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새벽기도회] 아가서강해(14) 전투하는 신부에서 다른 신부를 산출하고 양육하는 신부로(아8:8~10)_2024-10-07(월)

by 갈렙 posted Oct 07, 202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동영상URL https://youtu.be/0Rg7lHspdoU

2024-10-07(월) 온라인새벽기도회

제목: [아가서강해(14)] 전투하는 신부에서 다른 신부를 산출하고 양육하는 신부로(아8:8~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0Rg7lHspdoU

 

1. 들어가며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시골 처녀인 술람미 여인 간의 연애와 결혼과 사랑에 관하여 쓴 일종의 가극시다. 그런데 아가서를 두고 어떤 이는 두 연인 간의 에로티시즘 작품이라고 주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3가지 이야기가 서로 복합적으로 구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모티프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있고, 궁극적인 지향점은 우리 믿는 성도들의 영원한 신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성도들의 친밀함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가서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과연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으며, 성 안에 들어가게 될 자들이라도 누가 천국에서 기업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바라고 계시는 신부의 가장 바람직한 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 우리 인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도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2. 아가서는 신부에 대한 3단계 성장 과정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아가서는 천국에 들어갈 신부들에 대한 교과서이자 신부 훈련 지침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아가서는 한 여인이 어떻게 천국의 영광스러운 신부로 성장해 가고 있는지를 묘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가서에서는 신부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그 신부에 대한 주님의 기대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알려 준다. 그것은 신부도 3단계의 성장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백합화 같은 신부이자 비둘기 같은 신부'의 단계가 있다. 이 신부의 단계는 오직 한 사람인 자신의 짝을 사랑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정절을 지키는 여인을 가리킨다. 이것에 대해서는 2주 전 '아가서(노래들 중의 노래) 대체 어떤 책인가?' 하는 메시지를 통해 말씀드렸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전투하는 신부'의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백합화와 비둘기 같은 신부가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신부가 되는 것을 알려 준다. 이때 전투하는 신부가 되려면 기도하고 회개하며 주님만을 높여 드리는 신부가 되어야 함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것은 지난 주일 '백합화에서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신부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다. 이제 오늘은 세 번째 신부의 단계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신부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신부를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부는 다른 신부들을 산출하고 그 신부를 양육하는 신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아왔던 우리의 삶이라면 이제는 제3단계의 신부가 어떤 신부인지를 명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3.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나 예루살렘의 딸들은 왜 유방이 없는 작은 누이동생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가?

  우리는 아가서의 끝부분에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람직한 신부상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신부를 낳고 양육시키는 신부를 가리킨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아직 유방이 없는 여동생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 내지는 예루살렘 딸들은 어서 자신의 누이동생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동생이 솔로몬의 눈에 들어서 솔로몬으로부터 청혼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여자에게 있어서 유방은 여자가 시집갈 정도로 성숙해졌는지를 말해 주는 척도로 사용된 개념인 것이지 외설적인 어떤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방이 없는 누이동생을 두었던 이들은 지금이라도 솔로몬이 청혼을 해 온다면 어쩌나 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작은 누이동생이 차라리 성벽이라도 된다면 솔로몬의 눈에 띄도록 거기에다가 은으로 망대를 세워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가 성문이라면 그녀를 위해 성문을 백향목으로 둘러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대체 누가 한 말인가?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인가 아니면 예루살렘의 딸들인가? 얼핏 보기에는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 하는 외침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술람미 여인은 그의 어머니의 외동딸로 나오기 때문이다(아6:9). 그리고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은 친오빠들이 아니라 의붓오빠들임을 알 수 있다(아1:6). 이들이야말로 사실 술람미 여인을 포도원에 보내어 일을 시킨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한 오빠들이 갑자기 태도가 변하여 동생을 위하는 척 말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아직 그들이 자신의 여동생에게는 유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도 그때의 상황과 어긋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자들의 합창이 있은 후 술람미 여인은 자신은 이미 성벽을 가진 상태이고, 또한 자신의 유방은 망대(탑)들과 같이 높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아8:10). 그러므로 이 합창은 예루살렘의 딸들인 것이 틀림없다. 아직 예루살렘 성 안에는 장차 신부들이 될 사람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아가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핵심 용어는 무엇인가?

  어떤 문학 작품이든지 거기에는 하나의 분수령이 있다. 아가서는 서사극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클라이막스가 있다. 그것은 4장에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클라이막스가 바로 '동산'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모든 문학 작품들에는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키워드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아가서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장소들로 등장한다. 고로 아가서에 나오는 장소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러 장소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먼저, 아가서 1장을 보자. 거기에는 술람미 여인이 일하고 있는 포도원 즉 레바논 근방에 있는 '바알하몬의 포도원'이 나온다. 그리고 2장에서는 두 연인이 갔던 어떤 '잔치집'이 나온다. 그런데 원문을 보니 그 잔치집은 '포도원의 집'이었다. 그리고 3장에 가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예비 신혼집이 나오고, 신부가 태어난 어머니의 집도 나온다. 그리고 결혼식장도 나오는데, 그곳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다. 그리고 4장에 가면, 그녀가 살았던 레바논과 그 주변의 산들이 나온다. 그때 신랑은 그녀를 '잠근 동산'에 비유하였는데, 그 장소가 5~6장에 가면, 솔로몬의 비밀의 동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밀의 동산인 '솔로몬의 동산'을 알아야 한다. 그럼, 솔로몬의 자기 동산이란 대체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가?

 

5. 솔로몬에게 있어서 자기 동산은 어떤 장소인가?

  솔로몬의 자기 동산은 어디에 있는가? 아가서에서는 그 장소가 어디다 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동산의 모양은 나온다. 그 모양이 영락없이 호도(호두)모양처럼 생겼기에 이 동산의 이름은 '호도 동산'이라고도 일컫는다(아6:11). 아마도 둥그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자기 아내 술람미 여인이 이 동산과 같다고 말한다. 그 여인을 "잠근 동산"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동산이 '잠겨있다'는 것은 이 동산이 아무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특히 '동산'이라는 히브리어 말 자체('간')도 역시 '울타리로 둘러 쳐져 있는 어떤 비밀한 공간'이기 때문에, 이 공간은 비밀한 공간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오직 그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가 그것을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공간에서 솔로몬이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가서를 읽어 보면, 솔로몬은 그 공간 안에서 2가지 일을 하고 있다. 첫째, 솔로몬은 그곳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고 꺾어진 백합화를 주워 모으고 있었다(gather)(아6:2~3). 둘째, 이것은 술람미 여인이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신부가 된  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하게 된 것인데, 그곳에 자신의 고귀한 백성을 위한 수레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솔로몬은 그 수레들을 어딘가에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세상의 지식으로는 다 알 수 없다. 다만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영적으로 아는 사람을 통하여 그것이 무슨 광경인지 참고할 수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표현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곳에서 왕 노릇하는 신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자들 중에는 구약의 성도들도 있을 것이고 신약의 성도들 곧 어린 양의 신부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천국의 자기 집에 스크린 롤을 갖추고 있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가 보면 안다). 그들은 천국에 있지만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특수 모니터 같은 것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이 땅에 진행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지금도 기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보좌에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천국에 있는 어떤 특별한 공간으로 가셔서 일을 하신다. 그곳에서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양떼들을 볼 수 있고, 그중에서 주님의 거룩한 신부들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땅에서 당신의 양떼가 어떻게 풀을 뜯고 있는지, 그들이 원수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고 있는지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없어졌을 때 그녀가 솔로몬을 찾아내서 가 보니까, 그분은 언제나 그의 동산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꺾어진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양떼들'은 이 지상에 있는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이고, 빨간 '백합화(아네모네)'는 신부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수들에 의해 백합화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죽임당한 영혼들을 천국에 있는 자기 동산에 모아들이고자, 그들을 위하여 황금 수레를 준비하고 계신다. 그리고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천국 동산으로 태워 오도록 보내는 일을 하고 계신다. 이는 마치 자신의 순교의 사명을 마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시는 불 수레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솔로몬의 동산이란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특별한 영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산이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양떼를 먹이는 영의 특별한 공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집행되고 있는 그 은밀한 공간에 주님이 늘 계신다.

 

6. 솔로몬의 자기 동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런데 감사하게도 솔로몬은 그 동산에 무엇이 있는지를 소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하여 천국의 동산이 과연 어떤 동산인지를 알 수 있다. 첫째, 그곳에는 잠근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샘에서 나오는 물로 가득하였고 그 물은 동산을 적시며 시내처럼 흘러가고 있었다(아4:12,15). 이것은 마치 에덴 동산의 한 중앙으로부터 물이 솟아 올라와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내려 감으로 4개의 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창2:8~14). 한편 이러한 광경은 천국에서도 비슷하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솟아 올라와 천국의 모든 장소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데 그 강을 성경은 '생명강'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곳에는 먹고 마실 수 있는 꿀송이와 꿀, 포도주와 젖이 있다는 것이다(아5: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동산에 들어간다면 그는 그곳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참고로 '꿀송이와 꿀'은 꿀 같이 단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고(시119:103), 포도주와 젖은 마실 수 있게 표현된 성령(요7:37~39)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신부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초대하는 주님의 은밀한 동산 곧 비원에 들어가는 자는 그곳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고, 성령을 마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결국 이 땅에 있는 양떼들을 먹일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을 성령으로 인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 거기에는 몰약과 유향을 비롯한 향료들이 있다는 것이다(아5;1). 이러한 향료들은 전부 다 그곳에 있는 열매 맺는 나무나 향기나는 꽃들에게서 나오는 것들인데, 무려 12개의 식물에서 나오는 것들이다(아5:1, 4:13~14). 그러므로 그 동산은 향기로 가득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이 바로 그러한 곳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옥은 썩은 시체 냄새와 유황 냄새가 가득한 장소다. 고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 동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 그 동산은 지금도 우리의 영의 공간에 실재하고 있으며, 이 공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령을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공간에 접근이 가능한 자로부터 천국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7. 이 땅에 있는 영의 동산에는 누가 과연 들어갈 수 있으며, 누가 들어갔을까?

  놀랍게도 아가서는 이 땅에 그러한 영의 공간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영의 공간에서는 시공간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술람미 여인과 혼인했던 신랑이 그 공간 안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 공간 안으로 초대를 받는가? 그것은 2가지 종류의 사람들이다. 하나는 그분의 동료 친구들(레아)이 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분이 사랑하는 자들(도드)이 되는 것이다(아5:1).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동역자가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된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곳 안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 잠근 동산이요 비밀의 화원이기 때문이다(아4:12). 그곳은 오직 그곳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라고 허락된 자만이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 들어간 자가 있다고 아가서에 나온다. 그 사람은 바로 술람미 여인이었다(아4:12,15,16, 6:10~11, 7:10~13). 술람미 여인만이 그 동산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 안에 포도원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한다(아6:11, 7:12).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신랑의 친구와 동역자가 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분의 사랑받는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어느 날 신랑을 놓쳤을 때 그녀가 찾고 찾은 끝에 찾아낸 신랑은 그 동산 안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꺾여진 백합화를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신랑의 마음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분은 오직 이 땅에 있는 자신의 양떼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이 땅에서 고난 당하고 죽임 당하고 있는 신부들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 여인도 그때부터 자신의 포도원을 개척하고 양떼를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은 신랑을 그 포도원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세요"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보여 준 것은 그녀가 포도원에서 거둬들인 여러 가지 귀한 열매들이었다. 그 열매들 중에는 그때 거둬들인 새것도 있었고, 이미 거둬놓은 묵은 것도 있었다(아7:13). 

 

8. 누가 영의 공간인 그 동산 안에 들어가서 양떼를 칠 수가 있는가?

  아가서 8장은 과연 누가 그 동산 안으로 들어가며 누가 주님의 양떼를 치는 자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한 마디로, 유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아8:8~10). 여기서 '유방'이란 다른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성숙한 신부가 되었는지 아니 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성장을 해야 주님으로부터 청혼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분과 결혼할 수 있어야 그 동산 안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어린 동생을 보면서, 그녀에게는 유방이 없다고 안타까워한다(아8:8~9). 그때다. 술람미 여인은 그들의 합창을 이어받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성벽을 갖추고 있어요. 그리고 망대와 같은 유방을 갖추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성숙하여 솔로몬과 결혼한 상태에 있었고 그분의 동역자가 되고 사랑받는 자가 되어서(아5:1), 그 비밀의 정원을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아4:12,15, 6:11~12, 7:10~13). 뿐만 아니라 이미 그곳에 포도원을 개척하여 열매들을 거둬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7:13). 그렇다. 우리가 다른 양떼를 먹일 수 있는 신부가 되려면 우리가 먼저 성숙해져야 한다. 유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동산에 들어가서 꿀송이와 꿀을 먹을 수 있으며, 포도주와 우유를 마심으로 젖을 생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른 예비 신부를 산출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을 먹이고 양육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9. 나도 신부이지만 다른 예비 신부를 낳고 양육하는 신부가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끝으로 아가서는 다른 예비 신부를 낳고 그들을 양육하는 신부가 되었을 때 받을 축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본인이 이 땅에 있는 영의 동산에 들어가 자신이 개척했던 포도원을 천국에서 영원히 그의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다(아8:12b). 그리고 혹시 자신이 포도원을 개척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일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주실 것임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아8:12a). 그렇다. 우리가 신부가 되어서, 다른 예비 신부들을 낳고 양육하는 일을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우리들의 최종적인 거주지로서 천국의 동산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말씀하신다.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여"라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천국의 동산에 거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러한 자가 될 수만 있다면, 장차 하나님의 우주 행정이 관장되는 그 공간 안에 우리들도 동참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0. 나오며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 하나도 간신히 천국에 들어갈지 못 들어갈지도 모르는 상황 가운데 그냥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다. 이제는 어서 속히 백합화 같은 신부와 비둘기 같은 신부가 되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것은 주님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적갈색의 고벨화가 되어 주시고 포도주의 집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을 기억하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결단하고, 자신의 영혼을 순결하게 보존하며, 오직 주님에게만 자신을 바치는 정절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내가 이러한 1단계를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되는가? 그러면 2단계에 도전하시기를 바란다. 원수의 영토에 들어가서도 그곳에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럴려면 우리는 먼저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라도 주님을 높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면 이제는 3단계에 도전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일은 영의 공간인 주의 동산에 자기 자신의 포도원을 개척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예비 신부가 되도록 그를 낳고 또한 양육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보다 다른 이를 주님을 섬기듯 섬김으로 시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려 오지 않으시고 섬기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막10:45). 그렇다.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먼저는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의 동산에 나 자신이 들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서 말씀과 성령을 먹고 마심으로 그분의 것으로 나를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짜서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아가서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최종적인 신부의 상인 것이다. 천리 길은 아주 멀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걸음이라도 떼는 자가 천리 길도 갈 수 있는 것이다. 

 

 

2024년 10월 07일(월)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