대교리는 무엇이며, 이 5대교리는 과연 성경적인 주장일까? 먼저 1618년에 도르트회의에서 결정한 <칼빈의 5대교리>를 살펴보자. 그것은 1)전적인 타락, 2)무조건적인 선택, 3)제한 속죄, 4)불가항력적인 은총, 4)성도의 견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정작 칼빈은 이렇게 목록별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문구를 만들어 낸 것 뿐이다.


1)전적인 타락

  이제 첫번째로, 전적인 타락의 교리에 대해 보자.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23장 3절에서 7절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모든 사람은 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로 더럽혀져 있고, 그것은 영원한 심판을 받아 사망에 들어가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인류가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제23장 7절).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병주고 약주고 하시는 분일까? 하나님께서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사람을 죄짓도록 유혹하시고 또한 그중에 일부만을 구원하기로 작정해놓고 결국에 그들로부터 영광을 얻으시려고 환장하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결코 죄의 창시자가 아님을 알라. 죄는 아담이 지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를 하나님은 인간에게 맡기셨다(창2:16~17). 하나님은 결코 죄를 짓도록 조장하신 분이 아니시다. 죄를 짓도록 유혹한 실체는 에덴동산에 불법으로 침투해 들어온 사탄마귀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그중에서 몇은 구원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영생을 얻고 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그것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맡기셨다. 뱀의 유혹을 받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도 칼빈은 인간이 죄로 타락하게 될 것까지도 다 예정해놓으셨다는 주장하였다. 심지어 칼빈은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제23장 8절)"고까지 말했다.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고 또한 미리 결정하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이끌어 갈 뿐이다. 결국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흘려 죽으시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2)무조건적인 선택

  두번째로, 무조건적인 선택에 대해 살펴보자. 이러한 주장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22장 5절에 나온다. 칼빈은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과 멸망을 무조건적으로 정해놓으셨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제22장 11절에서 "야곱이 아무 선행의 공로없이 은혜를 받은 것처럼, 에서도 아직 범죄로 더럽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롬9:13을 언급했다. 즉 "그들은 아직 선악간에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어찌 이렇게까지 성경을 왜곡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칼빈은 성경을 짜집기했다. 창25장을 읽어보라.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은 두 민족에 관한 쓰임이었다. 그리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창25:23). 이것은 두 민족의 사역에 관한 예정이지 결코 개인구원예정이 아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구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에도 종으로 살다가 죽든지 주인으로 살다가 죽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쓰임이 곧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더욱이 칼빈은 사람들을 속였다. 마치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롬9:13에 나오는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그때로부터 1,60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음을 빗대어서 말씀하신 것이다(말1:2~3). 또한 에서가 나중에 에돔족속이 되었는데, 그때 자신의 동생이었던 야곱민족을 섬기게 되리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지에 따라, 미리 리브가에게 말해주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인지는 에서와 야곱이 선택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에서는 장자의 권한과 축복을 경홀히 여겼고 그것 때문에 결국 다윗시대에 이르러서 야곱족속인 다윗왕을 섬기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구원을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단지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에서와 야곱의 구원을 만세전에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해놓은 것처럼 바꾸어버렸다.

  그래서 칼빈의 제자 중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칼빈의 <기독강요>가 나오고 얼마 뒤의 일이다. 당시 평신도인 코른헤르트가 칼빈의 예정론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을 냈다. 물론 이때 칼빈은 죽고 없었다. 그러자, 칼빈의 수제자였던 베자가 자신의 신실한 제자였던 알미니우스에게 코른해르트를 반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으면서 제22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보니, 그것은 민족에 관한 사역에 관한 예지였을 뿐, 그것이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장 신실한 칼빈의 제자였던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반대자가 되어버렸다. 결국 그의 주장이 후대에 가서는 알미나안주의가 되었다. 그렇다. 칼빈은 성경구절을 이곳저곳에서 짜집기하여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


3)제한 속죄

  세번째로, 제한 속죄를 보자. 제한 속죄란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주장이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 제22장 7절에서 "하나님은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하셨으나, 세상 자체는 그가 예정한 대로 자멸하게 내버려두셨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짜로 제한된 소수 곧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일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딤전2:4)",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요일2:2)",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심은(고후5:15)", "그는 참으로 온 세상의 구주인 줄 앎이라(요4:42)". 그렇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요3:16)",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9)"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일부러 작게 축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4)불가항력적인 은총

  네번째로,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해 살펴보자.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 제23장 14절에서 "한 번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사람의 자유의지는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다"고 했으며, 제22장 7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자신의 몸에 접붙인 사람을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요10:28)"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다른 길로 가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왜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것은 빛보다 더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죄짓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으로 나가려면 먼저는 죄를 회개해야 되고, 그 죄를 짓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짓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어찌 그 모든 것을 스스로 끊으려고 할까?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은 부모가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왔거나, 아니면 여러 인생경험을 통해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주님의 말씀을 기다린 자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인간은 거부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주신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뒤부터는 누구든지 스스로 자신의 선택의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의 결과를 묻는 것이므로 그분의 심판은 언제나 공의롭게 되는 것이다.


5)성도의 견인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칼빈의 교리 가운데 이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이 교리 때문에 사람들이 죄짓고도 회개하지 않고 기다리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회개치 못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교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21권 7절에 나온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힘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또한 칼빈은 제24장 6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하고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뜻"이라고 했다. 즉 "선택된 사람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이미 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안전하리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7절에서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칼빈은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로서 요6:37과 39절 그리고 요10:28을 중요하게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 말씀들은 한 번 믿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일까? 아니다. 왜 그런가? 먼저, 요6장 37절을 보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는 다 예수님께로 갈 것이고, 그들 중에 어느누구도 내쫓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기행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고 말씀하셨지, 결코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도록 예수님에게로 이끄시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그들을 내어쫓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만세전에 구원얻기로 예정된 자를 예수께서 내어쫓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은 구원얻기 위해 주님께로 계속해서 나아오는 자를 주님께서는 내어쫓아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려고 오는 자를 예수께서 '너는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지 않으니, 저리 가라"라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얼마든지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는 자는 구원얻도록 허용하시겠다는 뜻이다.

  이제 하나만 더 보자. 요10:28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들에게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받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을 주님께서 결코 빼앗기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사기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멸망치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지,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멸망치 않게 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문맥을 보라. 그 앞구절에 나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계속해서)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계속해서) 나를 따르느니라"고 했다. 영생을 얻고 멸망치 않을 사람이란 주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들으며(순종하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인 것이다. 오, 얼마나 간단한 이 속임수에 우리가 속아버렸던가? 문맥을 무시하는 성경해석, 중간에 살짝 끼워넣는 문장의 교활함, 성경원문을 무시하는 해석 등이 그동안 감쪽같이 우리를 속여왔던 것이다.


4. 나오며

  그렇다. 이제는 우리도 진실을 알 때가 되었다. 칼빈은 신앙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이미 인격적으로도 엄천난 문제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제네바시에 4년동을 통치하는 동안 칼빈은 무려 58명이나 되는 사람을 교수형과 참수형과 화형으로 죽였다. 대부분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살인하는 자는 과연 누구에 속한다고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요8:44).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경을 교묘히 짜집기하여 마치 성경이 자신의 예정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속였고, 문맥을 무시는 성경해석으로 예정론을 주입시켰으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장본인이자 폭군으로 속여왔으며, 어떤 사람은 만세전에 지옥보내기로 작정하셨다고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매우 불공정한 분이자, 지독한 편견을 가진 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사람을 뒤따르려고 애쓰는 것인가? 그가 죽은지도 벌써 500년이 지났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믿고 따라야 하겠지만, 사람의 주장이나 교리는 시대의 산물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는 천주교의 행위구원론과 교회를 통한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믿음구원론과 하나님 주권구원론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만 잘못되어 성경을 벗어나 버린 경우다. 이제는 우리도 알아야 한다. 그의 가르침이 결국 죄짓고 있지만 회개하지 못하게 막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구원은 보장받는다는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고 있다가 회개치 못한 채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는우리도 깨어날 때가 되었다. 정신 차릴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성경을 원문그대로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구원의 경주를 당신도 시작할 수가 있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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