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구원예정론과 불특정다수구원예정론, 과연 어느 것이 옳은가?(롬9:14~29)_2019-09-22(주일)

by 갈렙 posted Sep 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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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ODRhV5f2xuQ
날짜 2019-09-22
본문말씀 로마서 9:14~29(신약 25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예정론,칼빈의예정론,칼빈과베자와코른헤르트,알미니우스,만세전예정론,개인구원예정론,불특정다수예정론,사역예정,예지예정

1. 들어가며

  성경에는 과연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계획하셨다는 말씀이 존재하는가? 그러한 사례가 한 번이라고 나오는가? 어떤 분들은 그러한 사례가 성경에 나온다고 말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서와 야곱"의 경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절대주권을 가지고 있으니 한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도 그렇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진정 옳은 것인가? 성경은 정말로 개인구원예정론을 말씀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특정다수예정론을 말씀하고 있는가? 그래서 특별히 오늘 이 시간에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사례와 그리고 애굽왕 바로의 경우를 들어서, 과연 개인구원예정 사례가 존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참된 예정론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

  성경에서는 예정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에는 엡1장과  롬8장에서 예정론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서 엡1장과 3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엡1:3~6,3:6). 그리고 롬8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예정하신)자를 역시 부르셨고, 그리고 그분은 부르셨던 자들을 역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셨던 자들을 그분은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롬8:30)(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의 서정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롬8장에도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말씀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롬8:29,30). 그렇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누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는가? 그것은 최소한 천사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정을 "인간구원예정"이라고 말한다.

 

3. 성경에는 과연 개인에 관한 구원예정론이 나오는가 아니면 불특정다수에 관한 구원예정론이 나오는가?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실 때에, 그 대상이 아직 창조되기도 전에 아무아무개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또한 그를 출생하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것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개인구원예정"을 계획하신 것인가? 지금까지 많은 분들은 그러한 예정이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성경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사례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어떤 개인을 그가 아직 존재하기도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지 않으셨다. 만약 개인에 관한 어떤 예정이 있다고 한다면, 조금 있다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어떤 개인을 어떻게 쓰실 것인가에 관한 사역으로의 예정은 존재한다. 또한 그 시기도 어떤 개인이 태어나기도 전의 시점에서 하나님은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대표적인 경우를 살펴보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그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거룩히 구별하여 선지자로 쓰시겠다고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나온다(렘1:5).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사도바울을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그를 선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쓰실 것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갈1:15~16).

렘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갈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렇다면 성경에는 개인구원예정에 관한 말씀 말고 또다른 어떤 예정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불특정다수구원"에 관한 예정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은 사실이나, 그 대상을 어떤 특정인을 지정한 채 예정하신 것이 아니며, 불특정다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누가 될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되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어떤 사람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었어도 그가 끝까지 믿음을 붙들지 않고 믿음을 버린다거나 핍박 때문에 믿음을 포기한다면 그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구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구원이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고 회개하며 인내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될른지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구원 안으로 초청을 받았다면 그 초청에 응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람의 구원의 여정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간다면 그가 처음 믿었을 때에 그 믿음으로 그는 결국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그 믿음을 포기한다거나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한다면 그 믿음은 좌초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불특정다수구원예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편,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상속자가 될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 숫자를 아신다. 그 숫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올 때까지다(롬11:25).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4. 롬9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의 사례"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렇다면, 에서의 야곱의 경우는 개인구원예정 사례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개인구원예정 사례가 아니라, 개인사역예정에 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서 9장에 나온다. 롬9장에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를 어떻게 쓰시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직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아니하고, 그들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였지만, 그들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예지하셨다. 그래서 그것을 그의 모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롬9:12[직역] [그것이] 리브가에게 말해졌다. 큰 자가 어린 자에게 종이 된다고.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쌍둥이였던 에서와 야곱 중에 "큰 자인 에서가 어린 자인 동생 야곱에게 종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이 예언이 있고 난 후에 수백년이 흐른 뒤에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지 이것이 곧 에서와 야곱의 개인구원예정에 관한 말씀이 아니었던 것이다. 창25장에 보면, 에서와 야곱은 사실 두 민족 곧 에서(에돔)족속과 야곱(이스라엘)족속에 대한 사역예정이었던 것이니, 에서와 야곱의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형으로서 동생을 섬기는 자가 되었더라도 에서가 하나님을 잘 믿고 그분을 섬기며 지은 죄를 회개하였더라면 그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쓰임 때문이 자신의 운명이 구원과 멸망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구약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왕도 비록 자신이 범죄했을지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그도 다윗처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5. 애굽왕 바로의 경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렇다면, 애굽왕 바로의 경우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예정한 사람은 반드시 멸망당하고 만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롬9장에 나오는 말씀은 그러한 내용의 말씀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흙 한 덩이로 당신이 사용할 그릇을 빚을 권한이 있으신 분이시다(롬9:21). 인간은 하나님에 의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그러한 권한을 갖고 계신다. 하지만 어떤 개인을 당신 마음대로 강제로 개종하여 구원받게 하거나 멸망시켜 지옥으로 보낼 권한을 갖고 계시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그 자신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칠 수가 있고, 기회를 주실 수가 있으신 분이시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코를 꿰어다가 강제로 구원시키는 분은 결코 아니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존중하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줌으로 우리를 구원 안으로 초청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의 초청의 손길을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도록 놔 두셨다. 만약 이것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이는 구원받을 자로 만세전에 예정해 놓으셨고, 어떤 이는 멸망할 자도 예정해 놓으셨다면, 아마도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만세전에 멸망으로 예정되었던 자가 그날에 "왜 당신은 나를 아무런 이유없이 지옥에 멸하기로 예정하셨습니까?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합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이라도 아무 대답을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악한 자 마귀를 심판하실 것인가?

  그러므로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애굽왕 바로를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으로서 안배하신 것은 맞지만 그가 결국에 멸망받아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은 그가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다는 이유 때문에 멸망당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인이라도 돌이켜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바로왕의 강퍅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게금 허락하신 것이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그의 자유의지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고 싶었고, 당신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는 도구로 사용하시려 하셨기 때문이다(롬9:17). 다시 말해 그를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려 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강제가 아니었고 그의 마음의 선택의 결과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다. 고로 그가 멸망받게 된 것은 그가 재앙 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왜 구약의 사울왕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신약의 가룟유다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그것도 그들의 선택이었던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사울이 그날에 다윗처럼 회개를 하였고, 가룟유다도 베드로처럼 회개했다고 한다면, 그들의 운명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오래 참음으로 각기 회개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벧후3:9).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의 온전한 지식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딤전2:4). 그렇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돌이켜 다시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고 계신다(겔18:26~27).

겔18:26-27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6.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분은 롬8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있는 한, 한 번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 면은 맞는 주장이지만 다른 한 면으로 보면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은 정말 크고도 넓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피조물이 되시어 사람으로 나타나셨을까?(딤전3:16)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을 놓지 아니하고 어떠한 핍박에도 주님을 부인하지만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는 그날까지 끝없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 우리가 만약 주님을 믿지 않거나 핍박 가운데 주님을 부인해 버린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놔버린 격이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강제로 구원하실 수는 없으시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가 결정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우리의 구원도 보장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 밖에 있는 어떤 외부적인 요소들(환난이나 곤고, 박해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 칼 등)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는 것이다(롬8:35). 특히 핍박의 상황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놓아버리거나 우리가 주님을 부인해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사랑도 우리에게서 그만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마22장과 눅14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에는 먼저 초청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있었다(마22:3~6). 하지만 그들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날에 있었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런데 잔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주인은 이미 잔치에 올 사람들의 숫자를 예상해 놓고 있었고 그 계획에 따라 음식을 준비했고 자리도 준비해 놓았다. 빈 자리가 많자, 주인은 자신의 종들을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보내어, 선한 자나 악한 자난 만나는대로 초청하고 데려오라 했다. 그래서 들어와 잔치에 참여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들"로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었다(눅14:21). 그래도 빈 자리가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렇게 해서 들어온 자들은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눅14:23). 그러자 잔치는 손님으로 가득 찼다. 결국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득차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날 잔치자리에 온 자들 모두는 다 그날 주인이 마련해준 "예복(겉옷)"을 입고 그 잔치에 들어갔다(마22:11~12). 그러므로 그들의 신분은 다 가려졌다. 그냥 아들의 혼인잔치의 손님들이라는 신분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복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거져주어지는 "의의 예복"이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의의 옷을 입어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주제를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왜냐하면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그런데 선택함을 받은 자는 적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가 과연 천국잔치에 참여하는가? 미리 초청함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들어가는가? 아니다. 이미 초청하기로 예정된 채 있던 자라 할지라도 막상 그날 잔치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천국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미리 예정된 어떤 개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 잔치로 초대를 받은 자들 중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잔치에 결국에 참여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으로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겠지만 결국 선택함을 입은 자는 매우 적을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쪼록 구원으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의의 옷으로 갈아입어서, 꼭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9년 9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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