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우리 인간에게 복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건강하게 사는 것, 자녀가 잘 되는 것, 사업장이 번창하는 것... 이 모두가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맨 처음에 말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신 풍요를 누리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에덴동산을 풍요의 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노동을 하지 않았던 되었던 것인가요? 그리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 왜 그에게 고통이 되었으며 저주가 된 것인가요? 그리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에덴동산에 관계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무엇이 복이며, 우리가 받은 복은 과연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만들어주신 에덴동산은 어떠한 동산이었나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후,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아담을 그 동산에 두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담에게 그 동산에서 살게 하려고 동산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는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나무들이 나게 하셨는데, 그 동산의 한 가운데에는 생명나무과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그 동산을 후대 사람들은 "여호와의 동산"(창13:10)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하나님의 동산"(겔28:13)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산은 풍요로운 동산이었고,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기 때문입니다.
3.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냈나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결코 놀거나 빈둥거리지 않았습니다. 실은 에덴동산은 놀고먹기 위한 그러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살 때나 혹은 범죄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에덴동산 밖에서 살 때, 아담은 땅을 일구어 경작해야 했습니다(창2:15, 3:23). 고대 한자를 보더라도, 에덴동산에서 일하는 남자로서 아담이 그려져 있으며(男), 에덴동산에서 한 사람 아담이 땅을 일구어 가꾸고 있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園).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복(福)이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에덴동산이 풍요의 동산이요 축복의 동산이라 불리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은 풍요의 동산이요 축복의 동산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그것은 3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에덴동산은 다른 지역의 땅에 비해 항상 물이 풍성했기 때문입니다(창2:10). 에덴동산의 바깥쪽은 사실 내리는 비에 의존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땅에 비를 내려주지 아니하시게 되면, 그 땅은 척박한 땅이요 메마른 땅이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의 땅을 달랐습니다. 땅 속에서 물이 솟구쳐 올라와서 에덴('평원'이라는 뜻)을 흘러서 동산을 적시고 동서남북으로 흘러내려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정말로 풍성했고 소용돌이 치며 급류를 만들어 내려갈 정도였으니, 흘러가는 곳마다 땅을 기름지고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사람들은 물이 넉넉한 장소를 일컬어 "에덴동산"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창13:10).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솟구쳐 올라온 물은 사실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은 하늘에 있는 에덴동산을 본 따서 이 땅에 만들었는데,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보좌에서 물이 흘러나왔고, 그 물은 흘러서 강(생명강)을 이루고 나무들(생명나무)이 자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에덴동산에는 그 물이 넘쳐 흘러서 각종 보석을 산출해내었기 때문입니다(창2:11~12). 동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네 개의 강을 이루었는데, 첫번째 강이 이름은 비손 강, 두번째 강의 이름은 기혼 강, 세 번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 강, 네 번째 강의 이름은 유브라데 강이라고 불리었습니다(창2:11~14). 그런데 첫번째 강이었던 비손 강에서 소용돌이 치며 내려가는 묽은 곳곳마다 각종 보석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정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사실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의 재료들입니다. 고로 성령의 흐름이 있는 곳에서는 천국집의 재료들이 산출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풍요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셋째, 에덴동산에는 사람의 영혼을 살려줄 수 있는 생명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만을 가진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육체와 더불어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에게는 처음부터 영혼을 위한 생명이 들어있는 채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형태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을 채우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처음 인간에게 생명은 생명나무의 과일의 형태로 에덴동산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사람도 하나님처럼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사람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 그곳을 축복의 동산, 풍요의 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5. 에덴동산이 계속해서 축복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축복의 땅인 에덴동산이 아담에게 계속해서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첫째는 에덴동산을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창2:15a). 아담은 에덴동산을 일구어서 그것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야 할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이나 범죄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주신 축복들을 잘 간직해야 했습니다. 사실 에덴동산은 모든 복의 근원이요 그 복을 흘려보내는 동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에덴동산을 잘 지키는 일입니다(창2:15b). 에덴동산은 울타리가 쳐있는 장소였습니다. 특히 거기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는 장소였기에,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에게 생명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물질적인 풍요보다도 그 동산 한 중앙에 있는 두 나무를 잘 지키는 책임이 아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선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끝내 에덴동산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뱀은 배로 기어다니는 파충류가 아니었던 들짐승이었습니다. 가축이 아니라 네 말로 다니는 숨쉬는 야생 짐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놈이 에덴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함에 따라 하와가 그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고 자신의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불행의 시작이요 저주의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6. 내게 있어서 에덴동산은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예수믿는 자들에게 에덴동산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사실 에덴동산은 이제 우리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 마음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생명나무를 의미하며, 성령은 에덴동산을 적시는 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도 호시탐탐 우리의 마음을 침범해 들어오기 위해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침범해 들어간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침범해 들어오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는 말했습니다.
전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7. 나오며
사람에게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마련해두신 풍요의 동산이요 축복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에는 물이 풍성하여 모든 먹거리가 풍족했으며,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귀중한 보석을 산출해내는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은 영혼을 위한 영원한 생명까지 준비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관리하여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주신 복을 지키지 못하면 복은 내 것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덴동산을 침범해들어오려는 유혹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집어삼키려고 노리는 마귀를 우리는 물리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가 받은 복은 지켜질 수 있으며 영원히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021년 03월 01일(월)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