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반공포로 석방 이야기

by 갈렙 posted Aug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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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 이야기 ===한국전쟁사===

2016. 8. 26. 15:02

 

복사 https://blog.naver.com/ym081553/220797306633

 
 

 

 

 

 

 

  1953년 4월 26일, 회담이 중단된 지 6개월 만에 판문점에서 본회담이 재개되엇다.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출범하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죽자 양측은 휴전회담의 조속한 합의를 원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정부와 이승만은 더욱 강하게 휴전을 반대하였다는것. 한국 국회는 미국에 대해 한국의 완전통일을 보증하지 않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말도록 강요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이승만은 군사적 승리와 압록강 까지의 진격을 주장하였다. 서울에서는 연일 휴전반대 군중대회가 열렸고, 점차 반미 조짐도 보이고 있었다.

  1953년 4월 21일, 국회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며칠 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중공군이 압록강 남쪽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위임한 것을 철회하여,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싸울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미국 측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고 "한국군을 최초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 하에 둔 것은 현재상태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기간"에 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휴전이 발효되는 기간에도 한국군의 작전통제를 보증할 확고한 협정을 대한민국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당국과 유엔사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철회하는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미 제8군에서 세 가지 우발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상비계획(operation everready)을 재검토하였다.

 

1. 한국군이 유엔군사령부의 작전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 미군 철수 시작. 전방지역에 대한 보급 감소. 한국정부와 육군에 대한 정보활동 범위 증가.

2.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할 때 : 한국군 보안부대들은 무장해제 및 해체시키며, 긴요하지 않은 시설 폐쇄, 모든 긴요시설과 통신센터의 경비 강화.

3. 한국군과 군중들이 공공연히 유엔군에게 적대행위를 할 때 : 유엔군과 유엔군에 협조하는 한국군은 방어지대로 철수.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에서는 에버레디 작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놓고 있다.


1단계로 이 대통령에게 장기 상호방위조약, 20개 사단에 대한 충분한 군원, 수억 달러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약속하여 유전에 협조하도록 종용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2단계로 대한 지원을 모두 철회하고 미군의 전면 철수를 내세워 위협을 가하며, 이것 역시 실패할 경우 쿠데타를 조종해 이 대통령을 축출하고 장택상 총리로 하여금 새 정부를 구성토록 한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우발상황들을 미리 예하 지휘관들과 토의하였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모든 정보원을 이요하고, 무력사용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한편, 포로교육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강제로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이승만이 협상을붕괴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조치를 다음과 같이 예상하였다.

 

휴전조인 전에는,

 

  1. 한국의 독자적인 안을 공산 측에 제의

  2. 한국대표 철수

  3. 휴전이 조인되더라도 어떠한 규정도 주수하지 않을 것임을 선성

  4.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로부터 철수

  5. 폭동, 혹은 데모 조장

 

그리고 휴전조인 후에는

 

  1. 비무장지대로부터 철수 거부

  2.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철수

  3. 한국군으로 공산군 진지 공격

  4. 게릴라 공격 실시

  5. 외국군, 특히 공산군의 휴전조약 이행을 위한 한국 입국 불허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포로의 탈출을 예방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은 포로심사 과정에서 민간인으로 분류한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한 선례가 있었다. 1952년 6월 말에서 8월 말까지 27,504명을 석방한 데 이어, 10월에 다시 남한 출신 16,000명의 포로 가운데 민간인 억류자로 재분류한 11,407명 등 총 39,464명을 석방하였다.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석방은 휴전협상 초기부터 미국의 정책적 고려사항 중 하나였고, 리지웨이와 그의 후임인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수시로 민간인으로 분류된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합참에 건의하거나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따라서 반공포로석방 자체는 한미간에 이견이 없었던 사안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전에 올린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6월 18일 자정을 기해 각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탈출이 감행되기 시작하였고, 원용덕은 오전 6시 정각에 서울 정동의 중앙방송국에서 '반공포로석방에 대한 담화문'을 방송했다.

 

 

 

본직은 단기 4286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관하 지휘관인 한인 애국 포로수용소 접수를 명하였다. 본직은 신성한 조국 주권의 존엄성의 유지를 위해 이를 명령하였으며, 이는 국제 공법인 제네바협약 총칙 제12조(전쟁포로는 그를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제 애국 동포에 고하노니, 포로수용소 인근에 소재하는 부대, 경찰관, 애국청년단 등 일반 주민들은 본직이 지휘하는 헌병으ㅢ 본 임무수행에 절대적인 협조가 있기를 요망하며......

 

 

 

 

  7개 수용소에 나뉘어 분산 수용된 35,698명의 포로 사운데 76.7%에 달하는 27,389명의 포로가 탈출에 성공하였다.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인 6월 19일 이승만은 자신이 포로석방을 단행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나는 나 자신의 책임 하에 1953년 6월 18일 한국인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하였다. 내가 유엔군사령부 및 관계당국과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고 이렇게 한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여 설명을 요하지 않는 다. 각도의 지사나 경찰관서에 최선을 다하여 이 석방포로들을 돌보도록 지시하였다. 우리는 우리 국민과 친구들이 이 조치에 협력할 것이며, 어디에서나 불필요한 오해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제네바협약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되어야 할 것인데...... 국제관계로 해서 불공평하게 그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했었다....

 

 

 

한국정부는 미국에 있는 모든 한국군 장교의 긴급소환령을 내리고, 비상조치를 취하는 한편 유엔군 측 휴전대표단에서 한국대표를 소환하였다. 6월 19일 클라크는 한국정부가 공모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수용소 내의 미군들이 탈출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허사였다고 하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포로석방에 미국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포로석방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가 이승만에게 물은 책임은,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 지휘 하에 둔다는 공약을 위반한 문제였다. 그는 포로의 탈출을 방치한 한국육군경비대의 행동은 유엔군사령관 권한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며,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 지휘 하에 둔다는 이 대통령 자신의 공약에 대한 '일방적인 취소'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로버트슨 차관보의 방문을 연기할 것이라고 통보하여으나, 이승만은 "그러한 방책이 자살이 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라고 주장하면서, 아이젠하워에게 "휴전협정의 조인은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한국군의 자동적인 철수를 의미한다"고 '통보' 했다. 그는 미국이 우려하는 바를 정확히 읽고 있었으며, 미국은 결국 로버트슨의 방한을 그대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승만으로부터 휴전에 대한 동의를 확보하고,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 휘하에 둔다는 분명한 약속을 받아낼 필요가 잇었다.

 

 

 

 

  1953년 6월 25일, 미 국무부차관보 로버트슨이 미 대통령의 특사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루 전에 도쿄에 도착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브릭스 주한미대사, 머피 주일미대사와 회동한 로버트슨 차관보는 가능한 빨리 휴전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고, 이승만이 계속 비타협적이면 유엔군이 한국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이승만과의 첫번째 회담에서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수락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전제가 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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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머지 반공포로들을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에 인도

2. 정치회담은 90일 시한을 두고 개최

3.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원조 계속

4. 상호방위조약 체결 즉시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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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7일 클라크는 이승만이 요구한 앞 3가지 요구에 동의하고, 필리핀의 경우와 유사한 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에 기꺼이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호방위조약 체결은 미 상언의 동의가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전제조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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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 수행과 종전에 대한 유엔군사령부의 권능 인정

2. 유엔군사령부와 공산군 측이 합의하는 휴전협정 준수

3. 상호 동의에 의해 협정이 체결될 떄까지 한국군은 유엔군사령관의 지휘작전권 아래 머물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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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은 처음에 미국의 협상은을 받아들일 의도가 있었으나, 그날 저녁 그는 태도를 바꾸어 새로운 요구사항이 담긴 비망록을 제시했다. 상호방위조약을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매듭짓고, 정치회담이 결렬될 경우, 특히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군하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하며, 유엔군사령부가 전쟁의 승리를 추구할 때 한국군을 유엔군의 지휘 아래 둔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제안은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더욱 확실하게 보장받는 한편, 미국이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한국군 작전지휘권 이양 문제를 북진통일과 결부시켜 역제의한 것이었으나... 미국은 애초 제시한 협상안 이외에 이승만의 요구조건을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으로 휴전 협상은 2주 이상 지연되고 있었으며 그 기간 동안 유엔군의 전투손실은 17,000여명, 그중 사망자는 3,333명에 달했다. 결국 로버트슨 차관보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으며, 공산측 역시 이승만을 고립시키고 미국과 관점을 같이 하여 휴전협정 체결을 진행하여야 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국과 이승만을 압박하기 위해 이후의 중공군의 주 목표를 한국군에 두며, 휴전 이후 미국이 남한정부와 군을 확실히 통제한다는 보장을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며칠간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전투를 재개한다"는 조건을 고집했다. 그는 상호방위조약이 서명되고 비준될 때 까지 휴전서명을 연기하도록 제안했지만 로버트슨은 고려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결국 이승만은 휴전과 한국군 지휘권 문제에 대한 미국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되 더 유리한 조건의 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7월 9일 이루어진 로버트슨과 이승만의 비공개회의에서 이승만은 휴전을 거부하지 않으며, 대한민국에 이익이 되는 한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 휘하에 두는 것에 동의하였고, 중공군의 철수와 휴전협정 조인 전에 한국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철회하며, 송환거부 포로의 처리를 위한 3개월간의 활동기간을 수락하며, 이들 포로를 비무장지대로 수송하는데 협력한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대신, 어떠한 외국군 부대(인도군)도 남한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며, 3개월간의 심사 후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석방되기를 원하는 모든 포로는 그렇게 석방하고, 송환을 거부하는 모든 중국인 포로는 대만으로 수송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는 휴전에 서명할 수는 없지만, 휴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약속의 대가로 다음과 같은 상호방위조약 초안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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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법적 관할권은 두만강 및 압록강 이남의 지역, 즉 전통적인 한국영토에까지 확대된다는 것을 양국정부는 인정한다.

2​. 동 조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상호원조를 계속하며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면 한반도와 근해에 미군의 육, 해, 공군기지를 설치한다.

3. 일방이 무력침략을 받을 경우 다른 일방은 즉각 자동적으로 개입하며, 침략의 적용범위는 일방의 본토뿐만 아니라 섬, 군대, 선박, 비행기 까지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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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대담은 여기까지였다. 미국은 이승만의 휴전동의와 한국군 지휘권에 대한 약속을 확보했기 때문에 더이상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휴전을 수락하며 시한을 명시하지 않고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 휘하에 두기로 한 이승만의 약속은 "백만달러의 가지가 있을 것" 이라고 보고했다.

 

  공산측은 1953년 7월 10일 재개된 휴전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을 효과적으로 통제한다는 확실한 보장을 요구했다. 해리슨 유엔군 수석대표는 휴전을 위반한느 어떠한 공격적인 행동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로만 답변하였다. 다음날까지 이 논쟁이 지속되자 그는 합참이 승인한 대로 "유엔군사령부는 한국 육군부대가 어떠한 공세적인 작전을 하여 유전을 위반하는 동안에는 그 부대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관련해 어떠한 확답도 받지 못한 상태였고, 이로인해 이승만이 로버트슨과의 협상에서 너무 많은 양보를 하였다는 비난 여론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이러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고, 미국으로부터 보다 명확한 답변을 확보할 의도로, 적극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7월 10일 그는 공개적으로 휴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판문점의 공산측 대표는 이를 기회로 더욱 더 확시한 보장을 요구하였다. 변영태 외부장관은 한국이 휴전을 준수할 것이라고 해리슨 유엔군 사령관이 공산군 측에 재확인 해준 데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한국 측이 "자제하는 입장을 재고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휴전 협상은 예전된 수순대로 협정 체결을 위한 마무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7월 24일, 이승만은 또다시 덜레스 미 국무장관에게 아직 한국 정부가 진로를 결정하지 않았으며, 그 전에 두가지 긴급한 문제에 대해 답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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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계획된 상호방위조약에서 한국이 침략을 당할 경우 미국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군사지운을 위한 규정이 포함되는지

둘째, 정치회담이 90일 내에 실패했을때 미국이 함꼐 군사행동을 재개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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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문제였다. 그러나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명확한 약속을 거부했다. 휴전에 관한 한국정부에 태도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으며, 또한 그렇게 믿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으로부터 이미 필요한 대답을 확보하였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다음날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침략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였으며 포로의 자원송환원칙을 지켰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미국은 협상기간 중 견지해 온 전쟁포로의 자원송환원칙에 대한 인정이 미국과 비공산세계의 전반적인 승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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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이 이러한 행동은 결코 미국과의 외교에서 주도적 위치를 장악했다고 보기는 어려운게, 로버트슨 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보내기로 한 것은 반공포로석방 사건 이전에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이승만의 협상려은 미국이 미리 상정하고 있던 제안 범위 내에서만 효과가 있는 것이었고, 이승만은 결국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전후 주한미군의 한반도 영구주둔과 한국군 작전통제권 이양을 관철시켰다. 휴전 이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합의의사록에서 한국정부는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한에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음을 인정하였다.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은 그가 대내외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는 국내에서 더 효과가 컸다. 이러한 돌출행동은 한국정부가 휴전회담에서 배제되어 주도권을 상싱라호 보조적 위치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과 좌절감을 보상해 주었으며, 이로 인해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는 급상승하였다. 국내에서는 그 누구도 이승만의 이런 무모한 행동에 대해 비난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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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김보영 /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과 한미교섭

 = 백선엽 / 군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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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로 쓸게 두어가지 더 있긴 한데 하나는 일본어고 하나는 한문이라서 도저히 자료로 쓸 수가 없었다는 슬픈 현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