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회개(19)]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론 과연 합당한 칭의론인가?(눅18:9~14)_2024-06-11(화)

by 갈렙 posted Jun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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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19)]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론 과연 합당한 칭의론인가?(눅18:9~1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zIIoLq2-ZTc

 

1. 들어가며

  일반적으로 오늘날 개혁교회에서 말해지고고 있는 칭의(의롭다 함)란 보통 바울이 언급했던 칭의를 가리킨다. 이는 누구든지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칭의는 칭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언급하기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은 한 번 타면 자동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와 같지 않다. 단계단계마다 어려움이 있으며 각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므로 누구나 거져 얻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한 칭의만을 주목하고 거기에 안주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칭의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믿음의 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의 말씀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해주신 칭의란 대체 어떤 것인가?

 

2. 일반적으로 오늘날에 개혁교회에게 알려진 채 있는 칭의론이란 어떤 것인가?

  오늘날 개혁교회에게 알려진 칭의론은 바울이 말한 칭의론일 것이다. 이는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다(롬3:28. 5:1. 갈2:16). 그러나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믿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했기 때문이다(롬3:23~24). 그렇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가 칭의를 얻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예비해놓으셨다. 그리고 믿는 우리에게 칭의의 옷을 입혀주신다(마22:1~14). 그러므로 칭의를 얻는데 있어서 인간이 수고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칭의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칭의를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것임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엡2:8~9).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롬2:23~24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3.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칭의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에 우리들에게 잘못 알려진 칭의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알려준 칭의관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에 대하여 말씀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떠나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칭의관을 가졌던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바르게 말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칭의를 얻는 것은 '믿음' 뿐만 아니라 통회자복하는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나온다(눅18:9~14).

  그러나 오늘날 개혁교회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칭의를 그대로 붙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칭의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칭의에 관한 말씀하신 것을 믿고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 

 

4.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참된 칭의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들려주신 참된 칭의란 무엇인가?

  어느날 예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하고 생각하고 남들은 멸시하는 바리새인에게 이러한 비유를 들려주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로 성전에 올라갔다고 했다. 먼저 버리새인은 선 후에 자기를 향하여 기도하기를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기는 율법을 어기고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율법을 잘 지키고 있노라고 먼저 고한다. 그리고 그 열심이 얼마나 큰 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라는 조상들의 전통까지도 잘 지키고 있으며, 심지어 곡식 낟알 한 개까지 세어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자신을 자랑하듯이 말했다. 이 정도면 거의 기도가 아니라 자기자랑하러온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달랐다. 성전에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말을 헬라어에서 직접 번역해보면,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속죄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렇다. 그는 나오면서부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시인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아파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18:14). 그렇다. 칭의는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랑하러 온 바리새인이 받지 아니하고, 자신을 철저히 죄인이라고 시인하며 통회자복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만을 바라고 기도했던 세리가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이처럼 믿음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2가지였던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통회자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5. 사도 바울은 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했는가?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했을까? 그것은 당시 유대교의 구원관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지적하면서 교정하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로써가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써라고 언급한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받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율법으로는 다만 자신의 죄를 깨달을 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규정을 사람이 다 지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연구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를 다 찾아내어 정리했는데, 그것은 총 613가지가 된다고 정의했다. 하라는 율법규정은 248가지, 그리고 하지 말라는 율법규정은 365가지이기 때문에, 613가지를 지키면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거기에다가 어떤 규정들은 세부규정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면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규정을 해석하여 어떻게 하면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인지 총 39가지 세부조항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뿐이다. 그러므로 사실 율법을 지키는 문제는 쉽게 지켰다고 정의내릴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조항이 있다. 대체 얼마만큼 부모에게 대우를 해야 부모를 공경한 것이 되는가는 사실상 아무도 정의내릴 수 없다. 하루에 한 번 문안인사를 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지, 일년에 한 번 외식을 시켜줘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율법전부를 지키며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자기의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말했다(롬3:20).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그러한 율법조항을 다 지키고 세부조항까지 다 지키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들은 조항만 지키면 다 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율법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무시하고 있었다. 조항만을 지키면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행한 일들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시인하지 않는 자에게 구속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철저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통회자복하지 않는 자에게 주님은 칭의의 옷을 입혀주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깨끗한 옷을 입고 있다고 자랑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피가 묻은 칭의의 옷을 입혀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온 인류를 죄를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결코 칭의의 옷을 입혀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오직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통회자복하면서 예수님의 피만이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믿을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칭의의 옷을 건네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루터는 종세의 로마 카톨릭 신부였다. 그래서 그는 중세의 교리를 통해 구원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중세의 구원 교리는 주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루터는 자신도 구원을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금식도 해 보았고, 거지 성지순례도 해보았고, 고행을 위해서 비텐베르크 성당의 계단을 무릎을 걸으면서 한 계단씩 올라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죄는 더욱더 자기를 짓눌렀다. 그러다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강해를 하면서 성경 원문을 주교로부터 받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읽는 중에 깨달았다. 사람의 의롭게 되는 것은 선행이나 헌금, 구제와 같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얻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잘못된 중세교회를 향해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였다. 그러나 중세교회에 대한 반박심에 따라 종교개혁을 시도했기에,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전부 틀렸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바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과 더불어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눅18:12~14). 그러나 루터도 처음부터 오직 믿음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처음에는 회개와 믿음이라고 같이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종교개혁의 방향은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만 남게 하였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은 지금의 우리들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은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2024년 06월 11일(화)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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