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63) 할례의 멍에에서 회개와 예수의 흔적으로(행15:10~11, 갈6:11~18)_2022-11-04(금)

by 갈렙 posted Nov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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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V6nfCmPuFIw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3) 할례의 멍에에서 회개와 예수의 흔적으로(행15:10~11, 갈6:11~18)_2022-11-04(금)

https://youtu.be/V6nfCmPuFIw  [혹은  https://tv.naver.com/v/30583230 ]

1.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에서 인정받은 구원관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A.D.49년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총회에 가서 인준을 받았던 구원관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람이 구약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는(칭의를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러 오시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으며,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성령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2. 할례파 믿는 이들이 주장한 구원관은 어떤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어떤 성도들이 새로운 구원관을 주장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만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킨 후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행15:5).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이 불가능하고, 먼저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또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유대인이 된 후에야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서 잘못된 주장이라고 결론이 난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행15:10~11). 다시 말해, 예수님도 믿고 다른 어떤 행위들이 추가되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3. 사도 바울은 훗날 이러한 구원 문제에 대해 갈라디아서에서 어떻게 말했는가?

  사도 바울은 훗날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한 경험을 갈라디아서에 기록해 놓았는데(갈2:1~5), 그는 여기에서 사람이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부터 받는다고 하였다(갈3:2,5). 즉 사람이 의롭게 되고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듣고 그분을 믿을 때에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는 '칭의'도 얻고 성령을 받아 '영생'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성도들에 의해서 율법 무용론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으니, 이제 이방인으로서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령 내가 살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자신에게 결코 죄가 되지는 아니하며, 그것이 또한 자신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한 번 구원을 받았으니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생각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4.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지적한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필요없다'라고 하는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율법의 행위'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의 2가지 기능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갈3:24). 다시 말해, 누구든지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배우게 되고 그분을 믿고 따라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율법 중에서도 의식법들에 해당한다. 즉 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음식법, 정결법, 제사법 등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율법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롬3:20). 이것은 율법 중에서 도덕법(십계명법)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든지 십계명의 조항들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것들의 실체가 되심으로 결국 이것들은 다 폐지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은 우리가 지키지 않아도 그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 중에서 도덕법(십계명법)은 다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십계명을 어기면 여전히 그것은 죄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누군지가 나오는데, 그들은 바로 주님을 부인하였던 비겁한 자나 믿지 않는 자 외에는 전부 다 십계명을 어겨서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했다(계21:8).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십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중에서 폐지된 것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만 해당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유효한 것은 도덕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언급하였던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또한 절기를 지키고 음식을 가려 먹는 등의 의식법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왜 율법의 행위는 성도들의 구원과는 무관한 것이 되는가?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으니, 자신은 구약의 율법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설령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구원받는 데에 그것이 자신에게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후, 혹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자신이 우상숭배하는 죄까지 다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으니 자신의 죄가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어도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여전히 그것은 죄가 되며,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면 결국 그는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가 죽는 날 생명의 성령이 그만 그를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최소 새 예루살렘 성 밖에 거주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까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여정에 들어온 자라도 십계명을 어긴 죄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것을 회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마음으로 지은 죄라도 회개해야 한다. 살인은 안 했어도 미워했으면 살인한 것이 되기 때문이요, 실제 간음을 행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다고 하면 그것이 간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어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즉 물질 같은 것을 탐냈다면 그것도 역시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다(골3:5). 그러므로 성도들이 정말 진실로 힘써야 할 것은 '회개'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불못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어도 회개하지 못해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서 면류관 얻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그는 주 예수님과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받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돌에 맞았던 상처를 가리켜 '예수의 흔적'(갈6:17)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천국에서는 영광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과연 주와 복음을 위해 힘쓴 흔적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는 천국에서 해와 달과 별처럼 빛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2022년 11월 04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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