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33) 사울은 훗날 자신의 영적인 무지를 어떻게 고백하였나?(행8:1~3)_2022-08-18(목)

by 갈렙 posted Aug 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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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ME5nqv_Jn8Q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3) 사울은 훗날 자신의 영적인 무지를 어떻게 고백하였나?(행8:1~3)_2022-08-18(목)

https://youtu.be/ME5nqv_Jn8Q  [혹은 https://tv.naver.com/v/28646544 ]

 

1. 청년 사울은 왜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는가?

  청년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은 한 마디로 그의 영적인 무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훗날 과거 자신의 영적 무지를 시인하고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영적인 무지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고 회당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비방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이다(행8:3, 9:1~2, 22:4~5, 26:11). 

 

2. 그는 훗날 자신이 유대교에 있었던 때를 어떻게 고백했는가?

  그가 변화되어 첫 번째로 선교여행을 다녀와서 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그가 과거 유대교에 있을 때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갈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파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동년배)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들]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몰랐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며, 율법을 무시하는 그들은 분명 잘못된 자라들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니 하나님이 계시고 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조상들의 전통들에 대해서도 매우 큰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무시하고 정결법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들 곧 율법을 무시하고 전통을 무시하는 예수 믿는 이들을 처단하여 반드시 본 때를 보여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선교여행을 하면서 맨 처음에 세웠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게 자신의 과거의 고백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이다. 

 

3. 사도 바울이 몰랐던 첫 번째 영적인 무지는 무엇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훗날 자신이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잘못 행했던 것을 고백하였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중점적으로 나온다. 

  먼저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못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가기 위해 주어진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을 깨달은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 앞으로 나아가 그분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잘못된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430년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갈3:15~17). 고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주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범법함으로 중보자인 천사의 손을 빌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갈3:19). 다시 말해, 율법은 종인 천사를 통해 주어졌으니 율법은 종의 법이며, 믿음의 법은 아브라함의 씨인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니, 아들의 법인 것이다. 고로 율법을 지키면 종이 되는 것이고, 믿으면 아들이 되는 것이다. 셋째, 율법은 임시로 주어진 법이기 때문에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이다(갈3: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법을 주셨지만 믿음은 사라지고 육체적인 할례를 중요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죄를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넷째, 율법은 정죄하는 법이지 살게 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갈3:21). 하나님은 율법을 생명의 법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섯째로,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여 죄인으로 만드는 법이며, 믿음의 법은 예수님을 믿음을 용서받게 살게 하는 법이다(갈3:26). 여섯째,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지 장성한 자를 계속 율법 안에 가둬놓기 위해 주신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갈3:24). 고로 믿음이 온 후에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율법은 종노릇하게 하는 법으로서 정한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이다(갈4:1~3). 일곱째, 율법은 자체 의로운 것일지라도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갈4:9). 율법은 종의 법이라 사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서워서 지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셔서는 상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믿음의 법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상이 뒤따라 온다는 것이다. 결국에 여덟째, 율법은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모형에 해당할 뿐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골2:17). 그렇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임시로 주어진 임시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임시법인 율법을 그만 실체인 줄 알고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 아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인 것을 깨달았으면 약속의 씨인 예수님을 붙잡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4. 율법이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율법이 '모형'이요 '그림자'라는 것은 율법은 실체이신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는 예표요 상징들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모세가 기록했던 모세 오경 곧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은 다 예수님인 누군지를 알려주는 모형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말씀' 및 '빛'과 '생명'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은 둘째 아담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표상이며,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인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이나 성막법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실 예수님에 대한 모혐이요, 민수기 21장의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뱀은 자신은 죄가 없지만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시어 장차 십자가 위에 매달려 죽으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에 나오는 속죄일 제사의 아사셀 양은 우리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죽으실 예수님이신 것이다. 

 

5. 사도 바울이 몰랐던 두 번째 영적인 무지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사도 바울이 몰랐던 두 번째 영적인 무지는 그로 하여금 교회를 잔혹하게 핍박하고 파괴하였던 결정적인 이유였는데 그것은 그가 한 분 하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철저히 율법교육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또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신론으로 가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능욕하는 일이며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신으로 믿는 교회를 가만 놔 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냥 놔 두었다가는 유대교가 다신론화 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그가 바리새인 교육을 통해 구약성경을 달달달 외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박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눈은 여전히 구약과 유대교 안에 감겨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분이라는 것을 숫자적인 하나로 생각했기에 하나님은 결코 둘로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장차 아들로 갈 것이라고 말씀을 주셨다(창18:10,14).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한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것임을 분명하게 예언을 하였다(사9:6). 그리고 그가 와서 고난받고 죽으실 것도 예언되어 있다(사53장, 시22편). 그러나 그의 눈은 감겨 있었기에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야말로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은 주 하나님이셨던 것이다(롬9:5). 그러자 그는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신약성경의 절반의 기록들이다. 

 

 

2022년 08월 18일(목)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