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하늘(신)의 문(창11:1~9)_2021-01-10(주일)

by 갈렙 posted Jan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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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zkAkdKh1gZ4
날짜 2021-01-10
본문말씀 창세기 11:1~9(구약 1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하늘의문,신의문,니므롯의바벨탑사건,신의문을침범하는인간,야곱의벧엘의사닥다리의꿈,열린하늘의문,얍복강의기도,돌파,기도,성전인사람의몸

성경에 보면 하늘의 종류가 세 개나 된다. 그중에 보이지 않은 하늘로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셋째하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셋째하늘이 열려질 때가 있다.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가? 또한 하늘의 문이 열려지게 되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래서 오늘은 하늘의 문을 관한 두 사람의 접근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늘의 문을 열 수 있으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성경에는 두 개의 "하늘(신)의 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는 창세기 11장에 나오고 또 하나는 창세기 28장에 나온다. 창세기 11장의 주인공은 니므롯이고, 창세기 28장의 주인공은 야곱이다. 우리는 오늘 하늘(신)의 문을 마주 대하는 두 인물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두 사람을 통하여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하늘(신)의 문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는지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상당히 영화로서 제작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두 하늘(신)의 문에 관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무얼 바라시는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2. 하늘의 문은 열려진 채 있는 문인가 닫혀 있는 문인가?

  우리는 성경에서 "하늘의 문" 혹은 "신의 문"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 구약에서는 바벨탑사건(창11장)과 벧엘에서의 야곱의 꿈의 사건(창28장)이 대표적인 것이고, 신약에서는 스데반집사의 환상(행7장)과 사도요한의 환상(계4~5장)을 들 수 있다. 바벨탑사건과 벧엘의 사닥다리꿈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은 신약에 나오는 하늘의 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본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의 문"에 관한 기사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성경만으로는 스데반이 본 그 때의 하늘은 그때 열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이미 열려진 채 있는 것이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우선개역성경에 나온 말씀과 헬라어원문을 서로 비교해보도록 하자. 

행7:55-56[개역]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7:55~56[헬라어직역]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면서 그가 하늘 안으로 주목한 후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들로부터 서 계신 채 있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보라 열려진 채 있는 하늘과 하나님의 우편들로부터 서 계신 채 있는 사람의 아들(인자)를 보고 있다.

  그렇다. A.D.33년경 그날 스데반이 본 것은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이었던 것이다(완료 수동태 구문). 그때 하늘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때 하늘은 이미 열려진 채 있었던 것이다. 왜 스데반이 하늘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을 볼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오순절 이후 성령이 오시고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실 때부터 하늘의 문은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을 스데반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A.D.95년경 밧모섬에 유배된 채 있던 사도요한에게도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그때 사도요한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열려진 것이 아니라 이미 열려진 채 있는 하늘들 안으로 사도요한의 영이 올라간 것이었다(계4:1).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만 해도 하늘은 닫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는 하늘의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인가?

 

3. 첫번째 하늘(신)의 문은 무엇을 가리키며, 그때는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첫번째 하늘(신)의 문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 11장이 나온다. 그런 그때 그들은 "하늘(신)의 문"을 열지 못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주제에 인간이 감히 자기를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신의 문에 도전을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주도자는 사실 니므롯이었다. 니므롯은 함의 손자다(창10:6~9). 그는 함의 장자인 구스의 아들로서, 함의 장손자였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최초의 강한 자였다고 소개한다. 그는 여호와를 반대하여 인본주의를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대적자로서, 당시 속담에 이르기를, "여호와를 대적하는 니므롯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인간 사냥꾼이 되어 사람들을 지휘조정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꼬드겼다. 그 사건이 바로 시날 평지에서 일어난 "바벨탑'사건이었다. 사실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의 아들들이었던 셈과 함과 야벳은 각기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떨어져서 살게 된다. 그런데 셈의 자손과 함의 자손이 시날평지에서 같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던 셈의 자손이그만 사람의 아들들이었던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성경 외에 야살의 책에 의하면, 니므롯이 데라를 그의 군대의 통치자로 세웠고, 그가 그를 위엄있게 하고 그를 그의 모든 통치자들 위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데라의 셋째아들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니므롯은 셈의 자손과 함의 자손을 일으켜서 이렇게 말했다. "자 벽돌과 역청을 사용해 성읍과 탑을 지어보자."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성을 쌓고 탑을 쌓으려고 한 것인가? 그것은 3가지 목적 때문이었다(창11:4). 첫째,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은 인간의 교만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감히 인간인 주제에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는 셋째하늘까지 탑을 쌓을 수 있겠는가? 애시당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시작했다. 고대근동의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이때 만든 바벨밥의 크기는 무려 그 둘레가 3일길 거리였다고 한다. 얼마나 크게 탑을 쌓았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둘째,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다. 역사적인 자료에 의하면 바벨탑을 쌓을 때에 벽돌 하나하나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넣었다고도 한다. 세상의 명성을 위해서 그들은 탑을 쌓았던 것이다. 자신이 죽어도 그 이름만은 후대에 남겨놓겠다는 속셈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그토록 원한다. 자신의 명성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이름만 높여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시90:4-6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시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셋째, 한데 뭉쳐서 흩어짐을 면하려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아담과 하와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령하셨다. 하지만 노아홍수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창9:1). 그런데 한데 뭉쳐서 고작 한다는 것이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높은 탑을 건축하고 감히 인간인 주제에 하늘의 문까지 탑을 쌓아보겠다는 시도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하는 그 시날성읍과 바벨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셨다. 그리고는 천사들과 함께(야살의 책에 의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앞에 선 70명의 천사들) 내려오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셨다. 그렇지만 어제까지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기억이 나지 아니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게 됨으로 인하여 자연히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흩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탑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혼잡(혼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근동의 자료에 의하면, 그 탑 이름은 "카딘기르키"라고 불렀고 전해진다. 그 뜻은 "신의 문" 혹은 "하늘의 문"이라는 것이다. 신들의 문에 도달해보겠다는 인간의 교만함을 함유하고 있는 이름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인간이 신의 문을 침범하기 위한 도전은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4. 두번째 하늘(신)의 문은 언제 나타났으며,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런데 두번째 하늘의 문에 관한 기록이 창세기 28장에 나온다. 이는 부모의 기도로 인하여 하늘의 문이 열린 사건을 말한다. 결국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놀라운 체험은 그의 부모의 기도에 의해 하늘에 문이 열리게 된 것이었고, 그 열린 문을 통해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금방 그것을 배웠다. 언제라도 닫혀진 하늘의 문은 우리가 기도하면 즉시 열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야곱이 엄마곁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거의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형 에서의 자유분뱡함에 비하면, 엄마의 치마폭에서 놀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어머니와 짝자꿍하여 장자의 축복까지 빼앗아버렸기에, 형 에서의 분노를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엄마는 하루 아침에 두 명의 아들을 잃을 수 없다고 하고는, 자신의 오빠(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의 집에 자기의 아들 야곱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잠시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무려 20년이나 되었고, 야곱이 다시 돌아올 때에는 어머니 리브가는 이미 죽고 없었다.

  어찌되었든 야곱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창32:10), 또 한 손에는 다치면 바르기 위한 기름 한 병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창28:18). 그리고 밤이 되었을 때에, 야곱은 돌로 베개를 삼고 잠을 잤다. 그런데 꿈에 하늘에서부터 드리워진 사닥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위아래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사람이 드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바치고 기도응답을 가지고 오던 천사들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무엇인가를 수행하러 내려가고 내려오는 천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닥다리 꼭대기를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 계셨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야곱에게 그의 부모와 조부모에게 약속하셨던 것으로서, 땅과 자손의 축복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가 다시 벧엘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며 그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창28:15). 그런데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야곱이 받은 여호와의 말씀은 훗날 그에게 그대로 전부 실현되었다. 즉 외삼춘 라반이 야반도주하던 야곱을 죽이려고 쫓아왔을 때에 꿈에 야곱을 죽이지 못하도록 라반을 꾸짖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는 자신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는 기별을 받았으나, 야곱도 하나님께 밤새도록 씨름하듯 기도함으로 하루 아침에 달라진 에서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얍복강의 기도로 인하여, 에서는 이제 딴 사람이 되어 야곱과 야곱의 가족과 가축을 보호해주는 보호자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열린 문을 통해 영적 세계의 통치가 물질 세계에 임하니, 아무도 야곱을 헤치거나 상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그를 둘러 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잠을 자던 돌베개 위에, 자신이 가지고 온 기름을 붓고는 "두렵도다. 이곳이여, 왜냐하면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요, 이 자리는 하늘들의 문이기 때문이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서원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그 땅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으니 그날이후 그 땅 이름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의 "벧엘"로 바뀌게 된다. 야곱의 부모의 기도를 통해 닫혀 있던 문이 열려졌고, 또한 그 문을 통하여 하늘의 통치가 그말 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삼촌 라반에게는 야곱이 있을 때, 갑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야곱이 손대는 모든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시고 그와 동행하시며 그를 떠나지 아니한다고 하셨기 대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두 명의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을 봉사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6년을 일했지만 품삯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하나의 제안을 한다. 유전학적으로 절대 잘 태어나지 않을 양과 염소가 나타면 자신의 품삯으로 달라고 것이었다. 얼씨구하 하고 외삼촌은 허락했지만 왠 걸, 실하고 튼튼한 것은 다 야곱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유전법칙을 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임재가 그에게 있으니 세상의 유전법칙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렇다.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야곱은 큰 축복을 받았다. 지팡이 하나 들고 얍복강을 건너왔지만,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두 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인 네 명에, 자식 12명이나 얻을 수 있었다. 자손번성과 가산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야곱은 이 땅에서 하늘의 영적 세계의 능력들을 맛보았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비록 꿈이었지만 사닥다리환상을 보았고, 서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영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신실한 약속을 받았는데, 그 약속은 그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행되어졌다. 곧 자신의 부친 이삭의 기도를 통해 벧엘의 체험을 했던 야곱은 혼자서 형 에서의 문제를 처리해야만 했을 때, 그는 얍복강가의 나루에 남아서 밤새도록 철야기도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만이 진정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저마다 한계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능력밖의 일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셋째하늘에 전능자가 계신다.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은 그분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 오순절 이후 성령을 모신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기 때문이다(고전3:16).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지금도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다. 찬찬히 살펴보면 바로 그런 자들이 성경책에 기록된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우리도 믿음과 기도를 통해 하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은 그러한 명당자리가 따로 있는 줄 알았으나, 신약에 들어와서 그것은 기도하는 믿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결국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 공간이 되며 동시에 열쇠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전3:16). 그렇다면 지금 나는 니므롯처럼 하늘의 문을 침범하려고 시도하는 인본주의적인 인물인가 그렇지 아니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오게 하는 신본주의 인물인가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다 후자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1년 01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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