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주께로 돌아갈 때 수건이 벗겨진다(고후3:12~18)_2018-02-11

by 갈렙 posted Feb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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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JEtzVcp3jZY
날짜 2018-02-11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3:12~18(신약 289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율법의 영광, 선지자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 가림막, 모세의 수건, 종교개혁자, 루터의 이신칭의론, 칼빈의 만세전이중예정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그때도 모세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빛나던 광채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자기가들이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것이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에 빛을 비추신 분께서 바로 그때 자기들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그분을 끝까지 청년목수라고 무시했고, 자기들이 만든 유대종교의 신성한 권위에 도전하는 나사렛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꺼풀에 계속해서 뭔가가 씌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모세를 덮었던 수건을 벗겨버릴 때에라야 모세의 얼굴에 과거에 빛나던 광채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일부러 수건을 벗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모세의 수건이 벗길 수가 있는? 그것은 우리가 오직 주께로,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다(고후3:16).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수건이 벗겨진다. 오직 예수님만이 진리만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된다. 그분은 모세와 엘리야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만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는 완전한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 그때부터 전체가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된다. 오늘은 우리를 덮고 있는 모세의 수건을 벗겨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우리가 신앙의 길을 잃었을 때에는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가? 누구를 붙잡아야 하는가? 어떤 이는 종교개혁자들에게 가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루터가 말했던 이신칭의의 신앙을 견고히 세우고, 칼빈의 만헤전이중예정론을 붙잡고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종교개혁의 신앙을 붙들어야 한다고 극구 주장하는 그분들에게 진정 묻고 있다. 왜 종교개혁의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우리가 진정 되돌아가야 할 것이 있고 또한 다시 붙들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렇게 피튀겨가며 외치는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이 성경에 가르치고 있는 가장 바른 길이라고 확증해 주었는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바른 신앙을 찾으려 할 때 왜 성경 그 자체로 가야하는지, 왜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야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우리를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들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그런 것으로는 사탄마귀의 계교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관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으려 하는 습성도 있을 수 있다.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우리가 그동안 진리라고 굳게 붙들고 있던 것이 사실은 거짓이었거나 과장된 것이었거나 일시적인 것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내가 붙잡고 가는 것이 튼튼한 나무인 줄 알았는데 썩은 고목나무라는 알려지만 썩은 고목나무를 버리고 튼튼한 나무를 붙들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로 하여금 참 진리를 붙들지 못하는 하는 요인은 사실은 우리의 앞길을 잠시나마 비추어주었던 불빛들이었는데, 그것이 전부인량 믿고 따라가는 습성을 버리라고 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3:13-15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랬다. 출애굽기 34장 29절이하를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고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있었다. 모세는 그 사실을 잘 몰았다. 40일 금식기도 후에 영광스런 하나님을 뵈옵고 나니 그의 얼굴에서도 광채가 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보기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해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게 된다. 그래서 모세는 자연스럽게 백성들과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거꾸로 생각했다. 모세가 수건을 쓰고 있으면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따르고 있는 율법의 영광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 수건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도 선하고 의롭고 영광스런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일시적인 용도의 산물이다. 율법의 영광은 영광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에 비하면 촛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영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아니하고 촛불처럼 약한 율법을 계속해서 붙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율법의 영광이 제일이라는 것을 다투다가 영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죽이고 만다. 참으로 어처구이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3. 종교개혁자들이 본 것은 참으로 제대로 본 것이며 전체를 본 것인가?

  그런데 이와같은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한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종교개혁사상은 그 시대를 밝히는 등불과 같았다. 중세가 너무나 타락했기에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은 큰 빛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은 정말 미비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 중에는 오로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만이 최고의 신앙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심지어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에서 답을 찾자고 해도, 우리들의 말을 전혀 곧이들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신학사상이야마로 가장 놓은 신학사상이며, 그것이 구원으로 인도해주는 가장 바른 길이니 그 길을 따라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이 개혁주의 사상가들의 이상을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복음 훼손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이단이 되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니 누구도 이들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지경에 되어버렸을까? 왜 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이 최고이며,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고 그렇게 우기는 것인가? 루터의 말한 이신칭의가 인간구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말인가?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얻고 구원도 받는다는 말인가? 물론 믿음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믿음만이 아닌 것을 그들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이 말했던 만세전예정교리가 인간구원의 더 진전된 최고의 교리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은 지금도 자기들이 믿는 신앙만이 옳은 답이요 정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지금은 종교개혁이 있은 후 벌써 500년이 지나간 시대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에는 뛰어난 사람들이기는 했으나 그들이 미처보지 못했던 구원론의 새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보았던 칭의의 관점이 부족했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점차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4. 우리는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하는가? 종교개혁자들과 사도들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그렇다면 어디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누가 갑자기 만들어낸 신학사상을 따라서 찾아낸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한 것들이었다면 또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철칙은 온전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특히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의 말씀이만 진리이고 정답이고 불변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에 대한 다양한 지식들이 나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은 당대에는 매우 빛나는 등불과 같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희미한 불빛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관점에 따라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손에는 대문자사본이라는 성경원문이 들려져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시대에는 소문자사본만 있는 줄 알았고 변개된 그 성경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하고 있는 신학사상이 변개된 성경으로부터 온 것도 있다. 그러나 보니 얼마나 칼빈이 잘못 이야기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허구성이 그렇게 큰 지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문자로 기록된 성경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비춰보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5. 루터가 외쳤던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는 칭의에 대한 설명으로는 한 쪽이 빠져있는 부족한 것이었다.

  비근한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루터는 칭의를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에 대한 믿음으로 얻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의 책임이 어느정도 들어가고 있다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는 것 외에도 회개가 있어야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눅18장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분명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눅18:13~14).

눅18:13-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속죄를 베풀어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죄인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속죄해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눅18:13). 뿐만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도 동반되어야 하는 것임을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칭의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인침을 받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은 처음에는 오직 믿음 하나만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뒤에라도 자신이 죄된 본성을 지닌 육체와 살다보니, 그만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그때에는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래야 칭의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는 과정을 통해서 나타난 루터의 칭의론은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한 칭의의 과정은 구약성경에 아브라함이 받았던 칭의 속에도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다(창15:6). 하지만 이내 그도 육체에 빠져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죄된 본성을 따라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후처를 통해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만 육체의 본성대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서야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온전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도록 그에게 전격적으로 할례를 받으라 하신다.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하던 그 근본의 포피플 잘라내어, 다시는 죄된 육체의 본성을 따르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이뤄어지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할례의 사례를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가 신약성도들의 세례와 같다고 말했다. 즉 할례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용서의식이라고 한다면, 신약의 세례도 그와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이 오직 처음에는 믿음만으로 온전한 칭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다시 믿음 자체가 흔들릴 수가 있는 것이다. 믿음 안에 온전히 서지 못하고 그렇게 행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믿음을 회복하려면 아브함이 할례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할 때에라야 믿음이 다시 회복되고 온전케 되기 때문이다.

 

7.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의 선상에 놓으려 했던 베드로의 실수는 무엇이었는가?

  마17장에서는 예수께서 변모하셨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변화산상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각자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이 아논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그만 실수하고 말았다.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비교해서 동일선상에 놓았기 때문이다. 초막 셋을 지어 각기 초막 안에 거하게 해드리겠다고 제언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서 꾸중이 그에게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렇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는 진정 빛의 창조주되신 예수 님앞에 희미한 불빛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뭐가 뭔지를 잘 모른 채, 예수님과 예수께서 창조하신 모세와 엘리야를 동일선상에 놓으려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8. 해답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거나, 잠시 우리에게 희미한 불빛역할만을 했던 것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문제에 봉착하거나 진실을 알고 진리를 알려고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하는가? 주께로 돌이켜야 한다. 주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루터에게 가서 답을 찾으려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가 중세로부터 교회를 건져내었으니 그의 의견은 참고하면 된다. 그러나 정답은 오직 주 예수님 뿐이다. 그분이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께로 가서 그분으로부터 답을 얻어야 한다. 인류의 6천년의 역사 가운데 이미 죽어 다른 세계(아이온)에게 들어가 있는 사람을 불러낸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그랬다. 그것은 예수께서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해준다. 그런데 어찌 율법과 선지자의 레벨에 예수님을 앉히려고 하는가? 오늘날 개신교인으로서 말하자면, 어찌 루터와 칼빈을 예수님과 동일선상에 놓으려하는가인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전부 다 진리다. 루터도 잘못 말할 수 있고 칼빈도 틀릴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앞으로 가면 어거스틴도 사람이기에 틀릴 수 있고, 사도바울도 틀릴 수 있다. 물론 그들도 성령을 받아서 성경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록한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한 언제 어디서라도 항상 진리가 되는 말씀만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뭔가를 바로 잡거나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하고, 특히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한다. 그분만이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며, 그분만이 모든 것에서 우리를 거지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이제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했는가를 찾아보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제쳐놓고 사도바울이 말했던 것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큰 일을 감당하기는 했지만 루터와 칼빈의 주장만을 따라가지 말고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따라가야 한다. 또한 그것에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완전한 해답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원류이고 무엇이 지류인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무엇을 나중에 적용해야 하는지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전부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가 정확히 보인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진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고 참된 구원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신학자에게 가서 묻지 말라. 그 사람도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에게 묻고 그가 가르친대로 따라가다가는 전체를 보지 못해 큰 낭패를 만날 수 있다. 그만 믿고 따라가다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거짓된 사설을 따라갈 수도 있다.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뿐이다. 루터도 아니고 칼빈도 아니다. 또한 웨슬레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 뿐이다. 오직 우리가 주께로 돌아갈 때에라야 나 자신의 편협적인 시각이 보일 것이다. 나를 덮고 있는 수건이 벗겨지지 시작할 것이다. 그때부터 보이지 않던 것이 서서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전제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와 상대적인 진리의 차이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2월 11일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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