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인의 죄를 사해주신 분은 아들인가 아버지인가?(요8:52~59)_2020-05-08(금)

by 갈렙 posted May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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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_5rMMRZc5RM [혹은 https://tv.naver.com/v/13721286 ]
날짜 2020-05-08
본문말씀 요한복음 5:52~59(신약 16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간음여인,아들이신예수,아버지이신하나님,내가그인줄믿지아니하면,자존자,하나님,한분하나님,예수과아버지의관계

1. 들어가며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서 놀라운 하나의 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한 여인이, 그래서 죽임당해야 마땅했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살게되는 장면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율법을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여인을 죽이라고 명했음에도 예수께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살려주었으니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역행한 것인가? 이러한 장면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 부족 때문에, 초기교회에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여호와)은 잔인한 하나님이요, 신약의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 여인을 유죄판결하지 않고 놓아주셨던 예수님의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것을 지켜보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과연 어떠한 분으로 이해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를 찾아보고자 한3다. 우리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과연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셨던 분이 아들이었는지 아버지였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간음하는 여인(결혼한 여자)는 율법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구약성경 레20:10이나 신22:22~24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유부녀(나 간음하는 남자(유부남)이나 둘 다 쳐죽여 악을 제하라고 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죽게 놔두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그 여인을 당장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녀를 죽여야 할지를 묻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고로, 이 말씀은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니며, 이 여인을 잔인하게 대하신 것도 아니다. 역시 예수님의 답변은 항상 인간의 생각 위에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매우 지혜롭게 대하신 예수님이 점차 누군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3.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대체 누구신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일단 흩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곧 대화 중에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라고 대답하셨다(요8:25). 이 말의 원뜻은 "내가 그가 누구인지 그 처음을 너희에게 발언해야 하는가"라는 뜻이다. 그러시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셨던 분이 자신에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예수께서 자신이 누군지를 그들에게 정확히 밝히시게 된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자신이 구약시대로 치자면, 여호와로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도 3번씩이나 말이다(요8:24,28,58).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누군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요8:37). 그리고 그 말씀의 뜻은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뜻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이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은 예수님에게 그들처럼 대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자 그들은 금새 말을 바꾸어 자신의 아버지는 한 분으로서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는 여호와가 아니라 마귀라고 강하게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주장만을 끝까지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아버지와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예수님과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말로된 개역성경으로는 예수님이 누군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말성경에서는 구약에서 유일한 하나님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I AM(에고 에니미)"라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을 단지 "내가 그"라고 번역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보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내가 그다"는 말씀은 "나는 ~이다(전능자)" 혹은 "스스로 있는 자(자존자)"라는 자기선언으로서,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씀을 예수께서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때에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했던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증언을 통하여 예수께는 한 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이셨던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측면에서 보면 "아들" 혹은 "인자(사람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분은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우리도 그분을 "아들"이나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할 뿐 진짜로 그분은 "나는 ~이다"이신 분이신 것이다.

 

5. 예수께서 "나는 ~이다(I Am)"인 것을 믿지 아니하면 어떤 결과는 초래되는가?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이다(I Am)"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누구든지 죄들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며, 예수께서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셨다(요8:24,21). 이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른다면, 그들이 죄의 노예로 살다가 죄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예수께서 누군지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라도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셨는지에 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무엇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큰 일이다. 남들이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 8장의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히 아는 일이야말로, 죄사함의 기초를 놓는 길이요,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해방받는) 길이며, 결국 구원받는 길이라는 길을 알아야 한다.

 

6. 육체를 입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유대인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는 대화 중에 당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밝히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채는 유대인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구약의 율법을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아버지)과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주고 계시는 예수님(아들)을 한 분의 하나님으로 결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당시 예수님 앞에 끌려나와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그녀가 유죄판결받지도 아니하고 죽임당하지도 않았음을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그것이야말로 구약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지금 그들 앞에 와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죄지은 여인을 용서해주고 계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것이며, 지금 그분이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만 칭해지실 분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존귀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어떤 유대인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지금 아들로 오셔서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7.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대체 누구인가?

  고로 우리는 오늘날에 유대인들이 대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성도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이때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정죄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선지자로 불리는 예수라는 작자가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구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날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말씀 곧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 때문에 그날 죽지 않고 운이 좋게 살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 왜 유대인들은 그러한 생각에 머물러 있었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결코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와서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동일한 것 같다. 예수님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날 여인은 죽었어야 했는데, 예수님 때문에 그 여인이 살았다고 판단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죄를 용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날 들려주신 말씀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별개로 분리되어 있는 분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여인의 죄를 사해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세전부터 아들로 존재하셨던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준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른 생각인가? 왜냐하면 그날 죄를 사해주신 분은 원래부터 아들로 존재하던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와서 아들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요8:42의 말씀으로 통해, 자신이 어떻게 육신을 입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셨다.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니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원문: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에게서 온 채 있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분이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천국에서 아들로 활동하시다가 때가 되자, 이땅에 아들로 오셨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께서는 이미 아들로 존재하고 있다가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때에 아버지로부터 안에서 밖으로 나오셔서(에크),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이미 성자로 존재하셨는데, 성육신의 시기에 자기가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성육신할 때에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와서 아들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데를 참고하면, 이러한 성육신은 이미 만세전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워놓으신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엡1:3~5, 마20:28). 고로 우리는 마1:23의 해석에 따라,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인 것이지,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되신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8. 아버지와 아들을 한 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계속 두 분으로 분리하려고만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아버지와 아들은 사실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으로서, 다른 출현이자 동시의 출현이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아들이 이 땅 가운데 태어나지 않았기에 , 하나님은 엄격한 의미에서 아버지라 불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아버지가 되려면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그저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신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다. 그것은 아들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의 성취였다. 이때부터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도 계시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성만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기 위해서 인성을 취하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사건이요.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죄지은 인류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신 부득이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역 또한 한 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하신 흔적이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론자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성자가 구약시대에 이미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활동하고 계시다가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그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아들이신 예수께서 단독적으로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만세전부터 그렇게 할 것이라 계획하셨던 하나님께서 오셔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고 계시는 분은 아들이지만 실은 하나님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못하니까,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자기선언과 선재(나는 나다,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느니라)을 그들에게 들려주신 것이다.

 

9. 성경주석가 칼빈은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께서 하셨던 자기선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렇지만 이와같은 사실을 당시 유대인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종교개혁자의 한 사람이었던 칼빈도 위와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칼빈이 주석한 요한복음에 고스란히 나온다. 즉 칼빈은 예수께서 "나는~이다(에고 에이미)(요5:24,28,58)"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그러한 표현을 두고 예수께서 자신을 한 분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쓴 요한복음 주석(요5:24)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한 선지자가 그 사람들 가운데 거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말씀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그들은 여전히 죄들 가운데 죽을 것이다"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신데 한 분 하나님께서 이제 구속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셔서 그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으로 그는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도 얼마나 많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말은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고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자격 곧 아버지와 동일본질을 가지셨기 때문이라는 초기교회의 신앙고백을 단지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동일본질을 가진 존재가 또 나타난다면 그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현재의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이지 여럿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구원의 경륜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셔서 그의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 속죄일을 하게 했다고 칼빈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아들로 계셨다가 오신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으로 계셨다가 인류 구원을 위해 아들로 오셔서 그의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는 잘못된 유대인의 생각을 어떻게 한 번에 정리해주셨는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관을 교정해주기 위해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고 따르는 아브라함을 들어 말씀하셨다. 그것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보았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환대해주었는데, 지금 그들은 자기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을 환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렇게 물었다. "네가 아직 50세도 못되었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말하느냐?"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 한 마디로 그들에게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히 정리해주신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원문: 아브라함이 생겨나기 전에도 나는 '나는 ~이다'이니라).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선재하셨던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 시대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로 계시되고 있던 때였다. 고로 예수께서는 당시에 비록 30세쯤 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만 으니라, 아브라함에게 그들을 다시 방문하게 되는 날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창18장에 있었던 이삭의 탄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어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분이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씀이었다. 고로, 성육신은 이미 아들로 존재하고 있던 성자께서 육신을 입은 사건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육신을 입으신 사건인 것이다. 고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은 다른 각각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이날도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기에, 예수께서 아들로 이 땅에 계셨지만 여전히 그분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동시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와같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주님은 자신이 인간 모습 외에 더 위대하고 높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라고 해석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으로 선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 하나님도 하나님, 예수 하나님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적대자들을 제거하려 할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죽이도록 했다. 그가 1541~1546년에 제네바시를 국가교회로서 통치를 위임받았을 때에 무려 58명이나 되는 사람을 처형(화형, 참형 등)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때 인용한 말씀은 레24:16의 말씀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죽이라고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한 분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죄를 지은 자는 마땅이 죽여야 한다는 율법말씀을 적용하여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는 중세 로마카톨릭시대에 있었던 마녀사냥과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한다. 칼빈의 생각에는 구약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 신약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어떤 말씀을 적용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정적들과 자신의 통치방식을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할 때에 놀라움을 금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과연 언제  어느때에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는 모조리 고문하고 죽이고 추방하라고 명령했던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 할 때에 칼빈은 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원수라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등을 포함) 적용하지 않은 것인가? 이것은 한 분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아주 악한 모습이라고 하겠다.

 

11. 나오며

  초기 교회에 마르시온과 같은 이단이 나옴에 따라 주님께서 누구신지를 정의해야 했다. 초기교회의 정의는 그나마 잘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활동하셨다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 등장하는 주어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표현이라고 해석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전 총신대 구약학 교수였던 김정우박사께서는 이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천상의 천사들의 회의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그의 논문에 정확히 밝히셨다. 그러나 창조는 그분의 지혜와 말씀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의 사역이었다(사44:24). 오늘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한 분 하나님의 사역인 것과 마찬가지였듯이 말이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는 창조이전부터 이미 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아들은 한 분 하나님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 성육신은 아들의 성육신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성육신한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표현들을 일치하게 되기 때문이다(마1:23, 딤전3:16, 롬9:5). 고로 예수께서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경륜을 따라 아들로 오셔서 그의 일을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5월 08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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