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40) 아라비아로 간 사울은 3년간 그곳에서 무엇을 했을까?(행9:23~25)_2022-09-14(수)
https://youtu.be/ecNWyxq8v50 [혹은 https://tv.naver.com/v/29303273 ]
1. 사울은 어떻게 되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는가?
사울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죽이던 자였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에 예수는 율법을 어긴 자였고 그래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신21:22). 그러므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헛소리를 하는 자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열심과 출세욕이 매우 강했던 사울은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더 먼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에 넘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길을 가던 중에 부활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 그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된다. 그러자 그는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2. 변화된 사울의 마음에 남아있는 의문은 무엇이었는가?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때로부터 약 4~5년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서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그분을 생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분은 분명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죽었으면 두 번 다시 생시에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했다. 그리고 스데반을 비롯한 예수믿는 성도들의 고백과 같이 그분은 약속된 그리스도이신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분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분은 율법의 저주의 선고를 받고 죽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분이 다시 살아나서 자기 앞에 나타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더이상 힘이 없어져버렸다는 말인가?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데, 이러한 심판도 그분에게는 소용이 없었으니 이게 어찌 될 일인가? 사울은 자신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했다.
3. 마음에 남아있는 의문을 풀기 위해 사울이 선택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마음에 남아있는 의문을 풀기 위해 사울은 다메섹을 곧이어 빠져나간다. 그리고 사도행전 9:23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날이 지나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만 보면 며칠이나 몇 달만 지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상당한 시일이 지나갔음을 일러준다. 왜냐하면 ""충분한 날들이 충만하게 된 채 있을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에게 상당한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그런데 그후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유대인들이 이제는 사울을 죽이기로 적극적으로 의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자 사울은 그의 제자들의 손에 의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달아내린 후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주목할 문구는 '그의 제자들'이라는 말이다. 아니 며칠이나 몇 달 새에 사울에게 제자가 생길 수가 있는가? 하지만 이 모든 궁금증을 한꺼 번에 해결해줄 다른 성경 본문이 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의 말씀이다. 여기에 보면, 사울은 다메섹 변화 이후 아라비아로 갔다고 나온다(갈1:17). 그리고 거기에서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후에,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때 유대인들과 아레다왕의 고관(방백)이 사울을 잡으려했기에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피신했다고 나오고 있는 것이다(갈1:17, 고후11:32~33).
4. 사울은 왜 아라비아로 갔으며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사울은 왜 그때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의 대표인 '베드로'를 만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간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주님의 계시를 따라 간 것이거나 아니면 그의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해결하고자 시내산으로 스스로 간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시내산은 아라비아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갈4:25).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불리는 그곳은 처음에는 '아라비아'였'다. 그런데 원래 그곳은 나베테아 왕국에 속해 있던 땅이었다. 바울 당시 나베테아 왕국은 아레다 왕(B.C.9~A.D.40)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바울이 다메섹을 떠난 뒤 3년 뒤에, 아레다 왕의 고관이 바울을 잡기 위해 쫓고 있는 장면이 성경에 나온다(고후11:32~33). 그간에 바울에게 정치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베테아 왕국이 멸망당하고 아라비아 땅이 되어, 세 가문에 의해 서로 다투고 싸우던 아라비아 지역은 1932년경 사우디 가문에 의해서 통일이 되니,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김승학 장로님('떨기나무"의 저자)과 미국의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에 의하면, 아라비아 땅에 시내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때에 시내산에 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장소를 찾아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지닌 한계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또 숙고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한 것이다. 그래서 3년동안 자신이 깨달은 것들을 제1차 전도여행 후에 갈라디아서에 남겨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비아의 방문과 그때에 바울이 깨달은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꼭 한 번 읽어보아야 한다.
5. 삼 년 후 깨달은 율법의 한계는 무엇이며,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왔는가?
바울이 3년 후 깨달은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것의 한계을 깨달은 것이었다. 바울은 이때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법함에 따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법에 더하여 주신 것으로서, 모세를 통해 베풀어주신 것인데, 이는 약속하신 자손 곧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만 주어진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3:19).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결국에는 죽이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예수께서 저주를 받아 죽으셨던 것인가? 그것은 그분이 인류의 저주를 대신 받아서 죽으시기 위함이었다(갈3:13). 하나님께서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사람되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예수께서는 정작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저주를 대신 받고 율법의 저주에 묶인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함이었 것이다(갈3:13).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사람은 율법의 한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예수님에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는 어떤 사람도 의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분으로 인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고 자유롭게 되며, 의롭다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율법과 믿음에 관한 진리였다.
2022년 09월 14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