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들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해서는 아니 되는가?(마16:16과28:19)_2019-10-06(주일)

by 갈렙 posted Oct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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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TnJEPPCIAh8
날짜 2019-10-06
본문말씀 마태복음16:16,28:19(신약27,5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사도신경,니케아신조,로마카톨릭신조,사탄의신조,개신교의신조

개신교인들은 사도신경을 사용하면 아니 되는가? 어떤 분은 사도신경은 로마카톨릭이 만든 것으로서, "마귀를 섬기는 우상숭배행위"이기 때문에 절대 이것을 신앙고백하지 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로마카톨릭의 음흉한 교리가 숨겨져 있기에, 이것을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개신교회에서는 침례교를 제외하고는 "사도신경"을 주일낮예배 시간에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 사도신경의 어떤 부분이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사도신경에는 어떤 흠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오늘은 사도신경의 역사와 흠과 보완책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오늘날에 들어와서 어떤 분들은 개신교인들은 왜 카톨릭에서 만든 사도신경을 가져다 쓰느냐면서 사도신경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고백인지 알기나 알고 고백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 중에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는 것은 마귀를 섬기는 우상숭배행위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거기에는 카톨릭의 음흉한 속셈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폐기하고 자기들이 만든 신앙고백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는 큰 일 날일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다음 주일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려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꺼림찍하게 느껴져서,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린다. 정말 사도신경은 카톨릭의 것이며, 정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면 우상숭배행위가 되어 잘못되면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신앙고백이 되는가?

 

2. 사도신경은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가?

  어떤 분은 사도신경을 두고 "로마카톨릭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의 시작을 언제부터 보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을 로마카톨릭교회가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A.D.750년경이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로마카톨릭의 신앙고백으로 본다면, 현재의 사도신경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신앙고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150년경에 거의 모든 교회들이 현재와 비슷한 틀을 가지고 사용되고 있었으며, A.D.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에도 완성단계의 사도신경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로마카톨릭의 신앙고백이라고 볼 는 없다. 만약 로마카톨릭의 시작을 A.D.325년 니케아종교회 때부터 본다고 할지라도, 그때 처음으로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로마카톨릭의 신조로 볼 수는 없다. 다만, 동방기독교가 A.D.325년에 나온 니케아신조를 따라가며, 서방기독교가 사도신경을 따라갔기에, 보통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로마카톨릭으로 신앙고백으로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A.D.150년경 사도신경은 어떻게 해서 교회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새로 들어온 신자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이 필요했는데, 그때에 문답식으로 물었던 것을 정리한 것들이 여러 교회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A.D.80년이후 교회 안에 영지주의와 마르키온과 같은 이단들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4세기경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함에 따라, 바른 신앙 고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4세기말에 자연스럽게 현재의 형태와 비슷한 사도신경이 교회들 사이에서 통용되었던 것이다.

 

3. 사도신경은 어떻게 변천되었는가?

  사실 개신교회(개혁교회)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신앙고백은 중세로마카톨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사도신경을 그대로 전수받은 것이다. 다만, 중세로마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사도신조와는 단 한 개의 문구에서만 차이가 나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부분에서 "장시된 지"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의 사이에 "음부에 내려가사"는 말이 로마카톨릭에는 들어 있고, 우리 개신교회에는 없다는 것 뿐이다(참고로, 이 문구는 처음부터 있지는 않았으며, A.D.360년 아리안의 신앙고백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A.D.750년에 공식적으로 삽입되어 들어가게 됨).

  그렇다면, 왜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장이 빠지게 되었는가? 2가지가 그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음부에 내려가사"는 문구가 로마카톨릭의 교리 가운데 하나인 "연옥교리"와 맞물려 있어서, 개신교회가 연옥설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것을 빼버렸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 하나는 비록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문구를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칼빈은 이 문구를 삭제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교회의 전통은 칼빈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인지라,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구가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새번역 사도신경"은 어떤 변천사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현재와 같은 사도신경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1세기부터 이미 사도신경와 비슷한 신앙고백들이 교회들 사이에 세례줄 때 사용되다가, 점차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이 첨가하여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필요에 따라 점차적으로 추가된 문장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 성부에 대한 신앙고백 중에서 "천지를 만드신"은 후대에 추가되었다. 둘째, 성자에 대한 신앙고백 중에서 "잉태하사", "죽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 ]",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거룩한 공교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영원히 사는 것" 등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천지를 만드신"이라는 문구는 A.D.360년경에 추가되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는 A.D.381년경에,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영원히 사는 것"은 A.D.650년경에 추가된 것들이다.

 

4.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어디가 잘못 되어 있는가?

  오늘날 우리 개혁교회(개신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 가운데 내용상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여기서는 번역상의 잘못은 생략한다). 어떤 분들은 "외아들(독생자)"이나 "동정녀 [마리아에게]"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도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먼저, "그(하나님)의" "외아들"은 헬라어 "모노게네스"를 번역한 말로서,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요, 둘째로 "동정녀"는 처녀를 뜻하는 말이기에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의 신분이 부활후에는 "외아들(독생자)"에서 "맏아들"로 승격하셨으며, 마리아도 "동정녀(처녀)"에서 "여인"(자식을 낳은 여자)으로 바꾸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면 될 것 같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하면,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신앙고백하는 것은 결국 마리아를 신격화하기 위한 로마카톨릭의 음흉한 속셈을 용인하게 되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낳을 때 마리아의 신분은 분명 "동정녀(처녀)"였기 때문에, 이러한 신앙고백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마리아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로마카톨릭이 마리아에 대하여 얼마나 가짜 이론(교리)를 만들어내었는지를 참고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마리아의 평생동정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 마리아의 평생무자범죄설, 마리아의 승천설, 마리아의 은총의 중재자설은 다 가짜 이론(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만 예수님에게 자신의 태를 빌려주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마리마의 태중에 잉태되어 태어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카톨릭처럼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신앙고백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5. 장차 기독교회가 만들어야 할 바른 신앙고백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가?

  그렇다면, 장차 기독교회가 고백해야 할 바른 신앙고백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여러가지가 많이 있지만, 적어도 2가지만큼은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본다. 하나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신앙고백이 꼭 들어갔으면 한다. 왜냐하면 사도신경만을 가지고 늘 신앙고백하다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신경은 마28:19에 나온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고백만을 계속 고백하다보면, 성도들은 삼신론으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매우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라. 천국에 가보면, 하나님의 보좌는 한 개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거기에 예수님이 앉아계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성령으로 존재할 때가 있었고, 아들과 아버지로 동시에 존재할 때도 있었으며,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으로도 동시에 존재할 때도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는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문구가 계속됨에 따라 성도들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잘못 생각할 확률이 많아보인다. 물론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한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도들의 믿음과 회개에 따라 사람이 부활체를 입고 곧바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다는 조항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신앙고백 속에 집어넣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믿음만 있으면 들어간다고 할 것이 아니라,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까지 다 포함시켰으면 좋겠다(마4:17, 눅24:47, 행2:38,20:21).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한 자는 결국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계21:8,3:5).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부활체를 입고 곧바로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이라는 실재하는 장소로 이동한다는 것도 집어넣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그냥 천국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통치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적인 실재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사도신조)은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A.D.325년에 동서방교회가 공히 고백했던 니케아신조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니케아신조는 사실상 성경과 어긋난다든지 틀렸다고 할 내용은 거의 없다. 하지만 부족은 것이 있다.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자로 나타나셨고 존재하셨지만, 한 분이라고 하는 고백"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좀 아쉬운 부분이기는 하다.

 

6. 나오며

  어떻게 사도신경(사도신조)가 생겨났는지 역사적인 고찰을 하지 않은 분들은 사도신경이 중세로마카톨릭의 신조라고 정의하고는 무조건 이것을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도신조는 그리 나쁜 신앙고백이 아니다. 교회가 생성된 이후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이기 때문이요, 그것을 믿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A.D.381년 그리고 590년 이후 교회가 로마카톨릭이 되어감에 따라, 원래 신조에는 없던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로마카톨릭의 중요핵심교리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개혁교회)에서는 이러한 사도신경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잘못 번역한 곳은 바로 잡으며, 추가된 것 중에서 비성경적인 것은 빼고, 부족한 것은 추가하여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면 금상첨화가 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속히 그러한 날이 오도록 기도하자. 그렇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는 부족하지만 사도신경이나마 신앙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은 표현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19년 10월 06(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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