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66) 바울과 바나바, 누가 양보했어야 했을까?(행15:36~41)_2022-11-10(목)

by 갈렙 posted Nov 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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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DmB5y8J_4K0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66) 바울과 바나바, 누가 양보했어야 했을까?(행15:36~41)_2022-11-10(목)

https://youtu.be/DmB5y8J_4K0 [https://tv.naver.com/v/30676703 ]

 

 

1. 교회나 선교 단체가 분열되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교회나 선교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다가도 어느 날 분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더 활성화하기 위해 기도하고 합의하여 서로 나눠서 일을 진행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서로 싸운 끝에 분열하고 갈라지는 것을 두고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바나바와 바울의 분열은 사실 싸움으로 인한 것이므로 결코 잘한 일 혹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둘 다 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고 1차 전도여행을 함께 떠났던 바나바와 바울은 왜 피차 갈라서게 되었을까?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극찬까지 해 주었던 선교사들인데, 왜 이 둘은 피차 서로 싸워 갈라서게 된 것인가? 그것은 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할 때, 과연 누구를 수행원으로 둘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때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선교하는 일을 함께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떠나가 버린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은 결코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둘 사이에서 격심한 불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갈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떠났고,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실라를 데리고서 육지를 통해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남 갈라디아 지역(더베, 루스드라)으로 떠나갔다. 

 

3.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된 내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마가 요한을 수행원으로 데려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진짜 속내는 그들의 고집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끝까지 주장하고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 아닌 다른 것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옳을 수도 있으며 저것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자기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의 결정을 성급히 행동으로 옮겨 버렸다. 같이 갈 수 없다면 따로 선교하자고 하면서 곧바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4. 누가 양보해야 했을까?

  그렇다면 이때는 누가 양보해야 더 옳았을까? 안디옥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바나바가 그 교회의 선임이며 또한 안디옥교회의 대표이니까 뒤에 들어왔으며 그것도 바나바에 의해서 들어온 바울이 양보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싶다. 그러나 선교 현장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이라면 바나바가 바울에게 양보하는 것이 더 옳게 보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1차 전도여행 때에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선교했는지를 살펴보면 해답이 금방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1차 선교여행 때에 거의 모든 선교 사역을 거의 다 바울이 감당했다. 구브로에서 서기오 바울을 전도한 것도 바울이었고,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회당 설교를 했던 것도 바울이었으며, 이고니온에서는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했고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 걷지 못한 자를 고친 것도 다 바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받고 거의 죽음에 넘겨졌던 것도 바울이었다. 이처럼 바울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한 자였다. 그러므로 이번 여행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중간에 힘들다고 돌아가 버렸던 마가 요한을 또 데려가느냐 하는 것은 바울에게 탐탁지 않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 현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나바가 바울의 의견을 경청했어야 옳아 보인다. 그러나 이 둘은 끝까지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5. 이 사건이 보여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3가지 교훈을 터득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허물 많은 형제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도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선교 열정으로 본다면 누가 감히 바울의 열정을 따라가겠으며, 포용력과 온유함으로 따진다면 누가 바나바를 따라가겠는가?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그것이 서로에게 바르게 표현되지 못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간에 고집을 피웠고 양보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둘이 서로 충돌했을 때에, 왜 둘은 그 문제를 잠시 내려놓고 둘 다 금식하면서 기도해 보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기다리지 못한 채 성급히 길을 떠났어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조급함이 그들에게 문제라면 문제였던 것이다. 셋째, 비록 인간의 부족함이 있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마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론적으로 볼 때, 선교 팀이 둘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한 바나바는 이 일로 인하여 훌륭한 선교사인 마가 요한을 배출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가 요한은 이 선교 활동을 통해 선교 현장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래서 훗날 베드로의 헬라어 통역사가 되어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그에게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마가 요한을 '내 아들'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벧전5:13). 그리고 사도 바울도 나중에는 마가 요한을 자신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를 귀하게 보았기 때문이다(딤후4:11). 그리고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모교회인 안디옥교회의 후원 없이도 자비량으로 선교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혹 악함과 단점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여기서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22년 11월 10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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