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이 놓친 구원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막1:14~15)_2017-12-17

by 갈렙 posted Dec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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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FE2C2KWvTmg
날짜 2017-12-17
본문말씀 마가복음 1:14~15(신약 5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중세교회의 구원관,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구원관, 성경적인 구원관, 예수님의 구원관, 칭의와 구원, 칭의의 방법, 행위와 믿음의 상관관계

만약 우리가 중세교회의 어느 국가에 속해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구원받을 수가 있었을까? 만약 그때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교회에 가야 했을 것이다. 가서 신부에게 고해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연옥에서 벌을 면제받기 위해서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연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잘못된 구원론은 종교개혁자들의 시대에도 거의 비슷했다. 루터는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칼빈은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에 따라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둘 다 성경에서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 되신 예수께서는 구원의 요소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막1:15).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따르던 사도들의 신앙도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루터와 칼빈이 스스로 그렇게 해석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구원은 어떻게 받게 되는가? 중세교회와 종교개혁자들마저 놓쳐버린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1. 들어가며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하게 외쳤다. 왜냐하면 중세 로마카톨릭교회가 구원을 위한 요소들로서 전한 것이 잘못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믿음"이 이제 와서는 오히려 참된 구원을 찾아가는데 방해요소가 아닌 방해요소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은 과연 성경을 근거로 구원의 조건을 말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요소가 무엇이며, 중세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이 과연 거기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이 이어받은 구원의 요소를 알고 믿고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2.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중세교회는 "고해성사와 세례" 및 "공로"를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만세전예정"을 외쳤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고 사도들이 이어받았던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 믿음과 행함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인가?

  그런데 어떤 이는 사람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만 있어서는 아니 되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행함은 올바른 믿음에 따라오는 결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의 요소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죄의 문제의 해결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외에 다른 것과 연관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속죄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았다고 하여,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행위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자들에게 뒤따라오는 선한 열매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알려주는 열매를 가지고서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본다는 것은 믿음과 행위를 동시에 구원의 조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계속해서 주장하게 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선한 행위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속죄사역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은 선한 행실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위가 구원으로 조건이라고 보게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폐단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도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폐단이 나오는지 아는가? 그것은 3가지 정도다. 첫째로, 만약 구원의 조건에 믿음 외에도 행위를 더한다면, 구원얻기 위해 필요한 믿음이 부족한 것을 두고서 행위로서 그것을 대신 채우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얻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행하신 일을 제대로 믿지 못한 상태인데도 구원을 얻어야 하겠기에 선한 행위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때는 올바른 믿음얻기 위해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기도해야 한다. 믿음을 달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을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10:17). 그리고 두번째로 구원의 조건에 행위를 더하게 되면, 선한 행위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는 자기의 선한 행위를 자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행위를 자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어 자신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점차로 약화시키고, 자신의 의가 이렇게 크다하면서 자신의 의를 자랑할 것이다. 세번째로, 선한 행위가 없는 자들을 오히려 정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너는 새벽기도도 못하고 있지?", "너는 주일성수도 못하고 있지?", "너는 십일조도 내고 있지 않지?", "너는 그렇게 전도하자고 해도 전도대회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하면서, 행동으로 믿음을 보이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고 깔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선한 행위를 구원의 필수적으로 요소로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다만, 내가 구원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서 사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 예수께서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를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구원얻는 필수적인 요소를 무엇이라고 언급하셨을까? 우선 예수께서는 사람이 구원얻는 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언급하셨다는 사실이다(마4:17). 따라서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천국복음이다(마9:23, 24:14). 다시 말해, 예수께서 구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 명의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분명하게 언급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 들어와서 칭의를 구원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구원의 정확한 개념을 잘 모르고 한 말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2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항하여 이렇게 외치셨기 때문이다.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그렇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셨다(마4:17,계2~3장, 눅18:13). 그리고 더불어 열매 또한 매우 강조하셨다(마7:15~20). 나중에 심판하실 때에는 열매로 그 사람을 판단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요 구원이라고 하셨다(요5:24, 17:3). 다시 말해 인류구원을 위해 속죄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종합해 보면, 예수께서는 막1:15의 말씀에서처럼, 회개해야 하고, 복음을 믿어야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듣고 그것을 믿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마16:16~17).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와 믿음, 이 두 가지 요소들 중에서 한 가지라고 빼버리면 절대 아니 된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고,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다. 중세교회 때에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어떤 것이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중세교회 때에는 무엇을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을까? 그들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고해성사와 세례였고 또 하나는 공로를 쌓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공로가 부족하니 교황이 판매하는 면죄부를 사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니 루터가 성경을 읽어 참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 사람들은 중세교회의 틀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제대로 알아기 시작한 루터 신부에 의해 종교개혁은 단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그렇다면 왜 천주교인들이 고해성사를 행하고 세례를 받는지 알아보자. 로마카톨릭교회에서는 사람이 죄를 용서받으려면 고해를 해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고해사 자범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신부에게 찾아가 자신의 낱낱의 죄들을 고백하는 행위다. 그러면 신부가 그것을 다 듣고 "네 죄를 사하노라"고 선언함으로 자범죄들을 용서받게 된다. 그리고 세례는 자신의 원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행하는 죄씻는 예식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죄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해성사를 행하고(이들은 일 년에 최소 몇 번 해야 하는지도 정해놓았다),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시대에는 교회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아니 교회의 신부가 없으면 죄사함을 받지 못하게 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나 회개하고 천국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의 지은 죄는 고해성사와 세례를 통해서 용서받지만, 죄에 대한 벌은 남아있기에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물론 성경적인 주장은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죄에 대한 벌을 면제받을 수 있는 대상은 셋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예수님, 또 하나는 동정녀 마리아, 마지막 하나는 성인들이다. 성인들은 기도를 바치고 헌신을 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면제받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 사람치고 충분히 공로를 쌓아 천국에 곧바로 들어갈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을 믿고 고해성사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어도 연옥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연옥은 죄사함을 받았으나 공로가 부족하여 벌을 받을 사람이 들어가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 연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곳은 불이 타는 장소여서, 거기서 속죄의 값을 치르고 난 뒤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얼마를 더 고통받고 속죄를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교리가 하나 생겼다. 교황은 연옥에서의 벌을 면제받는 방법을 선포한 것이다. 믿는 자들 중에 공로가 많이 연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 성인들이 있는데, 그들의 남은 공로는 잉여공로라고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헌금을 하게 되면 성인들의 잉여공로로 자신은 죽어서 연옥에 가지 않고 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증하는 종이가 면죄부인 것이다. 한편, 이미 연옥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부모라고 자식들이 헌금을 하게 되면, 부모님의 영혼이 연옥에서 벌을 면제받고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면죄부를 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터무니 없는 거짓말로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보다 못한 루터가 반기를 든 것이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힌 95개조 반박문이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아울러, 고해성사와 세례가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정한 회개를 하면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써붙힌 것이다. 그렇다. 만약 중세교회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우리는 교회를 통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을 것이고, 면죄부를 사지 않으면 연옥에 가서 형벌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 거짓말이다. 중세교회 때에 평신도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성도들을 교황의 칙서를 통해서 농락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을 루터신부가 적나라하게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로마카톨릭교회에 정면으로 따지게 된 데에는 오직 한 가지 든든한 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성경말씀에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종교개혁의 슬로건 가운데 하나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였던 것이다.

 

라. 종교개혁자들 중에 루터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를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그렇다면, 종교개혁시대에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인하여, 중세교회는 점차적으로 성경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평신도는 보지도 못하게 했고 소지하는 것조차 불법으로 간주하는 성경을 떠들쳐 보았던 루터신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을 통해 진정한 속죄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황이 벌을 면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않았으며, 고해성사나 세례가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것을 공공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부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경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그분의 속죄의 피로 인하여 칭의를 얻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구원얻기 위해서 공로(행위)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고행성사나 세례는 의식에 불과한 것일뿐 그 의식이 결코 사람의 죄를 사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진실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기만 하면, 죄도 용서받고 벌도 면제받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인 것이지, 신부를 통해서만 죄용서를 받고,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를 사야만이 벌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불어 "오직 성경"을 외쳤던 것이다. 사람이 구원얻는 데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이러한 주장은 절반은 맞으나 절반은 틀린 것이었다. 루터는 사람이 죄용서를 받고 칭의를 얻고 구원을 받게 해주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세교회가 워낙 의식과 공로를 강조하다보니,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잘못된 주장을 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사람이 용서를 받는 것은 맞는 것이지만, "오직 믿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오직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는다는 말이 전혀 없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도 말도 전혀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도 전혀 없다. 그것은 루터에 의해 과장된 것이다. 사람이 죄용서를 받거나 칭의와 구원을 얻으려면 회개하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죄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사도들도 줄곧 그렇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만 "오직 믿음'이면 다 되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으면 자동적으로 속죄받는다고 생각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용서받고 구원얻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속죄의 효능, 예수님의 피의 효능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회개를 통해서 예수님의 피를 나에게 적용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예수님의 피가 그 기능을 발휘하여 우리의 죄를 씻어주고 덮어주어 용서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으면 응당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진실로 믿는 자가 회개할 때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물론 그때에 죄에 대한 형벌도 면제받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죄값에 대한 댓가로서 죽으셨고(죄값은 사망이므로), 죄에 대한 벌로서 고난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이다(사53장).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하다. 아니 그분 외에 다른 것으로 죄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오직 예수님뿐으로 우리가 죄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용서를 받으려면 2천년전에 갈보리언덕에서 지냈던 완전하고도 충분한 예수님의 속죄제사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죄사함의 방법이요, 구원의 방법이요, 천국가는 방법이다.

  더욱이 루터가 주장했던 기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주장도 사실은 성경에서 빗나간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갈2:16을 보자.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요즘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사람의 칭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되어있다. 루터도 이 본문을 당시에 응당 그렇게 해석했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보면,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헬라어원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을 통하여서가 아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통하여서가 아니라면 말이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 문장에 나오는 '피스티스'를 '믿음'으로 번역해버린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보라. 그것은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서인 것이다. 사람의 칭의의 당락이 예수님이 가지신 믿음을 통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의 죄악을 속하기 위해서 신실하게(충성되이) 행하신 속죄사역을 근거로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어야 하는 우리도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2:16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고 번역하지 않았어야 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명사 '피스티스'는 '피스토스'에서 왔는데, '피스토스'는 "신실한, 충성된"이라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사 '피스티스'가 나올 때에는 그것을 '믿음(faith)'이라고 번역할 것인지 아니면 '신실함, 충성됨(faithfullness)'로 번역할 것인지를 문맥을 잘 살펴서 번역해야 한다. 오히려 대부분의 '피스티스'는 '신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의 흐름상 더 옳은 번역이 될 때가 훨씬 많다. 그러므로 갈2:16의 말씀도 그것을 '믿음'으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신실함, 충성됨'으로 번역했엉 했다. 그러면 그 문장은 아주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죄인들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충성된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분이 구약에 약속된 예언들을 신실하게 충성되이 성취하심으로 우리의 속죄를 위한 근거를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실함(충성됨)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을 우리가 믿을 때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효능을 우리도 전가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어야 한다. 결국 칭의는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루터는 칭의를 논할 때에 '피스티스'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신실함(충성됨)'으로 해석하지 못했다. 그냥 믿음, 아니 "오직 믿음"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루터에게 있어서는 칭의를 얻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족한 것이었다. 믿음으로 다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의 주 되신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칭의를 얻는 것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속죄에 대한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언급한 칭의의 대한 본문은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 나와서 칭의를 얻고 돌아간 자가 있었는데 그는 세리였다. 그때 세리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속죄만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고 간구했다(헬라어원문을 보라). 그렇다. 오직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루터의 주장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성되이 구약의 속죄사역을 완성하셨음을 믿는 믿는 것과 우리의 회개를 통해서 칭의도 주어지는 것이다.

 

마. 종교개혁자들 중에 칼빈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를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하지만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구원관이 루터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면서 더 이상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루터보다 한 술 더 떠서, 사람의 구원은 만세전예정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으며, 하나님께서 한 번 정하신 예정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니, 사람이 한 번 구원받은 것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며, 그것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며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람이 구원얻는 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하나님의 예정으로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예정"이란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성경에는 단 한 건도 개인구원예정의 사례가 없다. 다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그분을 따르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만약 그러한 예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다 개인의 사역에 대한 예정일 뿐이다.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기로 예정하신 예정인 것 뿐이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예정하신 것이며, 사도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그릇으로 예정해 놓은 것 뿐이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하여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함에 따라, 결국 회개가 필요없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예정한 대로 구원을 받는 것이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면 만세전에 예정한 것을 증명한다고 가르쳐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날마다 믿음을 점검하고, 자신의 죄를 찾아 회개하려고 할 것인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구원이 따놓은 당상인데 왜 날마다 회개하기를 힘쓰고, 믿음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인가?

  그러니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도 잘못된 것이다. 루터의 "오직 믿음" 구원론도 잘못된 것이며, 칼빈의 "만세전예정" 구원론도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따라가야 할 것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뿐이다(기왕이면 헬라어원문을 보라).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믿고 따라갔던 바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이며, 그것이 전부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또한 행위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행위란 올바른 믿음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는 결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며, 자기자신이 구원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주는 절차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나오며

  이제는 제대로 구원을 말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다보니, 나중에는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을 헛 것"이라고 기록된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제거하려고 하였다. 야고보서는 사도적 저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거부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야고보가 사도바울의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루터는 잘못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는 있다. 중세교회로부터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지 그것을 맞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오직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론을 따라가야지, 다른 것들을 따라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다시 칼빈의 예정론교리가 너무나 강력히 대두되여 칼빈의 예정론을 따라가지 않으면, 이단으로 낙인찍히기 딱 좋은 시대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만세전에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속죄사역을 믿어야 죄사함을 받고 칭의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며, 지은 죄를 날마다 회개하는 자가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구원 안으로 택함을 받는 것이다. 마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구원 안으로 많은 사람을 초청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택함을 입는 자는 매우 적다. 만세전부터 개인이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노정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끝까지 완주하는 자 적기 때문이다. 어떤 자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가? 회개해서 죄를 이기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또한 어떠한 핍박과 고난중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아무쪼록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사도들이 믿고 따라갔던 구원론을 믿고 따라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구원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시작했지만 결국 두렵고 떨림으로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빌2:12). 죽을 때에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회개하고 죽음으로써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7년 12월 17일(주일) <회개와 천국복음>책을 출간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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