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원제: 용정의 노래)_윤혜영작사 조두남작곡

by 갈렙 posted May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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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비암산 일송정.jpg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드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룡문교에 달빛고이 비춘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룡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일송.jpg



선구자 노래와 룡정에 대하여..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 노래는, 처음 "룡정의 노래"라고 하였다.
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룡정의 노래"라고 했던 것이다.
일송정, 해란강, 요드레우물, 룡문교, 룡주사, 비암산이 모두 룡정에 있기 때문이요
이러한 경물을 빼여 놓으면 가사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선구자" 노래는 일본제국주의 침약자들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겼던 암흑한 시절에 조국광복을 위해 피흘리며
싸우다 죽어 간 수 많은 이름모를 독립투사들에게 바치는 마음을 담아 창작된 것으로서 오늘도 민족의 넋을
일깨우고 독립투사를 기리는 마음으로 시대와 세월을 초월하여 애창되고 있는 곡이다.
또 노래가 애창될수록 많은 동포들이 가사에 수록된 명소를 찾고있는 것이다.


이 노래의 작사자 윤해영선생은 1909년 조선 함경북도에서 출생하였다.
윤해영선생은 1930년부터 10여년 남짓이 룡정에서 생활하면서 룡정의 풍토인정에 물젖었다.
이때 그는 룡정의 "예우사"와 "문우사"에 참가하여 많은 시와 가사를 창작하다가 1943년부터 1946년까지
흑룡강성 녕안현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효종"잡지를 꾸리는 한편 또 조선족문공단의 지도와 감독도
맡았다. 이 기간에 "인민신보"와 "효종"등 많은 신문잡지들에 가사, 시, 산문 등 20여편을 창작발표하였다.
"선구자"의 작곡자 조두남선생은 1912년 10월 9일에 조선평양에서 출생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인
말스베리와 조셉 개논스에게서 음악공부를 하고 1933년 중국 목단강시에 가서"류랑극단"을 조직하였다가
1943년 조선평양으로 가 "적옥소녀가극단", "성보가극단"등 예술단체에서 사업하였다.
그후 1944년에 또 다시 목단강에 갔다가 해방후 고국으로 돌아가 음악창작에
혼신을 바치면서 한국 "예총"마산지부장, 마산음악가협회 지도고문,
"경상남도 문화상" 심사위원을 력임하였다.
룡정의 경개와 우리민족의 애환이 넘치는 "룡정의 노래"의 가사는 1933년에 창작되였다.
윤해영선생은 목단강에 있는 조두남이 작곡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이해 가을 석양에 싸구려 려인숙에
투숙하고 있는 조두남을 찾아가 보니 21세의 말쑥한 청년이 그를 맞아 주었다.
윤해영선생은 자기가 쓴 가사를 작곡해줄 것을 부탁하였더니 조두남은 룡정에 가본 일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
주저하였다. 그러건 말건 윤해영은 조두남에게 룡정을 보는 듯이 선하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일송정.jpg



작곡할 때 조두남은 윤해영의 1절가사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나 2절과 3절에 있는 "눈물젖은 보따리"와 " 흘러
흘러 온 신세"같은 구절을 빼어 버리고 작곡자 조두남이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로 고쳤으며 광복후 조두남선생이 또 "룡정의 노래" 제목을 "선구자"로 고쳤던 것이다.
"룡정의 노래"가 "선구자"로 탈바꿈하여도 결국 룡정을 떠나서는 안될 노래이다.
이 노래가 작곡된 후 고국과 해외의 수 많은 동포들이 애창되고 있었으나 룡정사람들은 이 노래를 알고 있지 못했으며 설사 알고 있다하여도 감히 "남조선"노래라고 부를 엄두도 못냈다. 개혁개방이후인 1986년 7월 룡정력사의 한페지를 차지하는 룡정중학교(즉 대성중학교)에서 전례없던 규모가 크고 범위가 넓은동창만회를 조직하였다.
동창만회에는 해내외의 여러 명문대학의 교수, 실업인, 지명인사들이 약 30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 귀빈들 가운데는 미국에서 오신 서화숙선생도 있었는데 졸업생 대표로 그가 노래를 부를 차례가 되었다.
이때 서화숙선생은 "몇십년만에 고향에 왔는데 고향의 노래"를 부른다면서 "선구자"노래를 불렀으나 그와 함께 따라 부르는 룡정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서화숙선생은 매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동창회가 끝나자 그는 가지고 왔던 "선구자"노래가 록음된 카세트를 남기면서 이 노래의 창작된 과정을 자상히 알려주었다.
이후로부터 "선구자"노래는 삽시간에 룡정사람은 물론 중국땅 그 어디에 살고있든 동포들의 애창곡으로 되었고, 그 어느 노래방마다 이 노래를 부르고 엄숙한 예술무대의 독창곡으로 엄선되여 부르게 되었다.
"선구자" 이 "룡정의 노래"는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동포들이 천세만세 길이길이 애창될 것이며 "선구자"와 함께 룡정의 위상은 숭엄하고 "선구자"와 함께 룡정의 기상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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