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관한 오해와 성경적인 진리들 그리고 부활의 영적 의미(고전15:20~28)_2019-04-26(금)

by 갈렙 posted Apr 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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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maWZHC-zb7E
날짜 2019-04-26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5:20~28(신약 28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부활과소생의차이,부활의몸(부활체)과영,부활의첫열매,부활의순서,부활의의의

예수님의 부활은 소생과 다르다. 소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다시 썩을 것으로 부활한 것이며, 다시 죽을 것으로 부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예수께서도 분명히 죽으셨지만 다시 썩지도 아니하고 다시 죽지도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많다. 첫째는 예수께서 공생애기간에 가지고 있던 그 몸을 그대로 부활한 것을 보면서 자기도 이 땅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육체 그대로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둘째는 성도들의 부활은 먼 미래 곧 주님의 재림의 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셋 다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활의 실제적인 사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은 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은 부활에 관한 전체적인 진리들 중에서 핵심사항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들어가며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사실 인류역사에 한 획을 긋는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던 사망의 권세를 박살내로 음부의 문을 열어버린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여러가지 면에서 원래의 사실과 다르게 알려진 것들이 있다. 그리고 부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며 그 중에서도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늘 생각케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주목보면서, 부활과 소생의 차이가 무엇이며, 부활체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부활의 첫열매이신 예수님을 기점으로 부활이 어떤 순서로 진행되고 있고 어떻게 끝마쳐질 것인지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로 부활의 참된 의미를 우리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부활(活)과 소생(蘇生)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시 살아나다"는 측면에서 볼 때에 "부활"과 "소생"은 사실 같은 의미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활"과 "소생"은 그 개념이 확연히 다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볼 때에, 소생에 비해 부활이란 확실히 2가지의 핵심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로는, 다시 썩는 것이냐 아니면 썩지 않는 것이냐 하는 관점이다. 소생은 다시 썩는 몸으로의 부활을 가리킨다면, 부활은 다시 썩지 않을 몸으로의 부활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 개념은, 다시 죽느냐 아니면 죽지 않을 것이냐 하는 관점이다. 소생이 다시 죽는 것으로 부활이라면, 부활은 다시 죽지 않는 것으로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준 부활에 대한 확실한 개념 정의다(고전15:53).

고전15: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살려주셨던 3명의 사람들 즉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5장)과 "나인성과부의 아들"(눅7장)과 "베다니의 나사로"(요11장)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소생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햐면 그들의 비록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는 했으나 다시 죽었고, 그들은 살아났으나 그의 몸이 다시 썩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몸(육체)의 부활을 경험한 것이지 결코 영의 몸으로 부활한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3. 부활의 첫 열매는 대체 누구며 부활체를 입는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사도바울은 고전15:20에서,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회개와 믿음을 지녔던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님의 부활 전에 한 사람도 부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다음의 부활의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보통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성도들 모두가 부활할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요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우주적인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분명히 있겠지만 그 전에 개인적인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러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살전3:13, 4:14). 그렇다.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 후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다시 오실 것이다. 둘째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이미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린양께서 다섯째인을 떼실 때에 [분향]제단 아레에 있는 자들이 나온다(계6:9~11). 그리고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흰옷을 입고 큰 무리들도 나온다(계7:9). 또한 예수 재림 전에 두 선지자(증인)들도 먼저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나온다(계11:10~12).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부터는 죽은 즉시 성도들이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서 예수님의 재림시까지 천년왕국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언제 부활체를 입은 것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였으니 그 뒤에 있었을 것이다. 엡4:8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셨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해석한다면, 그때에 이미 죽어서 그의 영이 낙원에 있힌 자들이 비로소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입성한 것이다(물론 그때도 낙원은 천국의 한 켠에 있었다. 하지만 아직 구약의 성도들은 부활체를 입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후부터 신약의 성도들은 죽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성도들의 부활이 마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는 것처럼 묘사했던 것일까?(고전15:50~52, 살전4:16~17). 그것은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부활의 진실을 잘못 알고 잘못 알려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때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쓴 초창기(살전4:16~17)와 중반기(고전15:50~52)의 기록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죽은 때를 주님의 재림의 때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니 처녀 딸이라도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은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죽을 무렵(A.D.67)에 마지막으로 썼던 편지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딤후4:7~8,18). 즉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처음에는 개인적인 종말(개인의 죽음)을 우주적인 종말(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그러자 나중에 가서는 자신이 사명을 다 하고 죽을 때에 죽은 즉시 천국에 들어가서 재판장이신 예수님에게 상급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가서는 우주적인 종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때에 주님이 실행할 것으로 알고,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종말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4. 성도가 죽으면 중간상태인 무덤 속에서 쉬고 있다가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부활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는 거의 가 다 성도가 죽은 후에는 중간상태에 머물러 있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체를 입은 후에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이 아예 교리에 나와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특별히 여기서 "중간상태"라 함은 몸은 죽었으나 영은 죽지 않고 잠자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람이 죽으면 무덤 속에서 영이 죽어있는 상태로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영이 무덤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에 에녹과 엘리야를 보라. 죽은 후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죽어서 무덤 속에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은 하늘 곧 낙원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까지 성도가 죽으면 중간상태로 무덤 속에 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에서 기인한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부터 살펴보자.

요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무덤 속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그때에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미 성도들의 부활과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해 놓았기 때문에, 이 말씀에 나오는 "무덤 속에 있는 자"는 죽어서 무덤에서 쉬고 있는 자라고 해석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성도들은 그들의 영혼이 잠자는 상태로 무덤 속에 쉬고 있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들은 거의 가 다 영적인 말씀이으로서 이 본문도 거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은 46년동안 지어왔던 물질적인 성전을 허물어뜨리고 그것을 다시 3일만에 건축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성전인 예수님의 육체를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다"는 말도, 예수님의 살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질 생명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피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줄 예수님의 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진짜 예수님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마시라는 말씀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요5:28에 나오는 "무덤"은 결코 흙으로 만든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덤"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말씀의 문맥에 들어있다. 25절로 가보자.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렇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란 이미 죽은 자들로서 영이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5장 25절과 2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무덤"이란 다 사람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체 속에 사람의 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슥12:1~2, 딤후4:22). 그래서 영이 죽어있던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의 말씀을 듣고 우선 자신의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육체가 죽을 때에는 죽은 즉시 곧바로 부활체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즉시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갈 것이고, 성도가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이후에는 바로 그 다음의 열매들이 계속해서 맺혀지게 되는데, 우선은 구약의 성도들의 부활이 있었고, 그때부터 죽은 성도들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 주님의 재림시까지 천년동안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5. 부활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로서, 성도들과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히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 끝인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인류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의의는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최소한 2가지 의의를 말해준다.

  첫째, 그분의 죽음이 우리 인류의 죄용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고전15;17).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최소한 예수께서 자기의 죄로 죽지는 않았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때에 예수께서 다시 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분의 죽음은 자기의 죄로 인한 죽음이었는지 대속의 죽음이었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다시 살아남으로 인하여, 최소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지는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6:23).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던 것인가? 그것은 그분의 죄로 죽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표적임에 동시에 그분의 죽음이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는 가장 장력한 표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인류를 대신하여 죽어서 인류의 죄값을 치른 것이 그분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류가 그 사건으로 인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며 ,회개하는 자에게 속죄의 은총이 주어지게 되고,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둘째, 성도들이 현재 주님과 교회를 위해 애쓰는 수고와 헌신 그리고 고난과 죽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왜 고난을 자처하며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서 복음을 전파했는가? 주님과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는가? 그것은 우리의 수고가 수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과 교회를 위해 수고한만큼 그날에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갚아주시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들이 그날에 주님께서 어떤 것으로 주실지에 대해 계산해보면서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날에 주님이 결정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오후5시에 농장에 들어와서 일을 했지만 비록 1시간만 일했던 자라도 하루치의 품삯을 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로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받는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다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 안에서 수고하는 모든 봉사가 다 가치가 있는 것이다. 주 안에서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날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현재의 고난과 핍박에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수고함을 내 시간과 물질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6. 부활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로서, 예수님 자신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보조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알려주는 놀라운 또 하나의 영적인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육체를 지녔던 공생애의 한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으로서 무소부재한 하나님이 되셨음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분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며, 세상 끝날까지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마28:20). 만약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성도들과 동시에 임마누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부활 후에 40일동안 무려 12번 이상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성도들과 동행하고 계심을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 그분이 선재하신 하나님이요,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7. 나오며

  예수님의 부활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분이 부활이 없었다면 지금의 기독교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목숨 걸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려고 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에 의해서다. 그리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따라 성령을 받았던 자들이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것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찬송하면서 기꺼이 사자밥으로 자신을 내어주었고 화형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죽은 후에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활신앙은 모든 시련을 이기게 도와주었고 고난과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해주었다. 그것이 로마를 300년만에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 주 안에서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음을 알았기에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달란트를 주님께 바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동방에서 가장 못사는 이 나라에 누가 와주었는가? 하찮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이 있는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삶을 주님과 복음을 위해 드리는 것을 가장 귀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다.

 

2019년 4월 26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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