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제사의 의미와 3가지 종류

by 갈렙 posted Sep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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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제사

2017. 9. 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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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는 우리나라 미풍양속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 내면을 보면 매우 복잡한데, 이는 제사가 중국식 의례와 한국식 관습이 합쳐져서 오랜 시간을 거쳐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제사를 이해하기 쉽도록 시기나 장소에 따라서 기제사(忌祭祀), 사당제사(祠堂祭祀), 묘소제사(墓所祭祀)로 나누어 언급해 본다.

오늘날 우리가 각 가정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1년에 한 번 드리는 기제사이고, 그 다음으로는 1년에 4번 정도 묘지에 가서 지내는 제사로 묘제(墓祭)가 있다. 반면 사당제사는 종가에서나 할 수 있는 제사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제사를 행해지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시기
장소
기타
기제사(忌祭祀)
돌아가신 날
종가나 일반 가정
4대봉사
묘소제사(墓所祭祀)
10월중
또는 추석(한식)
묘소
 
사당제사(祠堂祭祀)
또는 명절제사
설날, 추석
사당이나 일반 가정
 

 

1. 기일제
기일제(忌日祭)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다. 통상 기일제는 제주(祭主)를 기준으로 돌아가신 부모․조부모․증조부모․고조부모까지 지내는 제사다. 물론 오늘날에 이르러 3대나 2대까지 줄여서 지내는 가정도 있기는 하나, 대개는 4대까지 지냈다. 그리하여 가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제사의 대수를 줄이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것이 현실이다.
또한 신위(또는 지방)를 모실 때에는 대개 부모 두 분을 함께 모시고, 제수의 경우에도 밥과 국 등을 각각 올려서 지내는데, 이를 합설이라고 한다. 제수를 장만하는 일은 대개 장손이나 장자가 주도하며, 제사의 진행도 이들이 주도한다. 이러한 관행이 제주(祭主)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제사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조선시대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았다. 조선 전기와 후기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제사 대수(代數)에서 전기까지는 사대부가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위로 3대 조부, 즉 부모․조부모․증조부모까지 지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16세기 말부터 학봉 김성일을 비롯한 이황의 제자들에 의해서 4대봉사가 주창되었고, 이후로는 사대부가에 4대봉사가 일반화되었다. 참고로 이전에 퇴계 이황은 3대봉사를 우선시하였으나 4대봉사를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허용한다는 입장을 취한 바가 있었다.

4대봉사를 주장하는 성리학자들은 {경국대전}에는 사대부가에서 많아야 3대까지만 봉사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經國大典} 禮典 奉祀條에 따르면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서인은 부모만 제사하도록 되어 있다), {가례}에는 4대봉사를 하도록 규정한 사실을 중요시 여겼다. 이들은 {가례}에 4대봉사가 들어간 이유는, 이전에 송나라 정자(程子)가 4대봉사를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고, 주자(朱子)는 이에 따라 {가례}에 적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김성일을 비롯한 몇몇 성리학자들의 주장대로 4대봉사가 유행하였고, 이러한 관행은 최근까지도 당연시 여겨졌다.
제삿날 신주를 모실 때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합설을 하는데, 이러한 관습은 {가례}의 규정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가례}에는 “단지 한 분의 신위만 놓는다”(但止設一位)고 되어 있다. 그러함에도 전통시대는 두 분을 함께 모시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까지도 합설이 바른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예제로만 본다면 한 분만 모시도록 되어 있지만, 이에 뒤따르는 미안함 때문에 관습적으로 합설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제사의 준비나 진행을 종손(宗孫)이나 장손(長孫)이 주관하였는데, 이러한 모습 역시 조선 후기에 정착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와는 달리 윤회봉사(輪廻奉祀) 또는 분할봉사(分割奉祀)라는 것이 유행하였다. 윤회봉사는 부모의 제사를 자식들이 순번을 정하여 지내는 것이었고, 분할봉사는 자식들이 나누어서 지내는 제사였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각 지역마다 문중(門中)이 형성되고 종손을 중심으로 조직화되면서 종손이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고, 각 지손들은 종손을 위하여 지원하는 일을 아끼지 않았다. 종손은 제사를 주관한다는 부담과 의무가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변으로부터 사회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그 권한도 막대하였다. 그래서 예전에 영남에서는 경상도관찰사보다 퇴계 종손이 낫다는 말도 있었다.

 

2. 묘소제사

묘소제사(墓所祭祀)는 그야말로 묘소를 방문하여 지내는 제사. 요즈음도 문중에서는 음력 10월 중 하루를 택하여 묘소에 가서 문중인들이 모여서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이 경우 작은 규모의 문중에서는 10여 명이 모이기도 하지만, 문중의 규모가 크고 제사의 대상인물이 시조나 파조가 되는 경우에는 수백 명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천여 명에 이르기도 한다. 반면, 일반인의 경우에는 가까운 조상의 묘소에 대하여 추석날에 (차례를 지낸 다음) 성묘하기도 한다.
그럼, 조선시대의 묘제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이 경우에도 조선 전․중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대개 조선 전기에는 부모나 가까운 조상에 대해서는 설날․한식․단오․추석 4절기에 그때마다 찾아가는 관습이 유행하였다. 1600년을 전후한 시기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진성이씨 종손 이정회는 중앙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대개 고향에 있으면서 절기마다 가까운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는 절기마다 흩어져 있는 부모․조부모․증조부모 등의 묘소를 찾았으며, 때로는 비가 와서 올라가기 어려우면 산 밑에 있는 사찰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안동의 이정회가 절기별로 묘소를 찾는 관행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러한 묘소제사는 기제사나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보다도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제사는 1년에 한 번 집에서 지내면 되지만, 묘제의 경우에는 한 해에 4번 묘소를 방문해야 하였다. 또한 한 번의 명절에 여러 분의 묘소를 다녀와야 하였으니, 그러려면 적어도 며칠은 소요되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 때, 조선 전․중기에는 집에서 지내는 기제사보다도 묘소를 찾는 일을 매우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 살았던 퇴계 이황은 이러한 풍습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신혼(神魂; 사당의 위패를 의미함)을 경시하고 체백(體魄; 돌아가신 시신을 의미함)을 중요시하는 사실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중기에 절기마다 묘소를 찾는 풍습은 조선후기가 되면서 차츰 줄어들었다. 4절기 모두 찾기보다는 봄의 한식, 가을의 추석 위주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묘제의 횟수에 대해서도 이미 퇴계는 스스로 조상(고조부 李云侯)의 묘소에 대해서 네 명절마다 찾기가 어려우니 춘추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었다. 또한 정조에서 순조대에 활동한 성리학자 김매순(金邁淳){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八月 中秋)에서 사대부 집에서 설날 등 네 명절에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설날과 동지에는 제사를 안 지내는 수도 있으나 한식과 추석에는 성대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묘소제사의 경향은 모든 곳에서 동일하지는 않았고, 지역이나 가정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대수가 먼 파조나 시조의 경우에는 1년에 한 차례 날짜를 정해서 대대적으로 제사지내는 관행이 생겨났다. 이러한 대규모적인 제사의 설행은 역시 조선 후기에 각 지방에서 성행하는 문중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였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먼 조상뿐만 아니라 가까운 조상에 대해서도 1년에 한 차례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러한 11회에 걸쳐 묘소에 제사지내는 관습은 적어도 경상도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음력 10월이 되면, 시조를 비롯한 먼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가까운 조상으로 내려오면서 연이어 제사를 지내곤 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간에는 심하면 한 달 내내 묘소제사에 매달려야 할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묘소제사는 지역에 따라서 시제(時祭) 또는 시사(時祀)라고 하고, 시향(時享)이라고도 하였다.

 

3. 사당제사

제사에서는 사당제사(祠堂祭祀) 또한 중요하다. 이 제사는 전통시대나 지금이나 차례(茶禮)나 명절제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제사, 설날과 추석에 지낸다. 이 제사는 본래 신주(神主)가 있는 사당에서 지내게 되어 있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신주 대신에 지방을 써 붙여 놓고 지낸다.(물론 기제사의 경우에도 신주 대신 지방을 많이 쓴다)
요즈음에는 명절제사를 사당에서 지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졌고,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종가에서만 그 명맥이 유지되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젠 도시의 아파트에서 지내는 경우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면서 가장 비중이 큰 제사가 되었다. 가정에 따라서는 기제사를 따로 모시지 않고 명절 때에 조상을 한꺼번에 모시는 풍습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럼, 조선시대에는 어떠하였는가? 이 경우에도 지역이나 문중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본래 고려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는 사당을 운영하는 종가가 드물었고, 이로 인해 사당제사의 개념은 매우 희박하였다. 그러다 점차 문중이 형성되고 종손이 종가에 사당을 짓고 살면서 지낼 수 있었다.
성리학자들은 종가에는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가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제사인 사시제(四時祭)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례}에 따르면 사시제는 사당에서 각 계절마다 중월(仲月; 두 번째 달)에 지내는 제사다.(첫 번째 달에는 종묘사직과 같은 국가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렇다면 음력으로 2, 5, 8, 11월에 해당한다.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다면 이 제사는 계절마다 사당에서 위패를 모시고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이 방법은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이 권장하였던 제사 방식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종가가 형성되고 사당을 지었다고는 해도 갑작스럽게 절기마다 사당제사를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면 우리에게는 사시제를 지내는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네 명절마다 묘소를 찾아가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 그리고 앞서 묘소제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명절제사는 성리학자들의 권유에 따라서 일부(, 추석 제사)가 집으로 내려와서 사당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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