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로마서강해(17)]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에 있어서 할례는 어떤 의미인가?(롬4:1~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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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약 84세 경에 칭의를 얻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다(창15:6).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아브라함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으면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의로 여기신다(롬4:9).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으면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이 될 수 있으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된다(갈3:7,9).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가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라고 역설한다(롬4:2~3). 그가 한 일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가?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대체 어떤 의미였는가?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그가 9년전에 15년전에 얻은 칭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2.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에 칭의(稱義)는 어떤 주어졌는가?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칭의는 언제 주어졌는가? 그것은 그가 갈대아우르에서 부름받아 나올 때가 아니었다. 그때는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순종을 그의 의(義)로 여기시지 아니하셨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9년이 지난 84세때였다. 사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날 당시에 그에게는 저주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가문에 있는 저주로서 불임의 저주가 있었고 일찍 죽는 저주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첫째 형인 하란에게 있었다. 하란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에게도 있었다. 그것은 임신을 못하는 저주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정말 귀하디 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대아우를 떠나면서도 그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혹 자신이 자식을 못 낳으면 하란의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롯을 양자로 삼으려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의 곁을 떠나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자신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한 상태에 계속 놓여 있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자였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하늘을 보게 하셨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하늘을 우러러 뭇별(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같으리라"(창15:5).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창15:6).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었지만 아브라함을 그것을 믿은 것이다.
3. 칭의를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었는가?
칭의를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온전한 믿음이었는가? 그랬다. 그가 그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랬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이 그의 의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내를 통하여 자식을 주시는 것을 차마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내의 제안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아내 사래가 말했다. "여보, 하나님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니, 원하건데 내 여종에게 들어가서 아들을 낳으세요. 혹 내가 그녀로 인하여 자식을 갖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창16:2). 그러면 정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다면 그녀의 제안을 물리쳐야 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얻었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다. 이때는 그의 나이가 86세 때였다(창16:3,16). 그러자 그후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떠나셨고 그에게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13년이 지나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얼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그렇다면 이러한 명령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첫째, 이때 아브라함이 없는 것조차 있게 창조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때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믿음이 완전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4. 칭의를 받은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칭의를 얻은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자신의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은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이 곧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체를 따라가는 행동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나중에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은 것이야말로 약속을 따른 것이었다고 말한다.
갈4:23 여종(하갈)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사라)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하갈)과 그[녀의] 아들(이스마엘)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스마엘)이 자유 있는 여자(사라)의 아들(이삭)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한 번의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는 것이지만 그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육체 속에는 여전히 악한 영들(뱀들과 귀신들)이 많아서 죄의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지켜서 육체의 본성을 따르지 않고 살기가 어려웠던 때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도 육체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채, 자식을 얻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라고 하면서 젊은 여자를 취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따라서 자식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갈을 통하여 얻은 이스마엘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 이삭이 태어나서 얼마나 지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 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할 때에도 이삭을 칭하는 용어가 아브라함의 둘째아들이 아니었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창22:2,12,16).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육체를 사용하여 낳은 아들을 아브라함의 자식으로 인정해주지 않은 것이다.
5. 아브라함이 육체를 따라 범죄했던 것을 용서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신 조치는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육체를 따라 살았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가? 그것은 그가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출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2가지를 명령하셨다. 하나는 그의 이름을 바꾸라는 것이었다(창17:4~5). 이는 그가 이제는 혼자만의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라고 했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래'(고귀한 어머니)도 이름을 '사라'(열국의 어머니)라고 바꾸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다(창17:10~14).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진 고추를 사용해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육체를 사용해 범죄하지 않겠다는 표시로서 고추의 끝을 잘라내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면 남자는 일주일간 쓰라진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자기와 자기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자기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고추의 끝을 잘라면서 일주일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6. '할례'란 오늘날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의 시행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채 성급하여 육체를 따라 행했던 것을 회개하는 의미로 주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라는 것은 단지 남자의 포피를 자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육적인 몸을 죽음에 넘겨 그것을 벗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사도 바울은 할례의 의미를 영적으로 풀어서 육적인 몸을 벗는 것이라고 정의했다(골2:11). 이는 할례가 육체를 따라 살던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살겠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받아야 했던 할례는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세례와 똑같다. 왜냐하면 세례도 옛 사람을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살겠다고 표시이기 때문이다(롬6:3~4). 그러므로 과거에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도 세례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를 마가나 누가 그리고 사도 바울은 '회개의 세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할례는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막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눅3: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행13: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행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에 대해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해석했다(롬4:11). 그가 가진 믿음이 견고하지 못했으나 드리어 할례를 통하여 견고해지게 되었으니, 그에게 있어서 할례는 '그의 믿음을 인친 행위'였던 것이다.
롬4:11 그(아브라함)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7. 연약한 칭의라도 어떻게 하면 견고해질 수 있는가?
그렇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칭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인지라 믿음이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육체를 따라 행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깨끗히 정리하고 새 출발할 수 있도록 할례의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음으로 인정받은 자신의 의를 새롭게 갱신하게 되었으며, 그가 받은 칭의도 견고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처음 믿었을 때에 받앗던 칭의를 견고하게 하려면 예수님을 믿고 한 후에 지은 죄들을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결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칭의를 보존하고 견고하게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에는 할례를 받은 것이요 신약시대에는 세례를 받는 것이로서, 영적으로는 육적인 몸을 벗는 것이며, 회개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은 지금 범한 죄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으니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분명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기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뱀들과 귀신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그들의 명령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처음 믿을 때에 받은 칭의가 계속해서 유효하게 하려면 그는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8. 나오며
비록 아브라함은 84세 때에 그의 믿음이 그의 의로 인정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후로 그의 믿음이 온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흔들렸기 때문이다. 칭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온전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으니 그것은 바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언약의 자손으로써 새롭게 인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유대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모른 채, 자신의 고추의 끝을 잘라서 할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할례의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한다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할례를 받는 것은 할례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유대인들이 할례를 소중히 여기고 할례를 받고 있지만 회개의 의미가 퇴색된 채 형식적으로만 할례를 받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믿음을 의로 인정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회개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칭의가 견고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회개를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경우와 거의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다. 믿었으면 그후부터는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그의 믿음이 견고해진다. 그리고 그가 받은 칭의도 계속해서 유효한 것이 되는 것이다.
2025년 05월 19일(월)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