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으로 살펴본 행함과 믿음의 상관관계(약2:14~26)_2018-09-16

by 갈렙 posted Sep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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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zsKvSiu1oZo
날짜 2018-09-16
본문말씀 야고보서 2:14~26(신약 37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행함과믿음,구원과믿음,구원과행함,행함의단점, 온전케된믿음,구원할만한믿음,믿음과회개,참된믿음,행위로나타나는믿음

1. 들어가며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였던 사도 야고보가 아니다. 야고보서의 저자였던 야고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친동생인 예루살렘교회 장로 야고보다. 그는 A.D.60년경에 이 야고보서를 썼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이미 선택받은 선민이었다가 믿는 자가 되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것을 목도한 이후에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더이상 예수님을 자신의 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불렀고 자신을 종이라고 칭했다(약1:1, 2:1, 3:7). 그러면서 그는 믿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구원할만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대체 그는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이며, 그 결과는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이신칭의는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말했던 이신칭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특히 오늘은 헬라어원문과 비교해가면서 이 주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야고보가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야고보가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에게 있어서 참된 믿음이란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믿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은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취지다(약2:14,17)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헬라어직역: 내 형제들아, 만일 누구든지 믿음을 말할지라도, 행위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지 않겠느냐?)
약2:17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헬라어직역: 믿음 역시 만일 행위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자기자신을 따라[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렇다면 자신을 구원할만한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야고보는 자신을 구원할 만한 참된 믿음이란 행위로서 나타나는 믿음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정말 어떤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은 자연스럽게 행위들로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거꾸로 해석한다면 이렇다. 자연스럽게 행위들로 나타는 열매들이 자신에게 없는데도 자신은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그러한 믿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 구원얻을 만한 진짜 믿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행위들로서 그 믿음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야고보는 행위들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믿음을 헛 것(제로, 텅빈 것)이라고까지 언급한다(약2:20). 그러므로 행위들로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이 믿음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되며, 그러한 믿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3. 야고보가 언급한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의 두가지 예표는 누군가?

  이어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의 두 가지 용례를 언급한다. 그것의 첫째,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둘째는 기생라합의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자의 믿음의 대표자인 것 같고, 기생라합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의 믿음의 대표자인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둘 다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 않았고, 둘 다 행위들로서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독자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 그의 믿음이 행위로 나타났으며, 기생라합은 여리고성에 들어온 정탐꾼들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숨겨주고 보호해준 행위로서 그녀의 믿음으로 밖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이 없는 몸은 이미 죽은 것이듯이 행위들이 없는 믿음도 역시 죽은 것이라고 재차 언급한다. 그런데 문제는 야고보가 구원얻는 믿음을 말하면서, 이신칭의에 관하여 언급했다는 것이다.

 

4. 야고보는 이신칭의를 어떻게 말했는가?

  그렇다면, 야고보가 말하는 이신칭의와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야고보서의 편지를 통해서 그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약2:21~23).

약2:21-2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시믈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헬라어직역: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린 후에(과거분사), 행위들로부터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너는 본다. 믿음이 자신의 행위들과 아직도 함께 일하고 있다(미완료능동태)는 것을. 그리고 행위들로부터 [있는] 믿음이 완성되었다는 것을(과거수동태).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바,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다는 말씀이 채워졌다[성취되었다]. 그리고 그는 하난미의 친구라도 불려졌다. 너희는 본다. 사람이 행위로부터 의롭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부터는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 야고보는 말한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나왔을 때에도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온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믿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 나섰지만 그는 상당히 사람을 의지하는 연약한 자였다. 그는 아차하면 조카 롯을 양자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기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싸우는 바람에 조카 롯을 떠나보내야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길리운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나마 양자를 삼을까 생각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면서,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창15:5). 그러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도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15:6).

  하지만 야고보는 그로부터 적어도 50년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그의 독자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친 후에야 비로서 행위들로부터 그의 의가 완성되었다고 언급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처음 부름을 받아 나왔을 때의 믿음은 시작단계의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믿음 즉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은 아니었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칭의는 이미 창15장에서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칭의가 비로소 완성될 때에는 창22장이 되어서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처음부터 자신을 구원할만한 그러한 참된 믿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은 약해졌고, 나중에는 자식을 낳을 힘까지 힘이 약해지자, 인간적인 방법 곧 자신의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데려다가 자식을 낳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자 그때에 할례를 행함으로 아브라함은 회개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자 회개후에 곧바로 그에게 아들이 주어졌고 다시 1년 뒤에 이삭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25년(요세푸스) 내지는 37년(미드라쉬)이 흘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한 상태였을까? 이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을 구원할만한 참된 믿음이 이미 생겨 있었다. 집에서 모리아산까지 삼일길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망설임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한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 이삭이 없어져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기에게 자식을 또다시 주실 것이고, 그 자식들이 또 자식을 낳아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들을 제단에 바침으로 약한 믿음이 채워넣은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밖으로 드러낸 것 뿐이다.

  그렇다. 한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을 갖기까지는 이처럼 많은 실패와 사건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누구든지 자신의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이고, 그 믿음이 온전해질 때 비로소 행동으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세월이 적어도 50년이 필요했다. 그런데 한 번 믿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큰 일이다. 잘못 되었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5.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에 대한 잘못인 이해는 어떤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자신을 구원할만한 온전한 믿음은 없지만, 행위들이 있어야 온전한 믿음이라는 말에 홀딱 넘어가서, 자기는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나서 일부러 행위들을 만들어 행함으로 자신의 약한 믿음을 채워보려는 얄퍅한 시도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과 행위로서는 구원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행위들이라는 것은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의 자연발로적인 결과들인 것이지, 온전한 믿음이 없거나 그것이 작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행위들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니까 일부러 행위들을 행하여 자신의 약한 믿음을 채워보려는 시도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안타까운 것은 믿는 이들이 많은 수가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롬10:17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을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이 누구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늘 들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생겨야 어떠한 핍박이 찾아와도 그것을 견뎌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을 키워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듣기를 사모해야 한다.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둘째로, 그것은 회개다. 즉 사람이 구원얻을만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더이상 믿음의 성장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죄악을 가진 상태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키워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비로소 해결해나갈 때에,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키워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에 있어서 진보를 이루기를 진정 원한다면, 말씀을 듣는 일에 절대 게을리하지 말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즉시 회개하기를 바란다. 회개를 통해서 죄를 하나씩 둘씩 버림으로 믿음도 생겨지는 것이지, 자신이 지은 죄를 몸에 담고 있으면서 믿음이 생겨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는 야고보 장로가 귀신들의 믿음의 빗대어 이렇게 설명하였다.

히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헬라어직역: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느냐? 잘 행하는도다. 귀신들도 역시 믿고 그리고 떠느니라)

  그렇다.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는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두 분 세 분이 있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뿐이다. 아버지는 보좌에 앉아계시고, 그의 오른편에 아들이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다시 보라.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계신다. 천국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가 가셨지만 A.D.60년경에는 이미 귀신들도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언제가 재림하시면 타락한 귀신들을 심판하실 것이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들은 그분 앞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들이 가진 그러한 믿음이 자기들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바로 야고보 장로의 말씀의 핵심이다. 타락한 천사들도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으로 그들은 자신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들이 비록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진 믿음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 회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그들은 절대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절대 요청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귀신들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은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으나 회개할 수 없기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느냐 못받느냐의 관건은 믿음에 있기보다는 그가 과연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또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타락한 천사는 믿기는 해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 천사들은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우리도 언젠가는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을 갖게 될 날이 올 것이다.

 

7. 나오며

  이처럼 참된 믿음이란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러한 믿음은 행위로서 보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시험과 환란을 겪으면서 또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면서 비로소 얻어지는 믿음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누라를 팔아먹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해 인간적인 사람을 끌어들여온 자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면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나이 125세쯤이 되자,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인정해줄 수 있는 믿음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니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데 서슴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으로 인하여, 그의 믿음이 온전해진 것이 아니다. 그의 나이 125세정도 되었을 때에는 이미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제단에 기꺼이 바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약한 믿음을 행위로 채우려고 시도하지 말라. 그러다가는 위선자가 되기 쉽다. 그렇게 하다가 외식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믿음은 없는데 행위로서 자신이 믿음이 온전한 척하려다가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그건 가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외식하는 믿음으로는 절대 천국갈 수 없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다. 무엇이 참된 믿음이며,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아가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회개할 때 믿음의 진보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가지 사건과 환경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온전한 믿음으로 점차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얻게 된 믿음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해주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는 행함으로 그것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 믿음을 얻기까지 오늘도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회개하면서 앞으로 달려나아가라. 아브라함도 50년 걸렸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16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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