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믿음으로 받는가 행함으로 받는가?(약2:14~26)_2017-05-07

by 갈렙 posted May 0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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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HfTkqBTjDCw
날짜 2017-05-07
본문말씀 야고보서 2:14~26(신약 37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올바른 구원론, 믿음과 행함, 믿음과 회개, 행함의 위험성,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구원관, 중세시대의 구원론, 종교개혁시대의 구원론, 현대구원론, 제2종교개혁

구원이란 죽어서 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오직 믿음이 되는가 아니면 믿음에다가 행위가 더 필요한 것인가? 그렇다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가르쳤던 구원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구원의 조건으로서 행함을 집어넣었을 때에 나타나는 폐단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올바른 구원론을 교회사적인 관점과 성경적인 관점에서 정리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죽어서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오직 믿음이면 족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어떤 이는 믿음에다가 행함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교회와 같은 경우에는 믿음과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성경적인 구원관일까? 과연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던신 구원관은 무엇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바른 구원관을 정리해보면서, 행함(행위들, 열매들)의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2. 구원관의 변천사

  먼저, 구원관의 변천사부터 약간만 언급해보도록 하자. 16세가 종교개혁자들은 종세의 구원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새로운 구원관을 제시하였다. 그 시작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A.D.1483~1546)였다. 그는 중세의 구원관으로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중세의 구원관은 어떠했을까? 중세시대의 구원관은 간단했다. 하나님의 은총과 행함(선행,고행포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믿는 자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드시 교회 특히 하나님의 대리자인 신부와 교황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해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기도해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다. 오직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가 죄를 사해주어야만 죄가 용서된다고 가르쳤다. 그리로 모든 죄를  씻으려면 영세(세례)을 받아야 하고, 성체(성만찬)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세례나 성만찬은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다. 구약시대의 율법의 제사의식이나 절기같은 것이다. 의식은 실체를 설명해주는 모형이지 결고 그것이 사람의 죄를 씻어주거나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중세시대에는 오직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더욱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일평생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선행에는 구제도 있고 금식도 있고, 기부도, 고행도 포함되어 있다.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는 불가능하고, 선생을 쌓아서 공덕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얼마나 선행을 쌓아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얼마나 선행을 쌓아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시대의 구원관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루터의 종교개혁과 '오직 믿음'의 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가 된 루터는 어찌하든지 구원받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그는 구원얻기 위해 수많은 고행까지 자처했다. 하지만 구원은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시편강해와 로마서강해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믿음을 통해 구원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롬1:16~17). 그래서 그는 곧 그것을 신문에도 내고 강의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의 개신교 교리 핵심인 그의 5가지 주장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과 가르침 속에 오늘까지 남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성경에 "오직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성경에 나오는 "오직 믿음"이라는 문구는 전부다 "그러나 믿음..."이든지 "그런데 믿음..."인 것이지, 결고 "오직 믿음"이라는 문구가 아니다. 다만 한글성경에만 그것이 그렇게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신앙의 모든 것이 끝나는 줄을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믿음이란 구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신칭의의 시작도 믿음이며, 구원의 시작도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이신칭의의 완성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믿음을 구원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주장은 성경에 나와있지도 않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오직 믿음"은 과도히 확장된 잘못된 구원관인 것이다.

 

4.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성경적인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다. 우리가 구원얻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하고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그렇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처럼 "오직 믿음"이 아니다. 그리고 종세교회처럼 "(교회를 통한) 은총과 개인의 선행(행함)"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그러한 믿음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죄사함은 아니며 이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이것은 인류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이것이 우리 죄인들에게 효력있게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속죄제물로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때 2천년전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겨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2천년에 골고다언덕에서 흘리는 예수님의 속죄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의 구원은 그분의 흘리신 피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을 믿고 또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할 때에 자신의 죄가 씻겨지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결국에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믿음의 근거와 회개의 책임

  그런데 잠깐 여기서 살펴볼 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은 완전한 것이며 그리고 이미 종결된 사항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믿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제대로 알고 믿었다면 믿음에 있어서는 흔들릴 이유가 그렇게 많지 않다. 다만 핍박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시험을 받을 때에는 자신의 믿음의 지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믿음이 구원의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은 대부분 핍박의 상황이나 환난의 상황에서다. 이때는 믿음의 지조를 지키느냐가 구원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핍박이나 환난의 상황이 아닌 경우에 우리가 가진 믿음은 그리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가진 믿음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사탄마귀가 내 믿음에 의심을 투여하지 못하도록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10:17).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문제는 대부분 우리들이 해야 할 회개 영역에 있다. 이러한 회개생활은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의 영역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회개를 하나님이 대신 해 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가 해야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을 통한 구원의 근거마련을 위해서 우리 주 예수께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하셨다(요19:30). 그분은 사람이 되어오셨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셨으며, 십자가 곧 구약의 모리아산에서 대신 속죄제물이자 유월절양으로 죽으셨다. 그리고 그분이 인생의 기간 중에서 죄를 짓지 아니하셨음이 부활로 입증되었다. 우리는 또한 그분의 부활을 통해 그분이야말로 사망권세를 이기실 수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받을 속죄의 근거마련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다 그분이 하시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이 그렇게 인간이 되셨고 고난받고 죽으셨음을 믿으면 된다. 그리고 그분에게 그와같은 일을 행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찬양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음이 중요하다. 그 뒤에는 자신의 죄를 고하여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내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칼빈주의자는 이것까지 주님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라 한다. 아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벧후3:9). 그렇다. 회개는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주님이 대신 해 줄 일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이라도 우리더러 회개하도록 성령으로 죄를 책망하시고 계신다(요16:8~9). 그러므로 그분이 나를 회개시키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라.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둘째 아들은 죄인인 우리들을 상징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회개시키고 있는가? 아니다. 회개는 아들이 하는 것이이 아버지가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다. 비로소 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아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다만 아들이 빨리 죄를 깨닫도록 아버지는 기근을 보내실 수는 있다. 하지만 회개까지 대신해주는 일은 아버지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믿음과 아울러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죄된 본성까지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구원은 믿음과 회개로 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6. 구원의 조건은 믿음과 회개다

  그렇다. 구원의 조건이 믿음과 회개라는 사실은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4:17,눅24:47).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도들이 그렇게 말했다. 먼저는 할례자인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인 베드로가 그렇게 말했고(행2:38), 이어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인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행20:21). 자, 이 성경구절들을 읽어보라.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그렇다. 구원은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견해요 예수님의 말씀이요,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7. 구원의 조건에 행함(행위들, 열매들)이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런데 오늘날에 들어와서 구원을 믿음과 행함(행위들,열매들)로 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자칭 그들은 자기들을 제2의 종교개혁자로 언급한다. 하지만 과연 이들의 주장이 과연 성경적인가? 과연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일치하며, 예수께셔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외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이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주장 가운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구원의 조건에 행함(행위들, 열매들)을 집어넣은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사실 큰 일 날 일이다.

  왜 그런가? 구원의 조건으로 행함을 집어넣으면, 첫째, 구원받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얼마만큼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구원을 얻을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혹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만큼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어느선이 아버지의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아버지의 요구조건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우리의 행위의 기준이 그리스도만큼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오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죄된 본성이 없는 사람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준을 우리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죄된 본성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성령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만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걸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이 세상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만약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죽을 때에 예수믿고 회개한 자가 구원받을 가능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눅23장에 나오는 오른편 강도를 보라. 그는 믿음과 회개만을 통해서 그날 낙원(천국)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행위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둘째, 구원의 조건으로 행함을 집어넣으면, 구원얻을 믿음이 없는 자가 행위들로서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메구려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이 구원얻을 분량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데, 행위들을 아무리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없는 믿음의 분량이 채워질 수 있겠는가? 만약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게 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행함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그 사람은 예수님 당시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구원의 조건으로서 행함을 집어넣으면, 자기의 의를 자랑하면서, 어떤 행위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형제를 정죄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행함(행위들)은 반드시 자기를 자랑하려는 근성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죄된 본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자기가 무엇인가 행했으면 그것으로 자기는 이런 것까지 실천하고 있다고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정죄하고 말 것이다. "너는 이것도 못하고 있지. 날 봐라. 나는 이런 것까지 하고 있다. 너와 나는 레벨이 달라." 이렇게 자기 의가 충만케 되어 자기를 자랑하고 남은 무시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절대로 주장하지 말라.

 

8.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행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 행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적어도 3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행함은 심판의 기준으로서 우리의 마음 가짐에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장차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의 믿음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오직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마25:41~46). 마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라. 다시 오실 주님이 우리들을 심판하시는 기준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다. 우리들이 맺은 열매들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는지를 주님은 판가름하실 것이다. 그렇다. 행함이 비록 구원의 조건은 될 수 없지만, 장차 우리가 심판받을 때에는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참된 믿음 안에서 살았는지에 대한 근거로서 행함은 아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둘째, 행함은 나 자신이 구원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증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행함(행위들)이란 자신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에 알려주는 시금석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누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볼 때에, 믿음에 합당한 어떤 열매들(행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에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했지만, 열매 하나 맺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사실상 죽은 믿음에 해당한다. 가짜 믿음인 것이다. 그런 믿음은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믿음에는 응당 따라오는 행위들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회개를 통해 죄를 멀리하고 주님을 본다고 성령의 음성을 좇아가는데 어찌 믿음에 따른 열매 하나가 없겠는가? 열매는 당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행함(행위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니다.  그렇게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을 향해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셋째, 만약 우리가 구원얻는(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된다면, 행함은 천국에서 우리의 상급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렇다. 행함은 장차 구원얻은 자에게는 큰 상급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어떤 사명있는 자는 그것이 하늘에서 면류관으로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행함을 절대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행함을 통해서 우라는 하늘나라의 기업을 장만하고 있는 것이 된다. 더욱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도 이렇게 확증해주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그렇다.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상급은 우리가 행한대로 받는 상급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급이 아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 맡겨진 일에 충성하자.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서 받을 것이 있게 된다.

 

9. 나오며

  구원은 조건은 오직 믿음이 아니다. 또한 믿음과 행함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믿음과 회개인 것이다. 이 기준이야말로 성경적인 확실한 구원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믿음과 회개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회개했는지가 분명히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먼저, 믿음의 영역을 보자.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믿어야 하며,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의 영역들을 보자.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들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우리의 죄된 본성까지도 해당된다. 이처럼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분명하다. 그리고 회개할 죄목들이 아주 분명하다. 그렇다. 믿음과 회개는 그 어떤 것도 애매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믿음의 조건으로서 행위들(행함)은 다르다. 얼마만큼 열매를 맺어야 구원얻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기 않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율법의 613가지 조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맺을 분량을 정해주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약의 시대에는 그것이 없다. 굳이 그것을 정의하자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이요, 그리스도의 분량이요, 성령의 요구분량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뜻이나 그리스도의 분량 혹은 성령의 요구분량은 각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니 어떤 기준을 행함의 분량이라고 정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다면 그것은 잘못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구원받을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대신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요,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정죄하는 데에도 사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조건으로서 행위를 넣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행함은 첫째, 심판의 기준으로서, 둘째, 내가 구원얻을 사람으로서 제대로 구원을 향해 가고 있는지 기준으로서, 셋째, 천국에 들어간다면 받을 상급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심판의 기준이 될 행함의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제대로 믿고 있고 있지 않는 것이다. 회개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는 결국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믿음이 없는데도, 행위로서 떼우려고 해서도 아니 된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느새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자가 자신이라면 그는 무조건 엎드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구원받을 믿음을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이 채워질 때에 비로소 믿음의 따른 행위가 나타나는지를 체크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당신도 틀림없이 구원을 사람의 대상에 포함될 것이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간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상급까지도 받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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