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천국복음(03) 구원은 순간인가 아니면 여정인가(2)(히3:12~4:1)_2020-07-24(금)

by 갈렙 posted Jul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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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7EDh2mDHheo
날짜 2020-07-24
본문말씀 히브리서 3:12~4:1(신약 25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구원여정,출애굽여정,광야생활,광야통과못한이유,광야멸망자,여호수아와갈렙,구원은경주다,회개가빠졌다

구원은 믿는 순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일생을 통해 이뤄가야할 여정인가? 성경은 믿을 때 그에게 칭의가 주어짐으로 구원의 여정에 첫발을 내딛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해 가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언제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믿을 때에 이미 자신은 구원받아버렸으니 구원에 대해서는 더이상 왈가불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 그 전체적인 조망이 있다.

 

1. 들어가며

  우리가 알고 있다는 구원에 관한 상식 가운데 어떤 것은 알고 있는듯 하나 사실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그중에 하나는 "구원은 과연 믿는 순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죽을 때에 받는 것인가"하는 질문도 여기에 속한다. 구원은 믿는 순간에 다 받아버린 것인가 아니면 구원은 이뤄가는 과정에 있어서 죽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는가? 그런데 종교개혁의 전통 가운데 속해 있다는 현대 신앙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이미 구원을 다 받아버린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어디에서 우리는 그러한 근거가 찾아낼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이 구원얻는 것이 과연 믿는 순간인가 일평생을 통하여 얻어가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메시는 이전에 했던 메시지의 후편이기에, 전편을 듣고 이 메시지를 경청한다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2. 구원은 믿는 순간에 받는 것인가 일평생을 통해 얻어가는 것인가?

  어떤 이는 구원은 믿는 순간에 주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믿는 순간에 이미 구원을 얻어버린 것인가? 더이상 구원에 대해서는 걱정이나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구원은 얻어놓았으니 다른 것에만 신경쓰면 되는 것인가? 여기서 우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칭의"가 곧 구원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칭의(의롭다함)는 구원과 동일하며,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는 이미 구원받은 것인가? 오늘날 종교개혁의 전통 아래에 있는 거의 모든 성도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칭의가 곧 구원의 완성이라고 기록된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는 구원의 시작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칭의를 얻기 때문이다. 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어느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볼 수는 없다(다만 그늘 그 시간에 죽는 사람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는 순간에 죽을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칭의를 얻은 후에 계속해서 일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번 믿어서 얻은 칭의가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의 종착역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구원의 첫출발이자 시작은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구원의 완성까지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 칭의를 받은 자라도 결국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 못하고 중간에 탈락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즉 칭의를 통해 구원의 여정에 들어섰으나 결국 중간 노정에서 탈락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칭의가 곧 구원의 완성이 된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믿는 순간에 얻기 시작한 것이지만 그것은 일생을 통해 얻어가는 것으로서, 결국 그가 죽고나서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입성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3. 구원이 믿는 순간에 시작되지만 일평생의 삶을 통해 완성되는 것을 알려주는 샘플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사람이 구원얻는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말했다. 첫째는 칭의(의롭다함을 얻음). 둘째, 성화(성결과 거룩 즉 깨끗하게 거룩하게 됨). 셋째, 영화(몸의 구속)가 그것이다(롬8:30).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었다면, 그는 이제 구원을 향한 경주의 트랙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다 달리고 골인지점을 통과할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주는 놀라운 샘플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여정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고 또한 광야생활 40년을 거쳐, 요단간을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모든 것이 곧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전과정으로서,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의 여정이 곧 어떤 사람 개인이 구원얻는 과정과도 유사하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고전10장을 보면,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도입했던 사도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 이스라엘 민족: 1)유월절로 출애굽시작 ---> 2)홍해도강(애굽군대 수장) ---> 3)광야생활(40년) ---> 4)요단강도하 ---> 5)가나안땅입성

  나. 한 사람 개인 : 1)유월절양이신 예수님을 믿음(칭의)으로 인하여 구원의 여정시작 ---> 2)세례(육적 몸을 벗음, 장사지냄) ---> 3)교회생활 ----> 4)육신이 죽음----> 5)천국입성

 

4.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가?

  B.C.1406년경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일까? 아니다. 극소수만 들어갔을 뿐이다. 그중에 육신이 살아서 가나안땅에 입성한 자는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와 유다지파 갈렙 뿐이다. 그렇다. 이 두 사람 외에는 200만명의 백성들은 다 광야에서 징계를 받아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이려고 출애굽시킨 것인가? 결코 아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데려가려고 그들을 불러내신 것이다. 하지만 실제 그 땅에 들어간 자는 극소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여정에 동참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의 여정을 잘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은 출애굽1세대들은 과연 죽은 다음에 그들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까? 성경은 그 반대라고 말한다. 그들은 징계를 받아 죽었으며, 진노를 받아 멸망당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그렇게 말했고(민32:13~15), 히브리서 기자도 그들이 결국 안식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히3:16~18). 유다서 기자도 유다서 1장에서 그렇게 말했고(유1:5) ,사도바울도 고전10장에서 그렇게 언급했다(고전10:5). 

민32:13-1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유1: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고전10: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히3:16-18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5. 왜 출애굽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사람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데리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의 99.9%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고 말았다. 그것도 징계로 죽었다. 그들은 멸망당한 것이다. 안식을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출애굽1세대들은 왜 출애굽하여 1차적인 구원을 받았고, 구원의 노정에 들어섰지만 구원의 경주를 끝마치지 못하고 중간에서 탈락한 것인가?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성경 전체를 정리한다면, 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하여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으며, 계속해서 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숭배했기 때문이다(출32:1,3~4).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30년동안 종살이를 하는동안 그들은 어떤 신을 섬기며 살았을까? 비록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신으로 섬겼던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본 신들은 다신들이었으며, 특히 송아지우상(하토르)을 섬기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런데 출애굽하여 50일째 되는 날 모세가 십계명과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오른 뒤에 소식이 없자, 자기들을 인도할 하나님을 만들자고 하면서 그들은 송아지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그들에게 송아지 형상은 결코 우상이 아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가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데, 그 하나님을 찾지 않고, 조금만 힘들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을 출애굽시켜 이끌어낸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비록 초자연적인 은혜를 힘입어 광야에 나왔어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했던 자들은 다 광야에서 엎드려짐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구원해 준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자기가 믿고 있는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숭배한다면 그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자는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 그리고 제3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와 우상을 숭배한 자들의 결국은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계21:8에 의하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전6:9~10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자는 결코 천국에 못들어간다. 

  둘째, 그들이 광야에 나왔으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원망과 불평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대적했기 때문이다(출14:11, 민13:2~3, 출17:3, 민16:3). 무려 10번씩이나 말이다(민14:22). 그들은 광야에서 조금만 힘들면 "우리를 이곳에서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면서 불평하였고, 그들이 나왔던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까지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애굽"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애굽은 사탄의 왕국을 지칭하고, 애굽왕 바로는 사탄마귀를 상징하며, 애굽의 군대는 사탄마귀의 졸병들은 귀신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은 사탄 다시 밑으로 들어가 그에게 종살이 하겠다는 뜻이다. 고로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결단코 천국에 데려가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틈만 나면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인가? 살펴보니, 그들은 광야에서 적어도 10번 이상을 원망했는데, 그 내용들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칼에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는 불평이었고(출14:11, 민14:2~3), 또 하나는 "목말라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는 불평이었다(출17:3).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굶주려 죽게 하려 데리고 나왔느냐""하는 것이었다(민16:3). 다시 "칼에 죽게 하려고 데리고 나왔느냐"는 불평의 하나는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민족이 바다와 애굽군대 사이에 놓여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했던 원망이었다(출14:11). 그리고 또 한 번은 가데스바네아아서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은 후에 나왔던 불평이었다(민14:2~3).

  그런데 이들은 원망하고 불평만 했을 뿐 진실로 회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물 한 모금 구하기 어렵고,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운 광야로 데리고 온 이유를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광야는 비록 물 한 방울 구하기 힘들고 풀 한 포기 없는 곳이지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간다면 부족함이 없는 장소인 것을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다(신2: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200만명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사람도 목말라서, 굶주려서, 칼레 죽게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에 들어와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31)"이라고 명령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인간을 들의 백합화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보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썩어없어질 것들이요 천국에도 가지고 갈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딤전6:8)

  셋째,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 준비해 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사모함이 없었기 때문이다(민14:26~35). 비록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나왔지만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았던 그들은 하나님께 그시로 죽기를 간청했다. 그곳에는 워낙 힘센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그들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한 것은 약속의 땅 곧 가나안 땅이었는데, 그 땅에 기골이 장대한 아낙자손이 살고 있다는 말에 그만 즈레 겁먹고 애굽땅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말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처리해주신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천국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이 없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천국에 들어갈 것과 천국에서 받을 상급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이렇게 말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 구원의 여정을 사도바울과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에 비유했는가?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도착하는 과정을 하나의 구원경주라고 생각하였다. 한 마리의 말이 달리기 시합을 하여 결국에 골인지점을 통과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비교적 선교 초년기에 썼던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운동장(스타디움)에서 달리기 하는 선수들처럼 자신도 열심히 상얻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고전9:24~27). 그리고 그의 사역의 중말기에 썼던 빌립보서를 보면, 아직도 그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그때도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빌3:12~14). 그런데 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했다(딤후4:7~8). 그렇다. 구원의 여정은 경주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히브리서 기자도 자기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외쳤다(히12:1). 구원의 시작은 출애굽의 경우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누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일평생을 통하여 추려내는 것과 같아서, 이 경주에서 승리하는 자가 천국에 입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구원은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 칭의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순간 그는 분명하게 칭의를 얻게 된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달리기 트랙에 올라간 선수인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이 땅에 보냈는지를 인지하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아야하고, 원망불평대신 감사와 찬양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이 주실 천국을 바라보고 신앙의 경주를 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혹 중간에 잘못하여 실수하고 어리석게 행동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즉시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페이스에 들어서야 한다. 놀랍게도 광야에서 10번씩이나 원망불평하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다. 회개만 했어도 그들의 육신은 광야에 엎드려져 죽었더라도 그의 영혼만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애굽 후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회개하지 못했기에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모든 성도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3가지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회개는 해야 한다. 회개가 모든 것을 원위치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요, 구원의 최종 관문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7월 24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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