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 과연 성경적인가?(롬3:9~18)_2018-04-29

by 갈렙 posted Apr 29,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BozWc3uf_9o
날짜 2018-04-29
본문말씀 로마서 3:9~18(신약 24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전적인 타락, 전적인 무능, 칼빈의 예정론, 루터의 노예의지론, 남은 자유의지과 회복된 자유의지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이라는 교리는 칼빈의 예정론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리들 중의 교리다. 이것이 무너지면 칼빈의 예정론도 무너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덩달아 칼빈의 5대교리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또한 이 교리가 무너지면 인간에게 어느 정도 자유의지가 남아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절대주권적인 구원교리마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더욱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는 죄를 짓고 마귀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일 뿐, 인간에게는결코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마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든지 칼빈의 예정론을 따라가고 신봉하는 자는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교리를 꽉 붙들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기인하는 사상누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숨처럼 붙잡고 있는 롬3:10~12의 말씀이 사실은 잘못 해석되고 잘못 적용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진짜 그럴까? 진짜 그렇다. 이제 그 실제 안으로 들어가보자.

 

1. 들어가며

  사람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 이것은 칼빈의 5대교리 가운에 맨 처음 조항에 해당한다. 이것을 필두로, 무조건적인 선택, 불가항력적인 은총, 제한속죄, 성도의 견인이라는 칼빈의 5대교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말로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 빠져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적당히 얼벼무려서 될 일도 아니다. 이것을 분명하기 짚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만세전예정론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갖기 어렵게 될 것이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한 번 회개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간다는 교리까지 무수히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런 것들은 신학자가 만들어낸 교리에 해당할 뿐,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떤 분들 중에는 칼빈의 신학만이 정통이며 이 견해를 따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국과 지옥가는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야지 한낱 인간의 교리나 신학에 따라가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라도 잘못된 주장이라면 과감히 척결해야 하고, 성경적인 바른 견해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논란의 중심에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이라는 교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것도 그것이 성경적인 견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이것이 성경인량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당신은 무슨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당신이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무능해져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지를 오직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볼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 이 때에 죄인된 우리 인간이 남은 자유의지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이 과연 성경적인지를 알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첫번째는,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남아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그동안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을 대변하고 있다는 성경말씀들에 대한 해석이 과연 옳은 해석인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해 줄 수 있는 판단기준은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위대한 신학자가 말했으니 그것이 맞을거야"하고 넘겨짚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안전하다. "지난 500년동안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해서 전통이 되었으니 그것이 맞을거야"라고도 넘겨생각하지 말라. 아무리 훌륭한 교리와 신학이라도 성경이 아니라면 혹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상충된다면 언제든지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보이고,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3. 타락한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첫째로,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남아있는가부터 살펴보자. 이것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가지 주장이 있다.

  먼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은 인간에게는 더이상 자유의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간이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러나 이와같은 견해와는 달리 다르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다(이것이 사실은 훨씬 더 성경적이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며, 심각하게 타락하기는 했으나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조금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을 인간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로 꼭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행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실 때에 그 손길을 붙잡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에 그 초청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책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해보자. 옛날 "타잔"이라는 영화가 한참 유행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 사람이 늪지대같은 것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봤자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되고 나중에는 손가락 몇 개만 보이다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 인간의 상태는 이런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늪지대에 빠져서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했다(마12:20). 갈대가 상했기에 가만히 두면 곧 꺾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등불에 기름이 없어서 지금도 꺼져가고 있다. 가만히 두면 아마도 꺼져버릴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상태라는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그래서 가만히 두면 반드시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의 육신은 살아있을 때에, 주님께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길을 붙들어야 한다. 만약 그 손길을 뿌리친다면 인간은 구원발을 가능성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 비록 타락해서 죽어가고 있지만 인간이 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구출하려고 이 세상에 오시어서 우리게에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길을 붙드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했어도 구원의 손길을 붙잡을 수 있는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자유의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들을 빈 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

신30:18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겔18: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렇다. 우리 인간은 주님의 구원의 초청에 반응해야 한다. 그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 초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그분을 붙잡을른지 아니면 뿌리칠른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그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때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저버리는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주님을 붙잡아 구원받을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는 것이다.

 

4.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나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인가?

  둘째로, 종교개혁자들이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교리를 말할 때마다 사용하는 롬3:10~12의 말씀이 과연 어떤 것이 바른 의미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론을 주장한 칼빈의 해석이 정말 제대로 된 해석인지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먼저 롬3:10~12의 말씀을 인용해본다.

롬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칼빈은 롬3:10~12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의인은 이 세상에 아주 없다. 그래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다 치우쳐 무익하고 선을 행하지 않으며, 그래서 선을 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얼핏 이 말씀대로 해석하면 칼빈의 해석이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롬3:10의 말씀과 롬3:11~12의 말씀은 동일한 한 본문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롬3:10에 대한 인용성경구절과 롬3:11~12에 대한 인용성경구절은 서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말씀을 붙여서 설명할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따로 떼어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사실 롬3:10은 롬3:9의 말씀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인용구절이다). 그런데 왜 칼빈을 비롯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롬3:10~12의 말씀을 한 문단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난하주의 각주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롬3:10~12의 말씀에 대한 난하주를 보면, "시편14:1이하 또는 시53:1이하"라고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롬3:10~12의 말씀은 마치 시편14:1(시53:1)이하의 말씀을 한꺼번에 인용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롬3:10에 대한 구약인용구절은 시편14:1~3에서 따온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롬3:10에 대한 구약인용구절은 어디에서 따온 것일까? 그것은 전7:20에서 따온 인용구절이다.

전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그렇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이 세상에 사람 치고 선을 행하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하는 그러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죄를 짓고 살고 있는 사람 곧 죄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롬3:10의 말씀은 롬1:18~3:8까지 사도바울이 언급했던 말씀의 요지 곧 이방인들이든 유대인이든 다 죄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라는 롬3:9을 뒷받침해주는 구약성경구절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롬3:9~10의 말씀을 이어서 읽어보자.

롬3:9-10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와 같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렇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라 다 죄아래 놓여 있는 죄인들인 것이다. 마치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선을 행한 채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고로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롬3:11~12의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시편14:1~3에 대한 인용말씀이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 두 말씀들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롬3:11-12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시14:1-3 어리석은(미련한)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사도바울이 롬3:11~12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말씀들은 시편14:1~3에 대한 성경말씀에 대한 인용말씀이다. 그런데 이때 인용된 말씀은 누구에 대한 정의라고 나와 있는가? 죄인이 대한 정의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없다고 믿고 있는 어리석은 자(미련한 자)에 대한 정의인가? 그렇다. 후자의 경우다. 그러므로 롬3:10에 나오는 의인이란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고, 그 반대의 개념은 죄를 범하고 있는 인간 곧 죄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롬3:11~12의 말씀은 죄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예 없다고 믿고 선을 전혀 행하지 않는 자 곧 어리석은 자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이런 자들을 일컬어 구약성경에서는 "악인"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사람은 아담의 범죄이후 모두가 다 죄인이다. 그러다 죄용서를 받아서 의인이 되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결국 심판 때에 가서 악인으로 처벌받게 될 것이다(마13:49).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선을 전혀 행하지도 아니하는 자는 악인을 가리키는 말이지, 죄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에 나오는 의인의 반대는 "죄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롬3:11~12의 말씀에서 가리키는 사람은 죄인 중에서도 악인에 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말은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찾는 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그것은 금방 알 수 있다. 불교인이라도 얼마든지 선을 행하는 자가 있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배려하고 아프리칸 난민을 위하여 기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불교인이라 할지라도 위급할 때에는 "하나님" 혹은 "주여"를 찾는 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아니한가?

 

5. 누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선을 행하지도 아니하는 악인인가?

  또한 시14:1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서 선을 전혀 행하지 않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시14:1에 의하면, 그는 "이러석은(미련한) 자"다.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악인이라고 계속해서 불리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라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을 히브리어로 보면 "나발"이라고 나와 있다(시14:1). 나발이라는 이름의 뜻이 곧 어리석은(미련한) 자인 것이다. 시편14편의 저자인 다윗은 중의적인 표현을 써서 누가 어리석은 자요 악인인 것인지를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다. 그럼, 나발은 누구인가? 그는 훗날 다윗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의 남편되는 사람이다. 고로 우리는 삼상25장을 통해서, 누가 어리석은 자요 악인인지를 찾아볼 수 있다. 누가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 자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나발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마온사람이었는데 갈멜에서 양떼를 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이 도피중인데도 자신의 소년을 보내 그의 양떼를 지켜주었다. 그래서 양털깍을 때가 되자 다윗은 자기의 소년들을 보내 뭔가를 얻어오도록 했다. 하지만 나발은 완전히 배은망덕한 나쁜 사람이었다. 악인이었다. 그는 말했다. "다윗이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내 떡과 물과 고기를 줄 수 없노라"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다윗은 칼을 차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발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하인중의 하나도 나발의 아내된 아비가인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아비가일은 즉시 떡과 포도주와 건포도와 볶은 곡식과 무화과뭉치를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에게 마중나갔다. 그래서 다윗을 만나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내 주여,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코 이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삼상25:24~25)" 그래서 다윗의 노여움을 풀 수 있었다. 그후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며 그가 죽자,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가서 그의 두번째 아내가 되었다. 고로 어리석은 자(미련한 자)는 다름 아닌 나발과 같은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오직 자기의 배부름만을 위해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곧 악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다 죄를 짓고 사는 죄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 중에는 악인도 있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없다고 말하며 선을 전혀 행하지 않고 악만 일삼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심판때가 되면 악인으로 판명되어 불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죄를 짓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가 되면 그는 칭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자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6. 루터와 칼빈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은 과연 성경적인 주장인가?

  그렇다. 결국 루터와 칼빈의 그렇게 주장했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 주장은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 나온 오류였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비성경적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은 1618년 도르트회의에서 정통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을 개신교의 정통교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좀전에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은 롬3:10~12에 대한 성경구절을 잘못 해석한 데서 오는 오류였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롬3:10의 말씀을 인용할 때, 구약성경 전도서 7:20을 인용함으로, 이 세상에는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의인은 없다고분명히 언급하였다. 하지만 칼빈과 같은 신학자들은 롬3:10의 말씀을 어리석은 자로서 곧 나발과 같은 자라고 해석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오류가 발생했고 그것이 고스란히 그의 예정론교리에 포함되어버렸으며, 그것이 1618년 정통교리로 선언됨에 따라, 이제는 교회의 안방을 차지해버렸던 것이다. 아니다. 크게 잘못되었다. 칼빈이 잘못 해석한 것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이제는 제대로 성경말씀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쇄된 성경이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더 간편한 디지털화된 성경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7. 나오며

  그렇다.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으며 전적으로 무능하지도 않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초청했을 때 반응할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의지는 때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있고 때로는 선을 행할 수도 있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내미시는 주님의 손길을 붙드는 것이다. 그분의 구원의 초청을 듣고 기쁨으로 그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늪지대에 빠져있는데 구원하기 위해 내미는 주님의 손길을 붙잡는 것이 곧 우리가 할 일인 것이다. 그래야 죽음의 늪지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칼빈의 교리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길을 붙들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조금이나마 자유의지를 남겨두셨던 것이다. 내가 비록 타락했어도 내게 남아있는 자유의지를 잘 사용하자.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손길을 꽉 붙잡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2018년 4월 29일(주일)

정병진목사

 

 

 

 

 


Articles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