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구원(22)]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이 빠뜨려버린 구원의 3가지 중요성은 무엇인가?(약2:14~26)_2-24-06-14(금)

by 갈렙 posted Jun 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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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구원(22)]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이 빠뜨려버린 구원의 3가지 중요성은 무엇인가?(약2:14~2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STDB6oqUMB8

 

1. 들어가며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사실 2가지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엡2:8~9).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분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는다는 말을 과대 확장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예정하신 뜻대로 구원을 얻게 하신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있다면 그는 행위구원론자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과대확장하여 해석하면, 인간의 구원은 인간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여, 하나님도 인간의 구원에 하나의 방편으로 쓰여지는 것처럼 묘사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무려 21번에 걸쳐서 구원에 관한 잘못된 구원 교리들을 교정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동안 알고 지내왔던 구원론 곧 하나님의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몇 줄로 요약해 보고자 한다. 

 

2.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의 주장은 어떤 것인가?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있는 데 이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개인은 멸망으로 예정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았으면 그는 어찌하든지 구원을 받게 되겠지만, 만약 그를 멸망으로 예정해 놓았다면 그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하시는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은 결코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멸망자에게 자신은 절대 속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아직 태어나기도 않은 자를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로 예정해 놓으셨다면 그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도록 예정해 놓았으니 이처럼 불공평한 처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이나 멸망으로 예정해 놓았다는 말은 틀린 주장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성경에 단 한 사람도 그러한 예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다면 개인 사역 예정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만약 그렇게 예정해놓았다면 하나님의 폭군이시요 편애하시는 분이시요 불공평한 분이 되시기 때문이다. 또한 셋째, 이러한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한 분이 되어서 인간을 심판하신다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어떤 일말의 책임이 있어야만 하나님도 인간을 심판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운명을 정해 놓고 그 사람을 멸망으로 내보내신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에 관하여 예정하신 것은 천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었다(엡1:5, 3:6). 이것이 만세전의 예정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렇게 되는 출발지점에서 그만 하나님께 범죄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구원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구원으로 예정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고 받아들일 때에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예정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그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으로 초청된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천국혼인잔치에 택함을 입은 자들은 많지 않다고 말씀 하셨다. 그만큼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3.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이 빠뜨려버린 구원에관한 3가지 중요성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은 구원으로,어떤 개인은 멸망으로 예정해놓으셨다는 주장은 대체 무엇을 약화시키는가? 그리하여 결국 인간을 구원으로부터 멀어져가게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은 회개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간과하게 한다는 것이다(마4:17, 계22:14). 왜냐하면 한 번 회개하고 한 번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한 자라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4:17).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두루마기를 빨고 있는 자 곧 회개하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생명나무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4). 그리고 구원을 위해 은혜베푸실 분은 하나님이지만 회개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자는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엠2:8, 롬3:24,28). 결국 믿고 회개하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종교개혁자 루터(1,483~1,546년) 자신도 회개의 중요성을 알고 맨 처음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써붙일 때에 처음 4개조항을 계속해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때 사용한 95개조 반박문 가운데 처음 4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1항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4:17), 그분은 신자들의 전 생애에서 회개가 지속되기를 원하셨다. 
  제2항 이 ‘회개하라’는 말씀은 고해성사 곧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어지는 고백과 속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제3항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마음 속에서의 참회만 국한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참회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들을 죽이는 외적인 표지들을 낳지 않는다면 그 참회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4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존재하는 한(즉 진정한 내적인 참회가 없는 한), 죄의 형벌은 [계속] 존재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죄의 형벌은] 존재하게 된다. 

  둘째,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은 현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간과하게 한다는 것이다(요10:27~28). 내가 과거에 구원을 받았고 구원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지만 모든 사람은 현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첫째로, 과거에 내가 믿었어도 현재 죄를 짓고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과거에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한 번 회개한 것을 가지고 자신은 그때 이미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다고 한다. 아니다. 아직 짓지도 아니한 죄를 어떻게 용서받았다는 하는 것인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항상 그 시점은 과거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죄를 용서받기 위해 회개하는 일이 중요하다. 회개를 뒤로 미뤘다고 회개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죽을 때에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회개가 모든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 처음 믿을 때 회심으로서의 회개는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를 일시적으로 덮어버린다. 그래야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었던 죄를 낱낱이 회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다. 이는 죄가 있으나 없는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 지은 죄를 반드시 자백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가 여전히 남아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여전히 십계명을 어기고 있는 자는 성밖이나 불못에 던져진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계22:15, 21:8). 그러므로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 회개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주님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마10:22, 계2:13). 그분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있는 순간일지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인하신다고 하셨으며, 만약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한다면 주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0:32~33). 그러므로 구원은 항상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과거의 것에 매여 있어서 지금 현재를 부정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신앙고백을 영원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 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 잘 믿고 있었던 자라도 얼마든지 주님을 부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만세전 개인구원 예정론자들은 열매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간과하게 한다는 것이다(약2:14,22,26, 마7:16). 왜냐하면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열매 곧 믿음의 행위가 없어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자신이 구원받은 자인지를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점검해야 한다는 경고를 소홀히 여기게 한다. 왜냐하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신념이 들어오게 되면, 정말 심각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자신의 구원은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잘못을 저질렀라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기로 한 이상, 나를 억지라도 회개시킬 날이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회개할 책임을 우리에게 맡긴 것이지 하나님의 시간을 특별히 마련하셔서 강제로 우리를 회개시키지는 아니하신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를 보라. 그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밖에 서 계시게 하고 있었던 교회였다. 거의 거듭나지 않은 성도들이 꽉 차 있었던 교회 같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그의 성도들을 주님의 입에서 토해버리고 싶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를 강제하지 아니하시고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며 우리가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기다리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벧후3:9).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예수님을 믿고 또한 성령을 받아서 거듭난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믿음의 열매가 보이지 않고 있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딘가에서 잘못된 것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인격적으로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고, 혹 믿음의 행위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그러한 믿음으로서는 구원을 받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약2:14,17).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4. 사도 바울의 칭의론과 야고보의 칭의론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사람이 어떻게 칭의(의롭다 함)를 받는지 말씀하고 있다. 그것의 실례를 아브라함의 사례를 들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을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의롭다고 하시는 일을 믿었던 아브라함에게 의롭다고 칭해주었다고 말한다(롬4:1~5).

  그러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장로는 이와 달리 말씀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2:21~24)". 그렇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비로소 의롭다함을 인쳤다고 말한다. 그럼, 사도 바울과 야고보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것인가? 아니면 둘 중의 누가 틀린 것인가?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야고보서는 사도적 서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경에는 야고보를 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루터는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시작으로서의 칭의를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완성으로서의 칭의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 바울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칭의를 말한 것이고,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의 칭의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 믿을 때에는 행위에 상관없이 칭의의 옷을 모두에게 입혀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칭의의 옷을 입었지만 칭의를 받은 자 답게 생활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실 것이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혹은 믿음의 행위를 맺지 못한다면, 그에게 주어진 칭의는 결국 헛 것이라고 판단하신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인생을 다 살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이 결코 그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5. 나오며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정해 놓으셨다면 그는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간과하게 만든다.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아주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왜 주님께서 "믿으라"고 명령하셨겠으며, 왜 "회개하고 있으라"고 명령하셨겠는가?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이다. 고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믿음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며, 회개도 하나님께서 회개할 마음을 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고 거듭거듭 주장한다. 어느 면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100%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결국 이러한 고백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계속해서 줄어들게 만들어 버리고 결국에는 아예 인간의 책임을 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다 믿도록 이끌고 계신다. 그리고 누구나 회개하도록 이끌고 계신다. 다만 본인이 회개를 뒤로 미루고 있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나를 회개시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회개하라고 하신다. 고로 지금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회개해야 한다. 지금이 중요한 것이다. 

 

  

2024년 06월 14일(금)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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