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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7QGiuGNZM7A
날짜 2016-09-23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4:14~21(신약 267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말솜씨와 말씀, 능력과 구원, 초자연적인 기적, 구원하는 능력, 지혜와 말씀, 예수님이 하시는 일, 더 큰 일, 보혜사 성령의 오심

1. 들어가며

  오늘날 신사도나 빈야드운동 혹은 성령의 은사운동을 행하는 자들에게 능력의 나타남은 매우 중요한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항상 능력의 나타남을 추구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그들은 고전4:20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도 인용하는데 특히 요14:12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나중 성령을 받아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사도바울이나 예수께서는 정말 말이 아니라 능력이 더 중요한 신앙의 요소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2.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는 말의 의미

  먼저, 사도바울이 말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말(헬, 로고스)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헬, 뒤나미스)에 있다(고전4:20)"고 말했던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사실 이 구절만을 딱 떼어놓고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능력"에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헬라어 원문에도, "하나님의 왕국은 로고스(말씀, Word)에 있지 않고, 뒤나미스(능력, Power)에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주장은 옳지 못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4:20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과 능력은 본문에서 그러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문장에 등장하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그 단어가 나오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단어가 쓰이고 있는 비슷한 용례가 다른 곳에도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단어가 과연 상징이나 비유로 쓰였는지 아니면 실제나 실체로 쓰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3. 고전4:20에 나오는 '능력'의 의미

  그렇다면, 고전4:20에 나오는 '말'과 '능력'은 과연 문맥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사실 고전4:20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1장부터 4장까지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4장의 시작이 1장부터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고전4:20에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 개인의 말솜씨, 현란한 말솜씨를 뜻하는 것이며, '능력'이란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는 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힘을 가리킨다. 그렇다. 고전4:20에 나오는 '말'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곧 말과 지혜의 탁월함을 가리킨다(고전2:1). 그러나 사도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에 사용했던 말은 말 잘하는 사람의 현란한 말솜씨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자신을 그대로 전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원문, 영)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고 했다. 다시 말해, 고전4:20에 나오는 '능력'이란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게 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사람이 말 잘하는 어떤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자신을 그대로 증거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듣고 사람을 구원얻게 하는 힘을 "능력"이라고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또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했다. 곧 사도바울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도(말씀)로서, 구원을 얻게 하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니라(고전1:22~24)"고 했다. 그렇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원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바로 그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4:20에 말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교로이 꾸며대는 현란한 말솜씨를 의미하는 것이며, '능력'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힘을 가리킨다. 이것은 선포하는 전도를 통해 성취되어지며, 그 핵심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4장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한 사람을 구원얻도록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수고를 당하고 견디고 있는지를 소상하게 밝힌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0-13)"고 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능력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당하는 수많은 어려움과 역경과 핍박을 참아내는 일종의 것이다. 곧 해산하는 수고가 바로 능력인 것이다. 그렇다. 바울이 고전4:20에서 말하는 능력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뜻하는 단어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4.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

  두번째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령을 받은 후에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요14:12)의 의미를 살펴보자. 먼저 요14:12의 말씀을 그대로 직역해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그도 역시 행할 것이요, 또한 그것들보다 더 큰 것들도 행하리니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이라(요14:12)" 그렇다. 이 말씀만을 딱 떼어놓고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께서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들보다 더 큰 일들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특히 여기서 '더 큰 일들'이란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들보다 더 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성령사역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께서는 행하시지 않았어도, 자신을 통해서 오늘날 성령의 능력으로 숨낳은 기적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강변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들로는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가 하면 금가루가 손에서 묻어나오기도 하고, 겉옷을 휘두르기만 해도 사람들이 뒤로 벌렁 넘어지며, 지나가기만해도 사람들이 마구 웃어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것들은 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역사에 해당하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이것들보다 더 큰 일들"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문맥을 떠난 단어의 해석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러한 수법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14장의 문맥에서 "예수님보다 던 큰 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요14장에서 요14:12보다 앞에서 등장하는 구절들을 통해서 금방 찾아볼 수 있다.


5.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이란 말의 의미

  요14장의 시작은 이렇다. 이제 예수께서 천국으로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을 때가 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바로 그 길이라는 것이다(요14:6). 그러자,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자기들에게 보여주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가 그렇게 그들과 함께 오래동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자신이 누군지를 잘 모르겠느냐면서 자기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아버지 안에 거하시고 아버지는 자기 안에 거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한 마디를 더 추가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고 하셨다. 여기에 '일(헬, 에르곤)'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곧 아버지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동안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제자들을 향해, 그들이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이제는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요 자기를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는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14:12에서 말씀하셨던 "내가 하는 일"이란 누군가를 예수믿게 하여 천국에 들여보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보혜사 성령을 받아 행할 수 있는 "더 큰 일들"이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성령을 받아 예수님이 행하시지 않았던 더 큰 기적들을 행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행해오셨던 일들 곧 사람이 예수믿게 하여 구원얻게 하신 사역을 더 많이 행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폭발적인 복음전파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의해 앞으로 펼쳐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보다 더 큰 일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들을 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을 행할 사람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예수,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한데, 어찌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서 요한복음 13장의 말씀만 봐도, 그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인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는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니라"(요13:16~17)고 했다. 그렇다. 예수, 그분은 주인이며 보내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종이며, 보냄을 받은 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요14:12의 "이것들보다 더 큰(위대한) 일들"이란 믿는 자가 성령받아서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들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복음을 전파해서 믿게 한 숫자보다, 성령받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에 의해서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랬다. 그래서 행2장에 보면,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었던 수가 무려 3천명, 5천명이나 되었던 것이다(행2:41, 4:4). 이 숫자는 예수께서 공생애 내내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한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었던 베드로가 성령받고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예수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구원얻게 했던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우리는 단어나 구절 하나만을 딱 떼어 가지고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수법들은 이단이 사용하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칭 성령사역자들은 고전4:20이나 요14:12을 인용하여 자신들이 능력을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표지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아니다. 그것은 크게 본문을 떠난 해석이다. 그런 뜻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얻게 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역경을 참아내고 견뎌내는 것이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라는 단어를 오직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는 단어와 일대일로 바꿔서 말해서는 아니 된다. 어디까지나 문맥에서 그 단어의 용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지금까지 신앙생활의 핵심이 능력에 있다고 생각하여, 어디 가서 누군가에게 안수하여 능력을 받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면 더 이상 그러한 수고를 하지 말라. 또한 금식하거나 작정기도하여 어찌하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사역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너무 치우치지 말라.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파하러 나가게 되면, 그때 하나님께서 따르는 표적으로 함께 하실 것을 믿으라. 그때 초자연적으로 병이 치유되기도 하고, 귀신이 떠나가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 전파의 목적이 아님을 항상 명심하라. 복음전파의 목적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게 하는 것 곧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때로는 핍박도 견디고 역경과 환난도 참아내는 것이 바로 능력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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