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03)] 교회의 두 번째 정의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엡5:22~33)_2024-12-12(목)

by 갈렙 posted Dec 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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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교회론(03)] 교회의 두 번째 정의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엡5:22~3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uS7W7MRJFqs

 

1. 들어가며

  교회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정확히 정의한 사람은 사도 바울 뿐이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엡1:23). 그리스도 한 분이시지만 그의 몸은 여러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주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로서 머리이신 예수님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취하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정확한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까딱 잘못하면 교회생활을 하고 있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교회생활이 아닌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그중에서 이번 시간에는 교회의 정의 가운데 두 번째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관점에서 교회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의 신부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교회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1:23). 여기서 '그분'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그렇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했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표현하는 기관이라는 것인데, 이때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이신 그리스도의 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얼마나 풍성한 분이신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많은 지체들의 유기적인 연합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고, 교회는 머리의 지배를 받는 여러 지체들의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체들은 여러 몸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다. 교회가 하나의 유기체럼 움직이는 영적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요긴한 존재들이다. 이는 서로의 도움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기에 과자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먹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은 눈이 그것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맡야 한다. 그리고 발이 움직여 줘야 한다. 그리고 손은 그것을 집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입은 벌려야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지체들 중에 어느 한 지체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그 과자를 먹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러 지체들이 모인 것이지만 한 몸으로 존재해야 온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교회의 두 번째 정의로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에베소서 5장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원형을 창세기 2장의 말씀에서 끌어왔다. 그것은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 2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하와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아담에게 하와는 어떤 존재로 지어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러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의미는 첫째로,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돕는 베필(마주하는 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외로운 아담을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고 결단하고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어내서 살로 대신 채우시고 하와를 건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가 없으면 한 쪽이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잘못 표현하면 교회 없는 그리스도는 불구자(장애자)인 셈이다. 왜냐하면 짝은 반드시 둘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 것인데, 한 쪽이 없다면 그는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아주 소중한 존재로 보시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에서 나온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들 중의 뼈요 내 살들 중의 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였다. 그녀를 사랑하되 자기의 몸처럼 사랑했다. 왜냐하면 원래 하와는 자신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기뻐하면 아담도 기뻐할 수 있었고, 그녀가 고통 당하면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가 내민 선악과를 먹을 것이다. 그녀 혼자만 죽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지금도 교회를 보고 행복해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존재로 하와가 지어졌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가 존재의 근원이다. 그분에게서 교회가 나온 것이다. 특히 그분의 잠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옆구리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교회를 건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잠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 피는 속죄를 의미하고, 물은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생명을 해방하여 우리에게 주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나타내준다. 자신이 죽어서라고 교회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성도들인 교회는 그분이 베푸신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2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엡5:22~23).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를 삼아야 한다. 그분을 머리로 취하지 않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하와에게 머리는 하나였다. 그는 그의 남편인 아담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녀는 남편을 머리로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를 머리로 취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옛뱀이자 사탄이요 마귀이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그만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머리를 버리고, 다른 머리를 취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고, 물어볼 것이 있으면 남편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항상 죄로 인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라고 했다. 머리에 수건을 쓰기 어렵다면 긴 머리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라고 했다. 이는 자신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식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 교회는 그리스도만은 남편으로 취해야 한다. 그분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한다. 그분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양이 자신의 목자만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교회는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 한다. 한 마디로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어려운 순간이 온다고 할지라도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뱀이 하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아담이 뱀의 말을 듣고 직접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다. 하와를 살리기 위해서 하와가 건네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이는 아담이 오로지 그녀만을 자신의 짝으로 여기고, 자신의 짝이 홀로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오직 하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에게 똑같이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날에 마귀의 어떠한 유혹이 온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뱀에게 주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도들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남편이신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을 찾지 말아야 한다. 다른 신에게 무엇인가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일평생을 주님만을 바라보고 가야 하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아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희고 깨끗한 세마포옷을 입어야 한다. 자신의 옷이 더럽혀지만 빨리 빨아서 흰 옷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정해지는 것은 이 땅에서다. 이 땅에서 정해진다. 그리고 결혼식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이뤄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신부로 정해진 순간부터 결혼식을 치르는 그날까지 자신을 깨끗하게 단장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들림받지 못하고 남겨지게 될 것이다.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5. 어떻게 하면 더 깨끗한 신부가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할 때 더 깨끗한 신부가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로, 날마다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옷을 깨끗히 하면 된다(엡5:26~27).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옷을 빨아야 하는 것이다(계22:14).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가 죄로 더럽혀진 자신의 겉옷을 깨끗하게 만들어줄 것이다(계7:14). 둘째로, 겉옷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 자체도 빛이 나게 만들어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칭의의 겉옷을 입음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아직 속은 냄새가 펄펄 나는 존재다. 하지만 신혼방에 들어갈 때에는 옷입고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더럽혀진 몸을 씻어야 한다.

  둘째로 이제는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오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겨야 한다. 이전에 죄된 본성과 짝하던 자신의 삶을 이제는 포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죄만 회개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 곧 귀신과 작별해야 한다. 그것들을 내 몸에서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 몸에 생명주는 영으로 들어와계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내 몸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인이 처음에는 회개를 통해 의의 겉옷을 입어서 깨끗하게 해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일생동안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얼마나 자기 몸 안에 들어와있는 귀신들을 내보내느냐에 따라 다르다. 여러분도 천국에 들어가 보라. 그리고 누가 앞 자리로 가서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는지를 살펴보라. 그것은 희고 깨끗한 겉옷만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몸 자체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들이 앞 자리에 있다. 고로 옷도 깨끗해야 하겠지만 몸도 깨끗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몸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귀신들을 얼마나 보내느냐야 따라 결정된다. 고로 귀신을 우리 몸에서 제거할수록 우리는 천국에서 주님의 보좌 더 가까이로 가서 예배를드릴 수 있다. 

 

6. 나오며

  우리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옷을 입는 것은 사실 우리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입혀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은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의의 겉옷을 입혀주면 우리는 의롭다함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천국가야 할 사람의 첫 출발점이라고 하겠다. 이를 테면, 백넘버를 달고 100M 달리기의 선수로서 트랙에 들어선 사람이 되는 것이 곧 칭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수로서 출전하지 않는 사람이 결코 상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선수가 되는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의의 옷을 입혀주심으로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은 다 은혜에 속한다. 그런데 모두가 다 100M 달리기를  완주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중간에 유혹을 받아서 곁길로 새는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100M 달리기의 선수로 삼으신 것은 100M 달리기를 완주하라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지 뛰지도 않고 트랙에 앉아 있으라고 선수로 삼으신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달리기의 트랙에서 뛸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없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내어 선수 자격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어여삐 여기고 우리를 선수로 삼아주셨지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힘껏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 혹 무거운 것이 내 몸에 걸쳐져 있다면 그것을 풀어서 내려놓아야 한다. 죄의 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달리기를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회개함으로 예수님의 피로 우선 죄의 짐을 더는 것이다. 그리고 더 회개하여 우리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귀신들까지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가볍게 달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빨리 경주하는 자가 결국 천국에서 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2024년 12월 12일(목)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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