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08) 하나님의 성전 훼손 경고와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책망(고전3:16~4:21)_2021-05-12(수)

by 갈렙 posted May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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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XlM2mqJBUso
날짜 2021-05-12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3:15~4:21(신약 26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하나님의성전훼손,교회분열원인,사역자판단금지,사도들의겸손,고린도교인들의교만,바울의부성애적권면,말과능력,하나님의나라,교회분열치유책,

 

고린도전서 1~4장까지의 이야기는 교회의 분열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를 다루는 본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교회의 분열과 분파문제를 다루었던 것일까? 그리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그 기저에 무엇이 깔려져있는가? 바울은 이제 교회의 분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그 기저에 숨어 있는 문제를 끄집어 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처리한다. 바울이 끄집어올려 분쇄했던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한 교회의 분열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목적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다. 바울은 이 편지 전에도 어떤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전5:9). 그 편지를 통해서 보더라도 고린도교회에는 여러가지 산적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전에 보냈던 고린도전전서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 편지에 어떤 내용이 실려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때의 편지를 통해 그들의 문제들을 파악하였고 그들이 진정 해결받고자 하는 문제들과 새로 발견된 문제들을 바로잡고자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보낸 고린도전서를 보면 고린도교회에는 당시 적어도 10가지 이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중에서 오늘 다룰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 다루고 있는 첫번째 문제로서, 분쟁과 분열에 관한 문제다. 고린도교회가 교회사역자를 중심으로 여러 분파들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나누는 것으로서 한 몸 안에 여러 지체들을 아프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처음 4장을 할애했다. 그래서 그중에 오늘은 교회의 하나됨을 해치는 가장 기저에 숨어있는 고린도교인들의 교만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분열의 깊은 내막에 들어있는 교만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일까? 어떻게 그들을 책망하여 그들로 하여금 겸손케 만들어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2. 고린도전서 1~4장의 내용은 대체 무슨 내용인가?

  바울은 서두의 인삿말(고전1:1~9)을 필두로 하여 곧바로 교회의 분열과 분쟁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교회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1:10). 그런데 바울은 들은 소문에 따르면 고린도교회는 이제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나뉘어서 서로 분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보낸 사역자들이 어떻게 분파의 중심에 서 있게 되었는지를 질문하면서, 교회를 사역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분열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그들의 공통분모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만을 추구한다면 교회의 분열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거리끼는 것이며,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사실 이것만이 교회의 분열의 아픔을 치유하고 하나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처방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다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와 사탄귀신들, 세상과 육신, 옛사람과 자아, 율법과 옛창조, 사망과 저주 등의 소극적인 것들을 다 끝내셨기에, 십자가의 도를 붙잡고 나아갈 때 비로소 그들의 분열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진정 깨우쳐 주실 분은 성령님이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붙여준 사역자를 존중 이상으로 높이 받들거나 그들을 대상으로 분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사역자들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붙여준 하나님의 일꾼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다 자기에게 주어진 파트를 담당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이들이므로, 각기 자기가 일한대로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건축가가 그리스도라는 터(기초)위에 교회라는 건축물을 세우게 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워간다면서, 혹 자기자신의 이름을 내는 건축물을 짓는다면 그것은 훗날 심판 때에 그 어떤 것도 계산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수고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날에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그날 그들의 공적을 불로 시험할 것인데, 불에 의해 타버리는 재료들 곧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건축물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속성들에 의하여 세워진 건축물 곧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건축물만이 그때 남겨짐으로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지난 주까지의 전한 말씀의 핵심들이다. 

 

3.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가?

  바울은 복음사역자들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한 뒤 이어지는 본문(고전3:16~17)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의 성전으로 예표되었던 하나님의 교회가 만약 자신을 더럽히게 되면(부패시키거나 못쓰게 만들거나 파괴시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파멸"이란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을 포함하는 용어다. 이러한 사상은 곧이어 등장하는 여러가지 문맥들 곧 고린도전서 6장과 9장과 10장과 11장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나온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에서 절대 탈락하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성경적인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문맥을 보지 않았거나 구원에 관한 본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한글성경만 보았을 뿐, 헬라 대문자사본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주장일 것이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믿는 분들이 있다. 믿는 것이야 자유이겠지만... 혹 그러한 분들 중에는 고전3:15의 말씀이야말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는 구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5)"고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혹시 상을 받지 못할 수는 있어도,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이들의 주장은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건축자들 곧 사역자들에게 대해서 바울이 했던 말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무렵(A.D.53~58)에는 아직 거짓 사도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는 때가 아니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에 이어 아볼로 사역했던 교회로서 아직 그러한 사역자가 나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고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심었고 아볼로가 물을 주기까지는 했지만, 이제 그 위에 진짜 건축물을 세울 사역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바울이 고전3:15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이미 타락하여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한 채 교만함에 가득차 있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기에, 바울은 만약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계속해서 더럽힌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파멸시키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며, 앞뒤는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까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구원과 상급에 관한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다루게 될 주제이니만큼 그때 가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4. 성도가 사람 곧 교회의 사역자들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어서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의 꾀(교활함)를 지적한다(고전3:18~20). 주님께서는 이러한 지혜는 헛 것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높이기 위해 괜히 사역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바울과 아볼로 등을 사역자로 주신 것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주신 것이지, 그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를 높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오늘도 사역자들을 붙여주신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경험하게 하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 교회는 성숙해져야 하고 성장해나가야 한다. 고로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붙여준 사역자들을 통하여 온전한 교회가 되기를 힘써야 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을 자랑하기 위해 사역자들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붙여준 일꾼이라는 것을 알아야 햔다. 그리고 교회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전3:23).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사역자들을 구실로 자기 자랑하기를 그쳐야 하는 것이다. 

 

5. 교회의 사역자들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교회의 사역자들은 어떤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누군가 교회에서 사역자로서 수고할 때에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 바울은 교회의 사역자들은 2가지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사환)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라는 것이다(고전4:1). 여기서 "사환"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라는 것으로서,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은 쇠사슬에 묶여서 죽는 날까지 노를 젓는 일만을 하는 비참한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일에 충성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들은 언제든지 제거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나중에는 좀 더 확장되어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자로서 쓰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휘페레테스)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사역자들은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 속에 감추어있는 구원의 놀라운 비밀을 가리킨다. 그것은 말씀연구와 기도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빛비춤을 받을 수 있는 것인데, 교회의 사역자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말씀에서 이러한 말씀의 진리를 찾아내어 전달해주는 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가 단에서 내려가서 있을 때에는 마땅히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교회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종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성도들은 그를 이리저리 판단하게 되고 그를 조종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사람의 눈치를 보다보면 말씀의 본래적인 뜻을 전달 못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또한 자기도 자기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판단은 주님의 평가에 비해 불완전하며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며,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의 평가에 주의를 기울이다보면 자칫 그리스도의 사환이나 하나님의 말씀맡은 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판단할 터이니, 그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한 채, 자기에게 수여된 사명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왜 사도는 이런 말을 고린도교회에게 쓰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사역자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린도교인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역자들을 이리저리 판단하다 보면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붙여준 사역자들을 자기들 맘대로 요리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사역자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6.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만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이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담임하면서 자신과 아볼로는 성도들에게 어떤 본을 보였는지를 말한다. 둘은 결코 서로 경쟁하거나 서로를 비방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고전4:6). 다만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역설적인 화법으로 지적한다(고전4:7). 그들이 받은 언변이나 지식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바울과 아볼로를 통하여 배운 것들인데도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언변과 지식과 은사가 최고라고 자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벌써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바울팀은 언제나 남의 종이 되어서 섬기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심지어 복음을 전파하다가 붙들려서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오물)과 만물의 찌꺼기(때)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바울팀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축복하였으며, 박해를 받으면서도 참았고, 비방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을 전파하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없이 다니기도 하였으며 수고하고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원래 퇴역군인들의 후손으로서 문벌상으로도 보잘 것 없었고, 신분상으로도 보잘 것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통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었음에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 모양으로 자기교만에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은혜로 된 것이지만 원래 자기 것들인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바울팀의 삶과는 전혀 상대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희생한 것도 아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7. 분열에 관하여 바울이 전하는 최종적인 경고는 무엇인가?

  이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아비의 심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은 아니다(고전4:14)"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같이 대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라 했다(고전4:15). 사실 그리스도 안에는 많은 교사들이 있다. 하지만 아비와 같은 교사는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에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을 돌아다보고 반성하라는 것이다.

  이어 바울은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이 더 있지만 보내는 편지 말고도, 따로 보내는 디모데가 있으니, 그를 통해서 자신의 뜻이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혹 어떤 이는 바울이 고린도에 오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주께서 허락한다면 속히 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 잘하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에 다시 나아갈 때에는 과연 매를 가지고 나가게 될른지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영)으로 나아가게 될른지는 그들이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자신들이 가졌던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까지 대신 보내서 진정 그들이 회개하게 될른지를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진 교만함을 단 번에 버린다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의 나이는 약 오십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사도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에게서 때로는 아버지의 엄위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지만 때로는 어머니의 자상한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더불어 복음사역자로서 복음사역에 대한 완전한 변호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바울은 한 편으로는 매우 겸손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결단코 무엇인가를 누리고 살려고 하거나 스스로 왕노릇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진 모든 이권을 내려놓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전해야 할 말복음에 있어서만큼은 늘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복음사역자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교만한 이들에 대해서 따끔한 질책도 아끼지 않았다. 복음사역자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분열의 기저에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분석해내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세 자신이 교만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얼마나 지금 잘못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약 성령께서 그들을 진단할 수 있도록 이러한 지혜를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그들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가 있었겠는가? 기도의 사람이자 성령의 사람으로 사도바울은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교회의지킴이다. 이제 끝으로 그는 고린도교회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위치와 성령의 지혜를 가지고서 그들의 분열의 문제를 일단락 짓는다. 그리하여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사라지게 된다. 

 

2021년 05월 12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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