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새벽기도회] 에베소서강해(03)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3)(엡1:3~14)_2025-01-20(월)

by 갈렙 posted Jan 20, 202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동영상URL https://youtu.be/zf79IqGTFHE

[온라인새벽기도회] 2025-01-20(월) 오전5시반

제목: [에베소서강해(03)]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3)(엡1:3~1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 목사

https://youtu.be/zf79IqGTFHE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바울이 교회론에 관하여 쓴 편지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교회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7가지 방면으로 소개를 해 주었는데, 첫 번째 정의가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엡1:23). 이에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먼저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소상하게 소개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 부분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에베소서 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한 구원경륜"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서 예정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더불어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에 관하여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과연 칼빈의 후예들이 말하고 있는 바, 칼빈의 예정에 관한 5대교리 곧 "전적타락과 무조건적인 선택 그리고 제한속죄와 불가항력적인 은총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 과연 얼마나 성경적인지를 살펴보랴고 한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혜가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2.칼빈의 예정론은 과연 성경적인가?

  칼빈이 말하는 예정론이란 흔히들 "이중예정론"이라고 부른다. 그 핵심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칼빈의 예정론은 처음부터 주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의 말기에 가서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그가 쓴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을 읽어보라. 그러면 거기에는 이중예정론의 교리가 들어있지 않다. 그런데 제2판(1539년)에서 칼빈은 비로서 17개의 장 중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예정론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로 이러한 예정론은 제3판(1543~1550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이었던 제4판(1559)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예정론의 분량이 엄청나게 크게 늘어난 것이다. 제4판의 총 25장 가운데, 무려 4장(21~24장)을 예정론으로 할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의 예정론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가 최초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중세의 어거스틴이 말했던 구원에 관한 '신적 작정'을 확대 재해석하여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결코 칼빈처럼 인간의 멸망(유기)에 대한 예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판(1559년)의 제21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중 예정론을 말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영생으로 예정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를 예정하셨다. 각 사람은 이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서 분명한 말씀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행4:28, 롬8:29~30, 고전2:7, 엡1:5,11). 특히 엡1:3~14절에도 그러한 예정론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것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정과 칼빈이 말하고 있는 예정론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칼빈의 이중예정론이다. 칼빈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폭군이자 잔인한 분으로 만들 수 있는 이중예정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것도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이미 그를 구원과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의 예정론이 얼마나 하나님을 폭군의 하나님으로 만들어가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얼마나 선택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저주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개인멸망예정은 결코 성경에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멸망으로 예정해 놓고 그를 태어나게 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 듣지 않고 자신은 구원으로 예정되었다고 듣는다. 그러면 자신의 구원은 이미 구원으로 결정된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될 구원을 따놓은 당상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구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정론에 한 번 빠진 자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통회자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구원은 순간이 아니라 여정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면, 칼빈의 이러한 이중예정론의 교리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상을 어떤 집단(공동체, 불특정다수)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셨고, 또한 반대로 누구는 멸하기로 예정해 놓으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 구원 예정이 만세전이 이미 작정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예정에 대해 인간은 결코 항거해서도 아니되고 그것에 대해 절대 왈가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선하신 하나님의 작정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이 따라야 한다고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없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가 비유하는 것은 그릇이 자기를 지으신 토기장이에게 저항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엄청난 실수요, 최악의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떤 그릇으로 쓸 것인가에 대한 비유인데, 그것을 구원에 대한 비유로 잘못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전혀 보지 않고 만세전에 그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셨다고 말함으로써, 구원에 이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친다.

  사실 우리 모두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아는 바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속죄사역과 생명분배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인간이 행하는 어떠한 수고나 노력도 다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죄없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행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에 대한 구원과 이것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롬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사건을 마치 개인구원예정과 개인멸명예정의 예표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다. 왜냐하면 칼빈이 자신의 개인구원 및 멸망 예정론 교리를 처음 만들 때에, 롬9장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사례를 잘못된 방향으로 가져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 요지는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야곱은 사랑하기로, 에서는 미워하기로 미리 결정하셨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으로, 에서는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엔느 전혀 나오지 않는 진술이다. 왜냐하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드을 그렇게 하기로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만 말한다. 큰 자(형인 에서)가 어린 자(동생인 야곱)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창25:23). 그러므로 이것은 야곱과 에서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과 멸망을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다만 에서는 섬기는 자가 될 것이고, 야곱은 섬김을 받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에서가 야곱을 섬기는 자가 된다고 해서 에서가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니며, 또한 야곱이 섬김을 받는 자가 된다고 해서 그가 꼭 구원 받는 것도 아니다. 오직 구원은 믿음과 회개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는 믿음과 회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막1:15).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해 놓으신 일을 믿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주님을 받아들이고 고백하면 그가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아 구원을 받은 이후에 타인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섬겼다면 그는 하늘에 들어가서도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섬긴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상에 관한 말씀인 것이지 그것이 구원을 결정하는 ㄱ서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야곱을 섬기는 종으로 살도록 미리 예정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이 그가 멸망받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사람을 만세전에 영원한 멸망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구원으로 예정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창세기 25장을 읽어보라. 거기에 보면 에서와 야곱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예언은 야곱과 에서가 장차 두 민족으로 발전할 것이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족속과 에서족속에 관하여 미리 아시고 예지예정을 하신 것이다. 그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지가 그들을 하나는 구원으로 하나는 멸망으로 예정해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 대한 쓰임이 그들의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그는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종으로 쓰임받든 아니면 자유자로 살든지 상관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여자로 태어나든 남자로 태어나든 상관없이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방인로 태어나든 유대인으로 태어나든 상관이 없이, 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종으로 태어나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성경은 개인에 대한 구원과 개인에 대한 멸망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어떻게 쓰실 것인지는 예정될 수가 있는 것이다. 

 

3. 칼빈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어떤 것인가?

  칼빈은 자신이 쓴 기독교강요(1559년) 제21장~24장에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예정에 관하여 어떤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는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는 것도 있지만, 성경에서 가져온 말씀들을 다 자기의 입맛대로 맞추어서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가 주장한 것들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분하여 말씀드린다면,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전적 타락' 내지는 '전적 무능력',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주장하고 있는 말씀을 정리해보면, 일정부분은 에베소서의 말씀 가운데서 인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한 말씀으로는 엡1:7과 1:4절, 엡2:8~9 등이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둘째 항목으로서 주장하고 있는 '조건적인 선택'이란 어떤 것인가?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5절에서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개인을 구원하고 유기하는 것에 관하여 절대적인 선택을 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선택은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을 보시고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어떤 개인의 공로에 따라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에, 그 사람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결정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그것은 만세전에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예정하신 것이지, 어떤 공동체를 예정한 것이니 개인을 예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간파한 베자의 제자였던 알미니우스는 칼빈이 만들어낸 예정교리가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알미니우스는 만세전개인예정론을 주장하지 않고 예지선택 혹은 예지예정을 주장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미리 예지의 능력으로 사람의 믿음을 것을 조건으로 하여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예정했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성경적인 교리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도 그를 구원과 멸망으로 미리 정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지를 미리 일방적으로 정하 것이 아니시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도록 초청하시는 것이다. 만약 그 초청에 거부한 자가 되었을 때에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교리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마22장에 나오는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베푼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어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었다. 하지만 온다고 약속했던 자들은 한사코 사양하고는 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인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잔치에 참여할 예상인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의 음식을 준비하였다. 이제 임금은 자신의 종들을 시켜 사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대로 초청해서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자 종들이 나가서 그러한 사실을 전한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믿고 따라오는 자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차야 할 인원은 차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멀리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혼인잔치의 빈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찼다. 주인이 생각하는 분량만큼 가득 찬 것이다. 그런데 누가 왔는가를 지켜보려 왕이 들어왔다. 그리고 어떤 친구를 향해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어찌하여 [잔치[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와 있느냐?" 그런데 그는 그 예복이 그렇게 중요한지를 잘 몰랐다. 사실 그 친구가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도 아니었고 권력이 있어서도 아니면 물질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잔치자리에 참여해 달라는 종의 초청소리를 듣고 자원하여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어올 때 종은 모든 손님에게 흰 옷 한 벌을 나누어주었고 그것을 입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그 옷을 소홀히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쫓겨나고 마는데, 그는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이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고 하였다. 그렇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져 있는 것이다. 누구는 구원하기로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잔치잔리에 참석할 사람들로서 부특정다수를 하나님께서 미리 마음에 작정해놓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가 그날 선택함을 입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그가 잔치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잔치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예정이다.  

 

4. 칼빈의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 속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제는 칼빈의 예정론 가운데 네번째 항목인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제한 속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기록하고 있는 엡1:7을 근거로 나온 예정론의 항목들이다(물론 이러한 주장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베소서 성경적인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이 구절을 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말한 바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무엇인가? 여기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베풀어주실 은총은 그 누구도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해(1559년)" 제3권 제23장에서 하나님께서 한 번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인간의 자유의자로서는 결코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람의 뜻이 하나님을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사랑을 베풀어주시려 해도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고집을 강제로 꺾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는 칼빈이 말하는 "제한 속죄'에 관해 살펴보자. 그는 "제한 속죄"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오직 성부가 선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2장 7절에  나오는 것으로써, 그는 전세계가 창조주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세상 자체는 예정한대로 자멸하게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아버지의 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른지도 몰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긍휼과 자비가 없으신 분으로 생각케 만들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온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분은 자신을 믿을 자를 위해서만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요일2:2). 하나님은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쪼잔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듣고 믿어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5. 칼빈이 말하는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이제는 칼빈이 주장했던 예정론의 첫번째 항목으로서 "전적 타락" 혹은 "전적 무능력"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적 타락(전적 무능력)"이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 무능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불신자 중에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선을 행하는 자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1559년)" 제23장 3절에서 "사람은 모두가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가증할 뿐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정죄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은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 안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라는 그의 주장은 맞지만, 인간이 구원을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과 그만한 능력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간을 정의하다보면, 인간을 너무나 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악하며 무능력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면 그것에 대해 반응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나, 다만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선한 행위들을 계속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주님이 초청하실 때에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복음을 듣고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란 어떤 것을 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갖고 태어나고 있으며, 그대로 놔두면 죄를 짓다가 사망에 이른다는 뜻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초청까지도 반응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처럼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인 것이다(마12:20). 그대로 놔두면 갈대는 꺾여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꺾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붙들어 주신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하지만 사람은 있는 그대로 놔두게 되면 곧 껴저버릴 불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불이 이미 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고 심지를 간검해주신다면 그는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절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으며, 선을 행하지도 못하는 절대무능력에 상태에 있다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다음 주에는 칼빈의 5대교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이 얼마나 성경에 어긋난 구절이며, 근거가 되지 못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러면서 반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론에 관련된 성경구절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함께 찾아보고 살펴볼 것이다. 

 

6. 성도에게 있어서 바른 성경적인 예정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고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빗나간 이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안주의의 원조격인 알미니안주의 비교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밀드레드 와인쿱인데, 그는 자신의 책 "칼빈주의와 웨슬레 신학(생명의 말씀사, 1987, p37)"에서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수호할 논리적인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어거스틴은 그렇게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칼빈은 이중예정 중 "멸망으로의 예정"까지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와인쿱은 이것마저도 논리적인 발전의 결과이지 결코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예정론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에,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얻도록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내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고로, 개인구원예정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누구든지 자신의 불신앙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하나님의 예정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7. 나오며

  칼빈은 기독교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기억될만한 유명한 변증가다. 특히 그는 기독교강요를 써서 사도바울과 어거스틴에 이은 최고의 신학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신구약성경의 주석서는 기독교역사상 최초이자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칼빈 사후 약 200년동안 그 누구도 칼빈과 같은 주석서를 낸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주장하는 것이라면 다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발견해낸 교리가 성경이 아니라 논리적인 비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바로 "이중예정론"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려다가, 그만 인간의 남아있는 의지마저 완전 묵살해 버렸다. 인간이 구원얻기 위해 최소한 해야 할 일마저도 인간의 공로와 행위라고 몰아붙히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래도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팩트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아담의 범죄에 의해 정죄받은 상태에서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회개하고 믿어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가 처음 범죄했을 때에 스스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뱀이 꼬드겨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기 전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반응해야 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이 강권할지라도 그분의 초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도록 지금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고 계신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의 초청에 응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적어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주의 음성에 반응할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훗날 하나님께서는 심판주가 되실 수 있다. 누구에게든지 구원받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서 항변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칼빈의 만세전 개인구원예정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니 성경에 위배된다고 본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들기 위해서 선악과도 만든 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죽을 운명에 처할 죄인들 중에서 당신의 뜻대로 살려줄 자와 멸망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내버려 둘 자를 고르는 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속죄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만큼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의 긍휼하심과 사랑은 지금까지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 수 있는 분량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한사코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기 위해,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회개하고 그분을 자신의 인생이자 영혼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 육체를 벗는 순간에 심판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땅이요 행복의 땅인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25년 01월 20일(월)

정보배 목사

 

[크기변환]2025-01-20 에베소서강해(03)1.jpg

 


Articles

3 4 5 6 7 8 9 10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