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꼭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골2:16~23)_2020-01-17(금)

by 갈렙 posted Jan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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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5CInVII3qt4
날짜 2020-01-18
본문말씀 골로새서 2:16~23(신약 32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십일조의 유래, 율법의 십일조, 십일조의 쓰임, 십일조의 의미, 예수님의 십일조, 사도들의 십일조, 오늘날의 십일조

오늘날에도 과연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왜 사도바울과 초기교회는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던 것인가? 십일조도 하나의 율법조항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였으니, 이제는 더이상 십일조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 한사코 교회의 부패와 그 타락의 원인이 십일조로 인하여 재정이 풍성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재정을 잘못 관리하고 사용한 것에 대한 문제인가 아니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십일조를 굳이 드려서인가? 십일조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인 관점을 이제 들여다보자.

 

1. 들어가며

  십일조는 지금도 지켜야 할 명령인가 아니면 폐지된 명령인가?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가 필요에 따른 선택사항인가? 십일조는 자발적인 헌신인가 세금과 같은 필수적인 납부인가? 십일조는 복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행동인가 감사의 표시인가? 십일조 여부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론들과 주장들이 많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십일조관 내지는 헌금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십일조에 대한 유래와 율법의 규례들 그리고 십일조의 필요성과 십일조의 삼중적인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일조관과 사도바울의 십일조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율법인가 아니면 신약시대의 헌신인가?

  십일조에 대해 어떤 이는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율법으로 주어진 명령이니만큼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완성하셨으니, 지금의 시대는 더 이상 율법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 그러한가? 십일조는 정말 폐지된 율법조항의 하나인가? 아니면 사랑의 자발적인 헌신이자 감사의 표현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십일조도 율법에 속하는 것이니만큼 율법이 무엇이고 어떻게 구분하는지 정도는 조금은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구약의 율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굽의 포로생활에서 탈출하여 나온 이스라엘의 자유시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야 할 헌법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지킴으로서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계약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조항은 총 613가지라고 유대인 랍비들은 주장한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명령 중에서 "하라"는 명령은 248가지며, "하지 마라"는 명령은 365가지여서, 이것을 합치면 613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숫자가 더 늘릴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겠지만 율법만을 연구한 랍비들이 내놓은 것이니만큼 그정도의 조항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해둘 필요는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율법조항들은 하나씩 외울 수는 없고, 이것을 우리가 알기 쉽도록 분류하는 일도 계속해왔다. 그중에서 가장 잘 된 분류법은 율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는 것이다. 첫째,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과 재판법으로 나눌 수 있다. 둘째, 그중에 도덕법은 십계명이다. 셋째, 의식법은 또한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음식법, 제사법, 절기법, 정결법이 있다. 넷째, 제사법에는 제사법과 제사장법과 성막법이 있다. 다섯째, 안식일과 초하루법과 면제년과 희년제도는 날과 달과 해를 지키는 절기법에 속한다. 여섯째, 재판법은 시민법으로서 민법과 형법의 복합체데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표현이다. 그렇다. 율법은 이 정도로 구분하면 어느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3. 오늘날에는 십일조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율법에서 "십일조"는 어디에 속하는가? 십일조 뿐만 아니라 첫열매를 드리는 법은 과연 율법 중에서 어느 율법의 카테고리 속에 넣을 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십일조와 첫열매는 어디에 넣어야 할 지 사실 막막하다. 첫째, 도덕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법이란 십계명을 의미하는데, 십계명에 첫열매와 십일조를 넣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굳이 집어넣으려 한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 속할른지 모르겠다. 둘째, 십일조를 의식법에 범주에 굳이 넣으려 한다면 화목제물 가운데 자원제나 감사제 정도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피의 희생제사의 위주로 되어있는 제사법에 첫열매나 십일조가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고로, 우리는 우선 십일조는 기존의 율법의 범주 안에 넣기가 애매한 조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나 첫열매는 율법에는 속하나 율법의 3가지 범주 안에 넣을 수 없는 조항인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왜 우리가 십일조를 율법의 어느 범주에 넣을까하고 고민하는 것은 율법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율법을 완성하고 보완하고 강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특히 율법의 범주 가운데 의식법을 완성하셨다. 구약의 음식법과 제사법과 절기법과 정결법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요 예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다 이루었다" 하심으로 구약의 의식법은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동시에 폐지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의식법대로 살지 않아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오늘날 명태와 오징어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고,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은 폐지된 적이 없다. 마19:16이하에 나오는 부자청년과의 대화를 보면, 영생을 얻는 데에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물론 계명들을 전부지켜서 구원얻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없다. 그래서 회개하고 천국가는 것이다). 그리고 계21:8에 의하면,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가 결국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심판의 기본적인 기준은 십계명이요, 최종적인 기준은 생명책의 녹명여부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율법을 보완하시고 강화하셨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안식일규정이나 정결법을 가지고 캐묻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래 그것을 규정하신 이유가 무엇인지까지 알려주셨고, 그것 중에서 유대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못한 율법조항의 원리와 의도까지 말씀을 해 주셨다. 그리고 어떤 것은 강화시켰다. 특히 살인죄는 미워하고 욕해도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하셨고, 속으로만 간음해도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 산상수훈9마5~7)에서 말씀해주셨다. 다시 말해서, 출20장에 나오는 시내산의 율법이 이 땅에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헌법이라고 한다면, 산상수훈은 천국백성의 헌법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십일조는 의식법의 범주나 도덕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십일조에 대한 율법규정은 어떤 것이며, 여기서 십일조와 아울러 율법이 알려주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십일조에 대한 율법규정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십일조에 대한 율법규정은 창세기나 출애굽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하여 성막을 세우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세우고 난 뒤에 생긴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일조규정은 제사법과 정결법을 다룬 레위기서와 민수기와 신명기에만 나온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 같다. 첫째, 모든 백성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레27:30). 둘째, 십일조를 내야 할 것은 땅에서 나는 곡식(밀과 보리)과 나무의 열매에서 나오는 것(포도주와 감람기름)과 우양이다(신12:17, 레27:32). 셋째, 드려진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구별하여 세운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분깃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매3년의 십일조는 먹을 양식이 부족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쓰라고 하셨다(민18:21,28,신24:29,26:12). 넷째, 너무 멀어서 현물로 직접 가져오기 어려운 사람은 돈으로 환산하여 가져와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에서 다시 현물로 사서 바칠 수 있다고 하셨다(신14:24~26).

 

5. 십일조는 언제부터 있었던 일이며, 왜 율법으로 제정하게 되었는가?

  사실 십일조 규정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에 명령된 사항은 아니었다. 백성을 대신하여 섬기게 된 레위인과 제사장그룹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율법에서 규정한 이후로 처음으로 말해진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인가? 성경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 2번 나온다. 하나는 아브라함에게서 또 하나는 야곱에게서 있었던 사건에서 나온다. 첫번째 사건은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자신을 축복하러 나오는 샬렘왕 멜기세덱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바치면서다(창14:17~20). 그때 그는 자신의 전리품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아브라함에게 또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단회적이이었던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켜서 그렇게 한 일도 아니었다. 두번째 사건은 야곱에게서다.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에게 도피하다가 벧엘에서 꿈을 꾸게 되는데 그가 꿈에서 깨어난 후 하나님께서 서원기도를 올리게 된다. 자기를 그 길에서 지켜주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이다(창28:20~22). 하지만 이것도 야곱이 진짜 하나님께서 그렇게 드렸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진짜 야곱이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것도 야곱이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게서 서원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출애굽후 하나님께서는 율법규정을 통해서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분명히 지시하셨다. 자신의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이다(신14:22). 하지만 출애굽 직후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에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에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제사법이 주어진 이후부터다. 다시 말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막이 세워지고, 제사를 집례하기 위하여 레위인과 제사장이 세워진 이후에, 비로소 십일조법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차지하여 그 땅의 소산을 얻게 되면서부터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레27:30), 신14:22).

 

6. 예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는 과연 십일조에 관하여 어떤 말씀을 하셨으며, 초대교회 때에는 과연 십일조생활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의 해석의 기준점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요, 그것을 받아서 실천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어떠했는가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는 과연 십일조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살펴보자. 그것은 마23:23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보다더 확실한 이해를 위하여 헬라어원문에서 직역해보겠다.

마23:23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위선자안 서기관들과 바래시앤들이여! 왜냐하면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십일조로 드리고 있다. 그러나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 곧 정의(심판)과 긍휼(자비)와 믿음(신실함)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것들을 행하는 것을 계속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저것들도 버리는 것을 하지 말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일조는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형식적인 십일조생활이 아니라 마음을 같이하는 십일조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없은 형식적이고도 위선적인 십일조생활을 주님은 책망하신 것이다. 더불어 십일조의 규례을 지키는 것보다는 율법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생활을 할 수만 있으면 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

 

7. 사도바울은 왜 자신의 편지에서 유대인들의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초대교회의 기록에 왜 십일조에 대한 말씀들이나 사례가 등장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입조생활을 하라고 분명히 언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바울은 십일조에 대해서 아무말을 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이라는 직분자들이 생기기 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율법규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맨 처음에 십일조를 드렸던 아브라함과 야곱은 한 가족의 족장이었다. 그러므로 딱히 십일조를 바쳐야 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도 직업이 있어 열심히 살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초대교회도 A.D.313년 기독교에서 로마에서 공인되고 321년 일요일이 공휴일이 되기 전까지는 오늘날과 같은 건물을 지어놓고 거기에서 예배드리는 형태의 교회는 아직 완전히 틀을 갖추지 않았다. 다만 예수믿는 어떤 가정이 자신의 집에서 모이도록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수십 수백 수천 수만명의 성도들을 관리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심방할 교역자가 필요없었다. 다같이 직장에 나가 일하고 예배드리는 날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연보(헌금)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다가 바울의 시대에 또 다른 일이 생겨났다. 하나님께서 안디옥교회에게 지시하기를, 바나바와 바울을 때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팀을 위한 헌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울이 2차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그만 선교헌금이 바닦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자신이 개척했던 교회(빌립보교회)가 그에게 한 두 번 선교헌금을 보내왔다. 그때 사도바울은 말했다.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라(빌4:18)"고 말이다. 그리고 데살로니가를 떠나 아덴을 지나 고린도에 있을 때, 선교지원에 관한 획기전인 사건이 있었다. 그때에 선교헌금이 떨어져 바울이 직접 텐트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달리야로부터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이다. 그들은 같이 일하면서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게 되었고 바울로 하여금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이 바울선교팀을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바울은 선교헌금에 대한 부담없이 오로지 복음전파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이 소아시아에 유럽의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있었을 때에, 예루살렘교회가 큰 어려움에 처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였고, 그러자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해주었기에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두되었고, 선교비를 충당하기 위한 선교헌금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자 기독교회가 활성화되면서, 구약시대처럼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사역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다보니 다시 구약의 십일조가 교회게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십일조는 교회에서 마땅히 드리는 헌금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8. 오늘날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우리 성도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십일조는 왜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약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십일조는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이다(레27:30). 당시 모든 사람들은 땅이 없으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농사를 해야 했는데, 땅도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가 아담에게 주신 것이며, 식물과 동물이 자라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 곧 햇빛과 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농사를 할 수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둘째, 십일조는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여 오신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영원토록 마귀와 귀신에게 종노릇하다가 영원하 불못에 던져지고 말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불러주시고 믿게하시고 인쳐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이제 천국에서 왕노릇할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주시고 있으니 그분이 베풀어주신 영육간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것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십일조인 것이다. 이것은 창14장의 아브라함의 예와 28장의 야곱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셋째, 십일조는 나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주고 있는 말씀봉사자에 대한 보답의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감당했던 일이다. 하지만 골고다언덕에서 마지막 제사가 드려진 후, 그때부터 믿음의 공동체는 말씀을 나누는 예배로 바뀌었고, 그때부터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사역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성도들은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헌금이 부족해 목회자가 날마다 일선에서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면, 과연 주일에 말씀이 풍성하게 선포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목회자가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자로서 일하고 있다면, 육신의 양식으로 그를 돕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한 적이 있다(고전9:11~14).

 

9. 나오며

  과연 오늘날에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하여는 찬반논쟁이 뜨겁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폐하여졌기에 십일조도 폐하여졌다는 이들도 있고, 예수께서 마23:23에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형교회들이 성도들이 헌금한 십일조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지탄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십일조는 폐해졌다고 과감히 말하는 것은 말씀사역에 전무하는 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영적인 황폐함이다.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직접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십일조는 그만큼 오늘날 교회 사역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기본적인 신앙행위이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에 대한 보답의 행위이만, 구약의 레위인과 제사장들처럼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대한 감사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닿는데까지 십일조 생활을 잘 해야 하겠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헌신과 감사의 가장 강력한 표현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2020년 1월 17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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