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율법관(42)] 성전 봉사자로 일했던 느디님 사람들이 주는 감동은 무엇인가?(에스라2:1~2,36~58)_2024-03-28(목)

by 갈렙 posted Mar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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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그리스도인의 율법관(42)] 성전 봉사자로 일했던 느디님 사람들이 주는 감동은 무엇인가?(에스라2:1~2,36~5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uYENnTiD0wg

 

1. 들어가며

  구약의 인물들 중에서 갈렙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던 여호수아와 더불어 유다 지파의 정탐꾼으로 파송된 자였다(민13:6). 그런데 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믿음의 보고를 한다. 그래서 출애굽 1세대들 중에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딱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민14:38, 26:65). 그런데 그를 소개할 때에 민수기에 보면, '그나스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고(민32:12), 여호수아서에 보면 '그니스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다(수14:14). 한 마디로 그는 원래 히브리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가나안 족속이나 에돔 족속이었는데, 히브리인으로 합류했다가 출애굽을 한 후에는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살펴보게 될 성전 봉사자 중의 하나였던 느디님 사람들도 역시 갈렙과 마찬가지다. 느디님 사람들은 원래 노예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은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떻게 노예의 신분에서 레위 지파의 한 가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이러한 비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감동을 안겨 줄 것이다. 

 

2. 느디님 사람들,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느디님 사람들은 역대상 9:2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 중 제사장 지파인 레위 지파 사람들의 한 부류로 기록되어 있다(대상9:2). 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면 B.C.537년(실제는 551년) 제1차 포로 귀환자의 명단(스2:43~58)과 B.C.458년(실제는 515년) 제2차 포로 귀환자의 명단(스7:7, 8:20)과 B.C.445년(실제는 502년) 제3차 포로 귀환자의 명단(느3:26)에 이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이들의 이름이 알려 주는 비밀은 이렇다. '느디님'이라는 말은 동사 '나탄'에서 온 것이다. '나탄'은 '주다, 바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사역형이자 복수 형태인 '느디님'이라는 말은 '바쳐진 사람들' 혹은 '드려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히 하나님의 성전에 봉사하는 레위인들에게 바쳐진 사람들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럼, 이들은 대체 어떻게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 봉사에 바쳐지게 된 것일까?

  다음으로 이들의 역사는 여호수아 9장으로 넘어간다. 이들은 사실 가나안 땅에 살던 히위 족속의 기브온 거주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소식을 듣고 화친을 맺으러 나온다. 하지만 멀리서 온 것처럼 가장한다.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가지고 헤어진 전대와 헤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포도주 가죽 부대를 나귀에 싣고 여호수아와 화친하자고 찾아온 것이다. 살려만 주시면 종이 되겠다고 한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도 아니한 채 그들을 살려 주기로 조약을 맺는다. 사흘이 지나서 보니 이들은 가나안 중부 지역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호와의 이름으로 약조를 한 터라, 그들을 살려 주기로 하고 그들을 종(노예)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막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긷는 일을 시킨다(수9:23,27).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노예의 1/50이 레위인에게 일꾼으로 주어지는데, 이들도 역시 이 무리에 합류한다(민31:47). 그리하여 생겨난 사람들이 바로 '느디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은 가나안 일곱 족속인 히위 족속으로서 함의 족속 곧 흑인이었다. 

 

3. 느디님 사람들이 성전에서 맡은 직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느디님 사람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맡은 직무는 무엇이었는가? 느디님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집을 위한 노예로 받아들여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성막에서 봉사하다가 다윗시대에 이르자 레위 사람들을 섬기는 성전 봉사자로 아예 분류가 된다(스8:20). 그렇다면 이들이 성막과 성전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첫째, 레위인들을 섬기는 일을 했다(스8:20, 7:24). 그러니까 레위인들이 해야 할 일들 중에서 허드렛일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피로 더럽혀진 그릇을 닦고, 성전 뜰을 청소하는 일 등을 한 것이다. 둘째, 이들은 성전의 번제단에 쓸 나무를 자르고 패는 막노동의 일을 하였다(수9:23,27). 그리고 성전의 물두멍에 물을 길어 채우는 일을 하였다. 그들은 기드론 시내에 가서 물을 항아리에 담아 어깨에 메고 올라와 수레에 실어 성전으로 나르는 일을 한 것이다. 참으로 힘겹고 고달픈 일을 한 것이다. 

 

4. 느디님 사람들이 받게 된 은혜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갑자기 느디님 사람들이 정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종의 신분이었는데 이제는 가문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는가? 그것은 이들이 남유다가 멸망한 뒤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종의 신분으로 영원히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으로 살고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벨론에 끌려간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힘겨운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더 이상 그들을 노예의 신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을 레위 지파의 한 가문으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래서 생긴 가문이 느디님 가문인데,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을 읽어 보면, 그들 가문은 총 39개 가문이었다. 포로 귀환 이후에는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식으로 레위 가문의 한 분파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포로 귀환 때 돌아온 느디님 사람들은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과 제사장의 경우처럼 세금면제 혜택을 받게 된다(스7:24, 느10:28). 느디님 사람들은 다른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처럼 이스라엘 각 지역에 흩어져서 거주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남동부의 오펠(오벨)이라는 곳에서 머물러 거주하였다(느11:21). 항상 땔감나무와 물을 채워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3차 포로 귀환 때에는 느헤미야의 인도를 따라 성벽 건축 공사에도 참여하게 된다(스3:26). 그러므로 포로 귀환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단을 언급할 때에는 꼭 느디님 사람들을 언급함으로서, 이들이 이제는 정식 레위 지파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5. 느디님 사람들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느디님 사람들이 주는 교훈은 실로 놀랍다. 처음 여호수아에게 항복해야 할 때, 자기의 처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 먼저 나아와 기꺼이 종이 될 것을 맹세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레위인들을 위해 종처럼 살았지만 그들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기꺼이 그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들이 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노예 신세였지만, 그래도 그들이 하는 일은 가장 거룩하고 복된 일인 성전 봉사였기에, 자기들도 성전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매우 기뻐하고 감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고라 자손이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한 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느디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 속에서 자유롭게 사느니 차라리 종으로 살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사는 환경보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고된 환경을 더 기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느디딤 사람들은 꼭 예수님을 닮은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자신이었으나 자신을 낮추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막10:45).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6. 장차 천국에서 섬기게 될 자들은 누구인가?

  천국에서 성도들은 딱 두 종류의 직분만 있다. 하나는 왕의 직분으로서 섬김을 받는 직분이고, 또 하나는 종의 직분으로서 섬기는 직분이 있다. 그런데 이때 섬기는 직분은 이 땅에서 군림하려 하고, 높아지려 하며, 항상 자신이 첫째이기를 원하던 자들이 천국에서 들어갔을 때에 받게 되는 직분이다(막10:43~44).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대접을 받으려고만 해서는 아니 된다. 섬겨야 한다. 이 땅에서 섬기는 자는 천국에서 섬김을 받는 자가 되고,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려 했던 자는 천국에서 섬기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섬기는 자들은 자신의 신세를 결코 한탄하거나 비관하지 않는다. 비교 의식은 다 마귀가 주는 것인데, 천국에는 마귀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천국에는 남에 대한 부러움만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천국집을 장만한 것에 대해 부러워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한이 없다. 누구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7. 나오며

  이 땅에서 큰 자는 큰 자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은 후에는 오히려 작은 자가 큰 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이 와서 교만의 영을 집어넣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가 분쟁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죽은 후에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는 자가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성밖으로 내던져질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나쁜 경우는 풀무불 지옥에 떨어질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여도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느디님 사람처럼 이 땅에서 누군가를 섬기며 산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결국 천국의 생명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게 해 주며, 천국에서 상얻고 면류관얻는 자가 되게 해 주기 때문이다. 

 

2024년 03월 28일(목)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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