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8(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로마서강해(16)] 참된 칭의(稱義)는 믿음으로 얻는가 행함으로 얻는가?(롬3:21~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OIlQnSmD8lQ

1. 들어가며
칭의(稱義)는 믿음으로 받는가 행함으로 받는가?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던진 질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롬3:28),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로마서의 말씀으로 답을 하였다(롬3:20). 그렇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 예수께서 이루신 일들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은 유대인들에도 그렇고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값진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공로에 감사해야 한다. 사실 그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 모든 인류는 지금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빠져 있었을 것이고 죽은 후에는 죄값을 치러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속을 받았고, 그 은혜로 인하여 칭의를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는 나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계속해서 유효한 것인가? 왜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론과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없는 믿음은 서로 충돌이 되는가? 종교개혁자 루터처럼 정말 야고보서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에 위배되는 주장을 싣고 있으니, 사도적인 저작으로 볼 수 없으며 지푸라기 서신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하는가? 진정한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가 행함으로 받는가?
2. 바울은 사람이 어떻게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했는가?
사람은 과연 하나님의 의(義)에 이를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다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롬3:23). 그러므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義)의 표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것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죄를 깨닫게 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롬3:20). 그리고 또 하나는 죄인인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갈3:24).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어떠한가?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양심의 율법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양심이 죄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은 다 자기자신 속에 죄된 본성 곧 뱀들과 귀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개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면서 살 수 없고, 양심의 판단을 다 지키며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율법 앞에 그리고 양심 앞에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혹은 양심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에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의(義)를 주셨다고 말했다(롬3:21). 그것은 바로 죄인이 예수께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 이뤄놓은 하나님의 의(義)를 전가받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역사를 믿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 외에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의(義)로서 믿음의 의라고 정의하였다(롬3:21). 이것은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의(義)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義)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다 받을 수 있다(롬3:22).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된 사람들은 결코 자랑할 것이 하나 없다(롬3:26~27).
3. 칭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의(義)를 사도 바울은 이미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즉 바울은 믿음을 통한 새로운 하나님의 의가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미 선포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롬3:21). 그럼 그러한 말씀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율법에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의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창15:6의 말씀을 가리킨다. 즉 아브라함이 의롭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한 것을 아브라함이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창15:6).
둘째,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새로운 하나님의 의는 어떤 것인가? 이것도 역시 믿음으로 말임아 생명을 얻는 방법으로서 이미 하바국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진 말씀이다. 그럼, 하바국 선지자는 어떻게 말했는가? 그는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합2:4).
고로 우리는 행함이 아닌 또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믿음의 방식은 사실 율법보다 훨씬 더 앞서 존재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받았던 이러한 믿음의 의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은 것보다 5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한 의가 행함을 통한 의보다 앞서 있는 의이다.
4. 한 번 믿음으로서 받게 된 칭의는 계속해서 유효한 것인가?
그렇다면 한 번 믿음을 통하여 받게 된 칭의(의롭다고 칭해주는 것)는 한 번 가졌으면 죽는 날까지 유효한 것인가? 그것은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는 처음 믿을 때에 수여받지만, 그 의가 죽은 날에도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믿음을 통하여 칭의를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은 처음 믿을 때이다. 이때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게 된다. 그리고 이때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시작된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지은 죄가 용서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어 우리 가운데 들어오심으로 우리가 거듭나서 구원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서 칭의를 받아 거듭난 성도가 신앙생활을 쭉 하다가 죽는 날에도 자신이 가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는 없다는 데에 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은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어떤 죄들이라도 다 용서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초기에 믿음으로 받았던 칭의가 계속해서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가 지은 죄들은 다 간과하심으로 용서받게 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을 자동적으로 탕감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서만이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 자백하지 않았다면 그 죄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최종적인 구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믿고 난 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면 그러한 죄를 가지고서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음 믿을 때에 받았던 칭의가 죽는 날에도 유효하게 하려면 칭의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지은 죄들은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요일1:9). 회개할 때에 비로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 자신이 그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처음 믿을 때에 받았던 칭의가 용서해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회개를 통해서 죄를 씻어야 한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처음 믿을 때에 받았던 칭의가 진정한 칭의가 되게 하려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범죄를 회개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십계명이 지켜지는 삶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는 날에 자신은 믿음이 있었으니 그것을 자신의 죄가 다 용서받고 언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5. 야고보서 기자는 왜 칭의는 행함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온전케 된다고 말하였는가?
그러므로 사실 칭의는 신앙생활의 출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칭의는 오직 처음으로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을 믿을 때에 주어지기 때문이디. 그리고 이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칭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믿음으로 받은 칭의는 죄를 마음껏 지어도 계속해서 유효한 칭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를 통해서만 칭의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진정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다면, 그는 그때부터 회개생활과 성령의 인도를 잘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가 처음에 받았던 칭의가 행함으로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아직 행함의 열매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의 믿음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죄인임을 시인하고 성령을 받아들일 때에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날 죽으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도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죽을 때에 계속해서 처음의 칭의를 통해 심판을 면제받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자신이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기도 하고,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요5:29). 그러므로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처음 가졌던 믿음으로서 구원받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렇다. 사람이 자신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그 믿음에 따른 행함이 뒤따르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자신이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자였다면, 그는 그때부터 회개생활을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깨끗히 처리하고 있었을 것이며, 또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생활하여 믿음의 따른 행위의 열매를 맺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할 때에는 믿음으로 칭의도 받고 구원도 받게 되지만, 마지막에 가서도 여전히 그 믿음만을 앞 세운 채 회개도 하지 않고 있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행함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그의 믿음은 아예 그 자체가 죽은 것이어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다.
6.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어서 처음 받았던 칭의가 완성할 수 있었는가?
아브라함은 예로부터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가 75세 때에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이요(창12:4), 또한 84세 때에 자기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창15:5~6), 하나님께서도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기 때문이다(창15:6).
그러나 사실 그가 84세 때에 받았던 칭의가 온전한 칭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래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때부터 약 13년간 그를 떠나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제는 회개가 필요했다. 그것이 그가 99세 때에 행한 '할례'의 실행인 것이다(창17:23). 할례는 자신의 육적 몸을 벗는 것으로서,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곧 자신의 고추를 사용하여 자식 이스마엘을 얻었던 것을 회개하는 표시로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15:6의 말씀이 '시작으로서의 칭의'라고 말한다면, 창17:23의 사건은 '과정으로서의 칭의' 혹은 회개를 통한 '인침로서의 칭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나이 99세 때에 할례를 통해 갖게 된 그의 믿음 또한 온전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얻은 믿음이 창22장에 가서 비로소 자식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해 완성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실 무슨 말이든지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믿음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125세 혹은 137세 때에 그를 최종적으로 시험하셨다. 아브라함더러 자신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곧바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3일 길을 같이 걸어서 모리아 산으로 갔고, 거기에서 그의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에 올려놓고 칼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 그 일을 막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22:16~18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은 비로소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셨다. 그리고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해주셨다(창22:16~18). 이제는 그의 믿음은 더 이상 손 댈 것이 없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음 믿을 때에 받았던 칭의가 그 후에 여전히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도 실수하고 잘못하였고 비로소 회개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순종을 통해 그의 믿음이 확정되었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는지를 한 번 쯤 생각해보아야 한다.
7. 온전한 칭의가 율법을 온전케 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기자인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약2:21~22). 그래서 사람이 믿음으로 칭의가 시작되지만 비로소 행함을 통해 온전케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약2:24).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행함으로 확정되지 못한 칭의는 사실 죽은 칭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약2:21~26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온전한 칭의는 믿는 이들로 하여금 율법을 온전히 준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율법을 파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워준다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칭의를 회개를 통해 더 굳건해지고 성령의 음성을 순종함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절대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룰 수 없지만, 죄를 회개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게 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성취된다고 말했던 것이다(롬8:4).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 나오며
누구든지 말로는 뭐든지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진짜인지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확인해 되어져야 한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 받았던 믿음도 사실은 그 뒤에 보니,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성경말씀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육체를 사용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가셨을 뿐만 아니라, 그뒤 13년간 나타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3년만에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온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제는 너도 완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17:1).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그의 믿음으로 칭의를 받았지만 이후에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했다. 그래서 비로소 자신이 초기에 가졌던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었으며, 칭의도 점차로 견고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22장에 가서 그의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이 믿음도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받았던 '시작으로의 칭의'(골3:28, 갈2;16)를 잘못 판단하여 '완성으로서의 칭의'(약2:21~22)로 규정하고는 행함이 없는 신앙이라도 시작으로서의 칭의로 다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착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2025년 05월 18일(주일)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