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 의(義)는 칭의(稱義)만이 아니었다(마5:17~20)_2017-02-24

by 갈렙 posted Feb 2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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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8BZ0Vdd6ENM
날짜 2017-02-24
본문말씀 마태복음 5:17~20(신약 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바울의 칭의, 예수님이말씀하신의,심판으로서의의,구원으로서의의.전가된의,회개의의,지키는의,삶으로서의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의는 대부분 사도바울의 칭의론에 근거한 의다. 하지만 그것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는가? 왜냐하면 사도바울의 칭의론을 반박하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손바닦을 칠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바른 칭의론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구나"하고 말이다.

 

1. 들어가며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에서 듣는 칭의는 롬3장이나 갈2장에 나오는 바울의 칭의론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칭의론의 칭의론의 근간이라고 믿고 있고 또한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통전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 한쪽 면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는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했던 의(義)는 칭의(稱義)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씀한 것이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義)와 사도바울의 칭의 그리고 칭의에 관해 구약에 예표되었던 아브라함의 칭의를 통해서, 올바른 칭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의(義)란 무엇인가? 그리고 의(義)를 어떻게 얻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란 대체 어떤 것이며, 의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의를 얻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의(義)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의(義)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dikaioshune)'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올바름, 옳음"이라는 뜻과 "정의로움, 공정함"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는 옳은 일을 행한 자에게는 공정하게 상급과 보상을 주는 것이지만, 그릇된 일을 행한 자에게는 징계와 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받을 자에게 벌을 주거나 벌을 받을 자에게 상을 주게 되면 그것을 우리는 불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대부분 의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통해서 판정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판정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질문을 받고 자신은 행동으로 달아보아도 해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자신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이후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 인생들 중에는 행동이 모두가 의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도 없다(롬3:10). 그렇다면 말과 행동으로부터 의롭지 않은 우리가 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없을까?

 

3.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던 최초의 인물, 아브라함

  그런데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의롭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결국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았던 인물이 성경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경우를 찾아보는 것은 칭의를 알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의롭지 않은 자가 의롭게 되는 것인지 그 이유도 같이 살펴보자. 신약의 위대한 사도 바울은 의로운 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던 한 인물을 로마서 4장에서 소개한다. 그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대체 어떻게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을까? 사실 그는 자기가 무슨 의로운 행동을 해서가 아니었다. 비록 아브라함 자신은 의롭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을 뿐이다(창15:6). 이러한 칭의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4:5)". 하지만 이때 아브라함이 받았던 의를 과연 온전한 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4. 아브라함의 칭의를 바라보는 2가지 다른 관점

  아브라함이 창15장에서 받았던 의에 대해서 반기를 든 신약성경의 한 인물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던 장로 야고보였다. 아브라함이 창15장에서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후에 비로소 행함으로도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라고 주장했다(약2:21). 만약 그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단에 번제로 바칠 수 없었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가짜 믿음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때 기꺼이 독자 이삭을 제단이 바치게 된다. 그래서 그는 행함으로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그가 믿음으로 받은 의가 진짜인 것을 증명하였다.

  자,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와 야고보의 칭의는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롬4:3)고 말하는 반면에,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약2:21)고 증거하고 있다. 정리하면 바울은 믿음으로 칭의를 받았다고 주장한 반면에, 야고보는 믿음에다가 행함으로 칭의를 받았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를 외쳤던 루터같은 종교개혁자의 눈에 볼 때, 야고보서의 말씀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좀 빼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야고보서를 그렇게 안배하신 것을 두고 루터가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지금 로마서 뿐만 아니라 야보고서를 신약성경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만약 우리가 로마서만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로마서에 말하는 칭의만을 알고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칭의를 모르므로, 잘못된 칭의론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로마서와 야고보서라는 두 권의 성경책을 통해, 올바른 칭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로마서는 시작으로서의 칭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믿음으로서의 칭의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인생을 마치고 죽음을 문턱에 둔 어느 시점에서 자기를 뒤돌아볼 때에, 자기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순간 비록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해 온 것이라고 주장해도 행함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야고보서의 칭의는 완성으로서의 칭의를 말하고 있고, 로마서의 칭의는 시작으로서의 칭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예수께서 말씀하신 3가지 의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칭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사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이시며, 그분은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전능자라는 것을 말이다(요14:6, 8:45~46). 그러므로 우리도 칭의에 대해서 알기 원한다면, 예수께서는 칭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말씀하신 의(디카이오쉬네)는 사실 단지 8번 밖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의에 대해 완전히 꽤뚫고 있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수께서 의를 말씀하실 때에 크게 3가지 의(義)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말씀하신 "심판으로의 의"

  첫째, 예수께서는 "심판으로서의 의(義)"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심판으로서의 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의 판단기준은 믿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행함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나오고, 달란트의 비유나, 열처녀의 비유에서 동일하게 나온다. 이 비유들은 전부다 그들이 전부 자신이 가진 믿음 때문에 심판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들이 가진 믿음으로 심판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로서 심판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 때에서는 자신이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행했는가가 그 기준이 된다(마7:21~23). 그래서 심판때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그렇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의는 행함으로 인정받는 의라는 사실이다. 행함으로 심판받을 자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행함이 없으면 응당 지옥에 떨어질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으로서의 의는 야고보사도가 말한 행함으로 증명되는 의와 같은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으로의 의" 3가지

  둘째, 예수께서는 "구원으로서의 의(義)"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3가지 의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전가받은 의(義)요, 회개의 의(義)요, 지키는 의(義).

  여기서 첫째로, "전가받은 의"란 마3:15에 나오는 의로서,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음으로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신 바로 그 의(義)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모두가 죄에 동참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얻게 될 결과는 죽음이었다(롬6:23). 그런데 인간이 죄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고안해내셨다. 그것이 바로 속죄제사라는 것이다. 죄는 내가 지었지만 양이나 소같은 흠없는 속죄제물에게 안수를 통해 자신의 죄를 전가한 다음 그를 죽여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죄는 회중의 대표가 안수함으로 죄를 넘겨 속죄제사를 드리도록 했다. 그런데 그것은 예표였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막상 인류의 속죄를 위한 진짜 흠없는 제물이 보내셨는데 살펴보니 그것은 양과 염소가 아니라 죄없는 예수님이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인류의 속죄제물로 대신 죽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인류의 대표자였던 세례요한은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러자 그 다음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요1:29). 그리고 3년반의 공생애를 사신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바로 그 자리에서 죽으셨다.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의 모든 저주를 지시고 죽으신 것이다. 그때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였다. 인류의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가 이제 다 치러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인 것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아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일컬어 전가받는 의라고 한다.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예수님의 의가 내 의가 되게 하기까지 우리가 행한 일이 있었는가? 없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셨고 또한 직접 하신 일을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전가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가된 의를 일컬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라고 부른다. 이처럼 구원은 이러한 전가된 의 곧 칭의를 통해서 시작이 된다. 마치 창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음으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제사를 믿음으로 구원에 진입하게 된다. 믿음을 통해 구원의 여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한 칭의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이미 죄를 지어왔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죄를 지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었어도 죄된 본성은 우리의 육체가 깨지지 않는 한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해서는 두번째로, 회개를 통해서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덮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칭의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철저히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마음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눅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다(눅18:13~14). 세리는 철저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죄인인 것을 시인하였으며,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자신의 죄가 속죄를 받을 수 있으니 그 용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또 간청하였다. 그래서 그는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마21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와 매우 유사한데(마21:28~32), 두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가지 않았지만, 둘째아들은 가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나중에 후회하고 갔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였을까? 둘째아들이다. 이것은 비유다.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을 맏아들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고, 세리와 창녀들들은 죄인들로서 둘째아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누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아는가?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세리들과 창녀들은 요한이 의(義)의 도를 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죄들을 뉘우쳤고 세례요한이 소개해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고 믿지도 않았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 비유를 통해서 확실히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으로서의 칭의는 믿음과 회개가 동반된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얻는 칭의란 속죄를 믿는 믿음과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회개의 의(義) 외에도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의(義)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아니 천국의 그들의 것임이라(마5:10)"고 하셨다. 그렇다.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던 전가된 의가 있다고 구원받은 칭의를 다 얻는 것이 아니다. 이 의를 지키기 위한 의도 필요한 것이다. 일명 '지키는 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 어떠한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려서는 아니 된다.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으로서의 의의 세번째 요소다.

 

8. 예수께서 말씀하신 "삶으로서의 의"

  셋째,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삶으로서의 의(義)"를 말씀하셨다. 우리가 심판으로서의 의와 구원으로서의 의를 알고 있는 자는 반드시 2가지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적극적인 의의 실천이요 또 하나는 소극적인 의의 실천이다. 적극적인 의의 실천이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의를 추구하는 것이자(마5:6),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마실 것 등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마6:33). 그리고 소극적인 의의 실천이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에는 행함으로 심판받을 것처럼 행동해야 하지만, 그것을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한 것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마6:1). 외식함으로 행하는 실천은 어느것 하나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나오며

  그렇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는 믿음으로서의 칭의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심판으로서의 의와 구원으로서의 의를 동시에 말씀하셨으며, 삶으로서의 의까지 전부를 다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의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유대교의 잘못된 칭의론과 구원론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으로서의 칭의의 중요성만을 언급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를 통해서 심판으로서의 의(義)를 신약성경 안에 더 안배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전가된 의(義)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가지고 있어야 할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의(義)가 필요하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죄를 씻어내는 회개의 의(義)도 필요하며, 끝까지 지켜내는 의(義)도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완전한 의(義)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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