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107)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이 들려주는 인생과 신앙의 깨달음(창23:1~20)_2023-02-20(월)

by 갈렙 posted Feb 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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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DJUuy1HIYmc

2023-02-20(월) 온라인새벽기도회

제목: 창세기강해(107)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이 들려주는 인생과 신앙의 깨달음(창23:1~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DJUuy1HIYmc

 

1. 창세기 23장은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가?

  창세기 23장은 사라의 죽음과 아울러 사라의 매장지를 구입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2. 창세기 23장은 왜 한 여인의 죽음과 그 여인의 나이까지 기록하고 있는가?

  창세기 23장은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나이가 127세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경 66권 가운데 한 여인의 죽음이 주제로 등장하는 본문은 처음 나오는 일이거니와 또한 여자가 몇 세에 죽었다고 하는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기자는 한 여인의 죽음과 관련된 정보를 이렇게 자세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죽음 및 매장과 관련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이 있기 때문이다. 

 

3. 사라의 죽음이 말해 주는 인생의 깨우침은 무엇인가?

  사라의 죽음이 가르쳐 주는 것은 사실상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이 번제로 드려진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쳤던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브엘세바'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때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창22:19). 그런데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는 브엘세바가 아니라 '헤브론'에서였다. 그러니까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과 사라가 죽은 사건이 어느 정도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삭이 번제로 드려졌던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삭이 25세 정도에 바쳐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야살의 책이나 미드라쉬에서는 그가 37세에 바쳐졌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야살의 책의 기록이 정확한 정보라면, 이삭이 번제로 바쳐진 직후 사라가 사망한 것이라고 우리도 추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의 문맥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 주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사라의 사망 시점에 관한 정보다. 이삭이 번제로 드려지고 그가 부활 안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려지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에 대한 확정을 끝낸 이후, 사라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고로 사라의 죽음은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의 종료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언제 죽게 되는지에 관하서 여기서 힌트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끝날 때 죽는다는 것이다. 고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사명 찾기). 고로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정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다면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처럼 자신의 사명을 끝마치게 되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 즉 그녀는 '약속의 씨'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이미 얻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두 번 다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라에게는 더 이상의 어떤 사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마감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라의 죽음의 시기에 관한 성경의 비밀이다.

  고로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비전과 사명을 놓치지 않고 꼭 붙잡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작정하고 부르시는 그날이 올 때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사람이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은 계속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애굽 왕도 그녀를 데려갔으나 자신의 품에 둘 수가 없었으며, 블레셋의 그랄왕도 그녀를 데려갔으나 그녀를 자신의 품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사명이 있는 여인을 어느 누가 결코 함부로 건드릴 수 있겠는가?

 

4. 사라의 매장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헷 족속에게서 아브라함은 어떤 존재였는가?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라함의 인생에 있어서 그녀는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 든 여인이기 때문이다. 초기에 힘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그녀가 곤궁에 빠졌는데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적이 있었다. 또한 당시에 그녀 역시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씨를 낳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로 아이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그녀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녀를 화장하지 않고 매장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매장지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당시 자신이 살고 있던 땅인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민족 곧 헷 족속의 사람에게서 자신의 아내를 매장할 매장지를 구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나온다. 그리고 매장지를 사려고하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 주는 헷 족속에게 아브라함이 취한 행동이 어떠했는지도 나온다. 한 마디로,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깊이 존중하고 존경하고 있었으며, 아브라함은 끝까지 그들에게 겸손히 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얻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부탁을 했을 때, 헷 족속의 사람들은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의 묘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창23:6)"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는 헷 족속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존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하지만 137세의 아브라함은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겸손히 행했다. 특히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과분한 자비를 베풀어 준 헷 족속을 향하여 겸손히 허리를 굽혀 절로 응답을 한다. 그렇게 나이가 많았던 아브라함이 말이다. 이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통해 그의 인격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당신의 도구로 쓰시려고 다루시지만, 그가 끝내 변화되지 못해 하나님이 쓰시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때 아브라함은 이미 많이 성숙해 있는 것을 본다. 그도 처음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깨닫게 하실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고쳐 나갔다. 그러므로 그가 이제 나이 들어 헷 족속에게서 사라의 매장지를 구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5. 창세기 23장에서 사라의 매장지를 구입하는 장면은 왜 그리 많은 분량이 기술되고 있는 것인가?

  창세기 23장은 사라의 죽음보다는 아브라함이 그녀의 매장지를 헷 족속에게서 사는 장면이 훨씬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창23:8~20).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다는 소식은 사실 딱 2구절(창23:1~2)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매장지를 찾고 그것을 구입하는 과정은 아주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창23:3~7, 8~20). 그것은 창세기 23장 전체가 사라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으로 시작하면, 더 중요한 주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2가지 사명 중에 나머지 한 가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앞의 것은 아브라함이 자손(씨)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얻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이삭의 출생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는 실제적인 문제가 오롯이 남아 있다. 고로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구입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대한 성취가 어떻게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의 자손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 예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 

 

2023년 02월 20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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