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하는 자와 기록된 성경말씀의 중요성(딤후3:13~15)_2017-09-17

by 갈렙 posted Sep 17,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DSBHjjl3Q50
날짜 2017-09-17
본문말씀 디모데서후서 3:13~15(신약 34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말씀을 지도하는 자(목회자), 기록된 성경말씀의 핵심,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기노스코와 오이다, 기노스코에서 오이다로, 오이다가 되어진 지도자와 제자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신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구원까지 이를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배움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람은 배워서만 아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턴가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지는 앎을 가질 때가 오기 때문이다. 배워서 아는 것을 "기노스코'적인 앎이라고 한다면, '오이다'적인 앎이란 알아지되 돌이킬 수 없이 알아지는 앎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들려준다. "너는 오이다적인 앎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누구에게 배웠는지 그리고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붙들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보면 교회에서는 오이다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성경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 말씀을 지도자는 자가 꼭 갖추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경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신약성경 디모데후서는 A.D.66~67년경 당시 사도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로마감옥에서 자신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유언처럼 간곡히 부탁하는 말씀들이 빼곡히 들어 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말세를 당하여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그것은 디모데가 그동안 배웠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들 안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딤후3:14). 그래야만이 자기도 구원할 수 있고 남들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2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데에 무엇이 제일 중요한 요소일까?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2가지를 부탁하는데, 하나는 디모데가 누구로부터 배웠는지를 잘 생각하, 자신이 배웠던 것들과 그리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들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권면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듣고 배웠던 성경안에 꼭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사도바울은 지금 2가지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그동안 배웠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성경만이 디모데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줄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는 모든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반드시 2가지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는 누구로부터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왔는데 또한 그가 사도바울 자신으로부터 배웠던 가르침에 더욱 주의하고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했다.

 

3. 디모데는 누구로부터 배웠으며 성경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렇다면 디모데에게는 과연 누가 성경을 가르쳐주었을까? 첫째는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였다(딤후1:5). 그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배웠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기때부터 성경말씀을 배웠고 암송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어느정도 성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전도하러 자기동네를 찾아온 사도바울을 만나게 된다. 이때 사도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전도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거쳐 루스드라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2차전도여행이 시작되자, 사도바울은 일부러 루스드라에 들려 디모데를 자기의 제자로 삼는다. 그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디모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둘째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갖게 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4.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성경을 공부했으며 무엇 때문에 성경을 가르쳤을까?

  그런데 당시에 유대랍비들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훨씬 더 율법말씀을 배웠고 공부했다. 아마도 정규적으로 배우지 못한 디모데보다는 훨씬 더 많이 배웠을 것이고 더 많은 지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를 못 알아보았다. 오히려 배척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왜 그랬을까? 그들도 성경을 공부하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했지만 성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곧 메시야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권익과 지위를 유지하지 위한 수단으로서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를 보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는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성경(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해도 거기에서 예수님 곧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배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구약성경 곧 모세의 글(율법,토라)와 선지자들의 글(예언서,느비임)과 다른 성경들(성문서들)을 풀어서 알려주셨다. 그것이 곧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이다.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에 메시야를 꼭 발견해야 바른 공부라고 가르쳐준 것이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렇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공부하든, 신약성경을 공부하든 거기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잘못된 배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가르쳐준 성경을 보는 각도를 분명하게 다시 일깨워주고 있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며, 그것을 끝까지 힘써야 한다고 유언처럼 말하는 것이다.

 

5.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알아본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목회적인 지침을 주면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디모데가 자신의 가족과 사도바울에게 배웠던 말씀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놀라운 생명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디모데가 알고 있던 것이 '기노스코'적인 앎이 아니라, '오이다'적인 앎이었기 때문이다. 딤후3:15~16에 보면 "알다"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런데 두번 다 '기노스코'가 아니라 '오이다'라는 사용하고 있다. '기노스코'란 헬라어 동사로서, 배워서 아는 것이며, 체험해 가면서 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이다'라는 동사는 똑같이 '알다'이기는 하지만 선험적으로 아는 것이요 완전히 아는 것을 가리킨다.

 

6.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사람들이 모든 사물과 이치를 알아가는데 어떻게 알아가는지 아는가? 처음에는 배워서 아는 것이요 체험하면서 아는 것이다(요17:3). 기노스코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기노스코'의 범위를 벗어나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진다. 알되 완전히 알아지는 것이다. 다시 뒤돌아갈 수 없는 앎으로 알아지는 것이다. 더이상 배우지 않아도 부인할 수 없는 앎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이다'적인 앎이다.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항상 오이다적인 앎을 가지고 계셨다. 예를 들어보자.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오이다)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오이다)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오이다)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오이다)(요8:19)" 그렇다.  요8:19에 나오는 '알다'는 동사는 전부가 다 '오이다'라는 동사다.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눈 앞에 두고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이 비록 율법선생이기는 하였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오이다적으로 알려고 했다면 예수님도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진정 알기 위해 율법을 배웠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기를 원해서 배웠을 뿐이다. 그러니 성경을 그렇게 날마다 읽고 암송하고 가르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또 한 구절의 예를 살펴보자. "너희는 그(그분,하나님)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되 나(예수)는 아노니(오이다) 만일 내가 알지(오이다)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오이다)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요8:55)" 그랬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이다적인 앎으로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를 오이다적인 앎으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분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이다적인 앎으로 아버지를 알고 있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열심히 배워서 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앎은 안타깝게도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지 못했다. 성경을 이용해서 다른 욕심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처음부터 오이다적인 앎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기노스코적인 앎으로 배워서 알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순간에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7. 우리 모두가 '오이다'적인 배움을 가지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요청되는가?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온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성경을 배우고 설교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끝내 하나님을 알지(오이다) 못한다.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결과들은 비단 나쁜 마음을 품은 초신자들에게만 해당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수십년을 교회를 다녔어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출석하고 열심히 봉사할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결국 기노스코적인 앎의 단계에서 끝나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만약 죽는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처음부터 알아보았다. 그는 이미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기노스코적인 앎에서 오이다적인 앎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를 일부러 다시 찾아가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사역을 위임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오이다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도 오이다적으로 알고, 예수님을 증거하여 다름 사람에게도 오이다적으로 그분을 알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진정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8. 나오며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을 오이다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전해줄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는 오이다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성경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찾아내고 어디서든지 그분을 발견하여 그분을 전해줄 수가 있는가? 만약 이것이 되지 않는 자라면, 그는 절대 목회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둘 다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먼저 오이다적인 앎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성경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처음에는 기노스코적으로 성경을 배우다가 어느순간에 오이다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곡히 간곡히 바란다. 아멘.


Articles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