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천국복음(53)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14) 탕자의 회개(2)(눅15:11~24 )_2020-09-11(금)

by 갈렙 posted Sep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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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POO36A0JVNY
날짜 2020-09-11
본문말씀 누가복음 15:11~24(신약 12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탕자, 둘째아들과맏아들, 젊은아들과나이많은아들,세리들과죄인들,서기관들과바리새인들,탕자의회개,탕자의죄,아버지의마음,맏아들의죄,회개의정의,관대한용서

1. 들어가며

  "잃은 아들의 비유"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들려주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당시 어떤 대상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신 것인가? 우리가 여기서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말씀은 "비유"로 들려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눅15:3). 그런데 비유는 항상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깨우침을 받으려 하는 자에게는 깨우침을 받게 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고로, "탕자의 비유"는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할 대상에게 깨달으라고 주신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대체 누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었으며, 이 비유는 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들려주신 말씀인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2. "탕자의 비유"는 누구에게 들려주신 말씀인가?

  "탕자의 비유"는 대체 누구에게 들려주신 말씀인가? 우리는 그때 당시 1차 독자가 누구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면 비유에는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3가지 비유들은 성자와 성령과 성부 하나님의 순서로 들려주는 비유들로서, 잃었다가 되찾은 것에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이며,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다. 그리고 셋째는 잃은 아들의 비유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둘째아들인가 아니면 맏아들인가? 우리는 보통 여기서 탕자는 둘째아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탕자는 둘째아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맏아들도 탕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3가지 비유를 들려주고 있는 대상이 두 종류이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세리들과 죄인들이며, 두번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눅15:1~2). 고로, 둘째아들과 맏아들은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 둘째아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리키고, 맏아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오늘날에 어떤 이는 둘째아들은 이방인들을 지칭하고, 맏아들은 유대인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딱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 이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진정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며,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인지을 곰곰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3. 아버지에게 있는 두 아들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들이 있었다. 더 나이많은 아들(맏아들)이 있고, 더 젊은 아들(둘째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더 젊은 아들(헬라어원문상)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갈 분깃(몫)을 달라고 하더니, 그만 며칠이 안 되어 그것을 전부 모아서 먼 나라로 가버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것을 허랑방탕하여 낭비하더니 결국 탕진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나라에 앞친데 덮친격으로 심한 흉년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그 나라의 백성들 중에서 돼지치는 사람에게 붙여살게 되었다. 그런데 돼지를 치면서도 아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어느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주는 자가 없었기에, 그가 자신을 돌이켜보며 회개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대강 줄거리다. 

 

4. 둘째아들(더 젊은 아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그렇다면 둘째아들은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얼핏 보기에 둘째아들에게서 죄를 찾기가 쉽지 않다. 죄란 결국 십계명을 어긴 것을 가리키는데, 그가 십계명의 어느 계명을 어겼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몫을 낭비한 것이 무슨 죄라고 딱히 지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둘째아들이 지은 죄가 서서히 드러난다. 그가 지은 죄는 첫째, 제5번째 계명을 어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아들은 젊었다. 그리고 아직 산전수전을 겪어보지 못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할 수만 있으면 멀리 떠나고자 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몽땅 모아서(그리고 팔아서) 아버지의 곁을 멀리 멀리 떠나버렸다. 그러면 아버지가 자기를 걱정하시고 염려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둘째아들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고로 그는 불효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둘째, 제10번째 계명을 어겼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께 받은 상속재산을 모아서 외국에 가서 쓰되 그것을 절약해서 쓰지도 않았고, 그것으로 다른 사업을 하는 데에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하늘로 날려버렸다. 물쓰듯이 써버린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보고자 한 것에 대한 표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욕심대로 살아보려고 한 죄가 10번째 계명을 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굳이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그가 돈을 하나님이나 아버지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제1계명도 어겼다고 할 수 있다. 

 

5. 둘째아들이 만약 외국에서 돌아오지 않고 거기에 머무렀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둘째아들의 회개한 것에만 촛점을 맞춘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 회개하기만 하면 영원히 효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한 번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어버리기에, 자신이 설령 범죄하여 잘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천국백성이 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자기를 회개시켜 천국에 데려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죄를 지어도 태평하다. 그 죄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어도 태평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 천국 가는 데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어찌하든지 회개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다. 

  먼저, 우리는 둘째아들의 상태를 점검해보자. 그가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나 그가 외국으로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을 때나, 그의 신분은 여전히 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며, 또한 당시는 상속자인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둘째아들은 범죄하기 전에도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그가 범죄한 후에도 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가 외국에 나가기 전에 그는 상속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그가 만약 외국에 나가서 허랑방하여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거지가 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었을 때, 그는 계속해서 아버지의 아들이며 상속자라고 할 수 있을까? 명목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이미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이 내 아들은 아직도 죽은 자로 있어 왔는데 다시 살아난 것이며, 이미 잃어버린 자로 있어왔지만 다시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눅15:24)"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집을 떠나는 순간, 그 아들은 이미 죽은 아들이 된 것이며,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이 된 것이다. 아들로서 그리고 상속자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가 자기가 처한 곳에서 계속 머무른채 아버지께로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자식이자 상속자이지만 이방인의 땅에 있을 때에 그는 종이나 거지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만약 둘째아들이 외국에서 돼지를 치다가 죽었다면 그는 결국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고, 둘째아들은 "원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죄를 지은 성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잃어버린 아들이 외국에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강제로라도 다시 자기 집으로 데려갔느냐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 둘째아들이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회개는 자기의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강제로 코를 꿰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는 탕자가 해야 할 일인 것이지 아버지가 대신 해주거나, 강제로 회개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는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관대한 분이심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그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회개하는 자를 그분은 용서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이상하리만큼 느긋하다. 죄를 짓고도 즉시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회개시켜 데려가실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를 속속히 보여주는 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람을 보내어 아들을 찾아올 것을 시키고 있는가? 아니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고 자기의 집으로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로 되돌아오는 것 자체가 회개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회개할 때에라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어떠한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모든 죄에 대해서 관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짓고 있는 자신은 거기게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아들과 상속자가 아니될 수 있다. 마귀와 귀신들의 종이 되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6. 둘째아들만 죄인인가 아니면 맏아들도 죄인인가?

  사실 "탕자의 비유"는 1부에 2막이 있는 이야기다. 1부 1막의 이야기는 눅15:11~24절까지에 나오는 둘째아들의 비유다. 그런데 1부 2막 이야기는 눅15:25~32절까지 나오는 첫째아들의 비유다. 고로 탕자의 비유는 2개의 비유가 들어있는 것이다. 고로, 둘째아들(더 젊은 아들)은 자신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용서받은 죄인이라면, 맏아들(더 나이많은 아들)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이 죄라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는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맏아들도 회개하지 않은 채 그그대로 있다면 그도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할 것이다. 왜냐하면 맏아들도 엄청 불효자식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있던 날, 맏아들은 들판에 가서 일하고는 늦게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의 아버지의 집에서 나오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그는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행동에 격노했기 때문이다. 둘째아들을 위해서는 아버지가 살진 소까지 잡았는데, 자기는 아버지의 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밖에까지 나와서 그렇게 설득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놓고는 집에 들어가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맏아들은 집안에 있는 탕자였던 것이다. 

 

7. 이 비유가 가르쳐주는 참된 회개란 대체 어떤 것인가?

  이 비유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2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첫째, 이 비유는 과연 어떤 자가 죄용서를 받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둘째, 죄용서를 비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우하시는지를 또한 알려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누가 죄용서를 받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다. 자신의 죄를 겸손히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 뒤, 하나님께서 내리실 어떤 처분일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겠다고 하는 자다. 그러한 자는 지난 날에 지었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죄는 예수 믿을 때에 자동적으로 다 용서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할 때에 용서받는 것이다. 또한 둘째로, 죄용서를 비는 자에게 하나님은 한없이 관대하시고 어떤 죄일지라도 다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아버지를 맏아들은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자기는 동생이 집을 떠난 후에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열심히 일하다가 늦게 온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이 돌아와 회개한 것을 보고 아버지가 그를 다 용서해주신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맏아들이 그날 늦게까지 일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아버지의 근심걱정을 덜어드리려고 그렇게 한 것인가? 아니면 남겨진 아버지의 재산을 받으려고 그렇게 한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겸손해져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아버지께서 내리실 어떠한 처우라도 기꺼이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회개하는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원칙도 정리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그리고 몇 번이든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요 관대함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하나님께 그것이 불의하다 혹은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류의 모든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직접 피조물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와 죄인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사9:6,딤전3:16). 그렇더라도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회개하면 우리의 죄는 다 용서받을 수가 있다. 이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하지만 회개는 결코 하나님께서 대신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마지막 관문은 역시 "회개"인 것이다. 

 

8. 나오며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회개와 용서에 관한 말씀 중에 정말 보화같은 말씀이다. 여기에 보면, 회개하는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범죄한 자에게 있어서 회개란 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도 적나나하게 나타난다. 그렇다. 아버지는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아들이 회개하여 용서받고 회복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죄인을 강제로 회개시키지는 아니하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신 일은 간접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일 뿐이었다. 그곳에 기근이 발생할 때에 더 심한 기근이 발생하게 하였다. 그래서 죄인인 처지에 있는 둘째아들의 삶을 더 어렵게 하여 회개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준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능해서가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날마다 강제로 회개시키려 한다면, 사탄마귀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참소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공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류의 죄값을 없애기 위해, 창조주께서 직접 360가지 이상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값으로 죄인들을 구속하셨다는 것을 우리 성도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자신이 지금 죄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자신의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아니다. 죽어보면 이 말인 과연 괜찮은 말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알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때 가서 후회하고서 회개하려한들 그곳에서는 회개가 불가능하다는것을 알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회개해도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고로 회개는 오직 자신의 육신의 목숨이 붙어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할 일이 있으면 지금  당장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합법적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9월 11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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