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로마서강해(27)] 최상위의 법으로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롬8:1~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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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거듭난 사람은 사실 자기 안에서 4가지 법이 활동하고 있다. 우선 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렇지만 육신에 팔려서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법은 죄의 법을 이기지 못하고 늘 지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여기에서 절망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는 또 하나의 법 곧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즉 믿는 이들 안에는 생명의 성령이 들어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이 아무리 나를 끌어가려고 해도 또 하나의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내 속에 생명의 성령만 모시고 있으면, 무조건 내 속을 집으로 삼고 있는 죄를 이길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좋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명의 성령을 자기 안에 모시면 그날부터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장치는 마련된 것이지만 그것이 작동되게 하려면 다른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작동하지 않으면 자기가 성령을 모신 성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죄와 사망의 법에 눌려 살게 된다. 왜 그런가? 그래서 이번 시간에 우리는 인간에게 주신 최상위법으로 주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되는 원리를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나도 항상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을 이기면서 살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사람이 거듭날 때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온 생명의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을 통치하는 법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거듭난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최상위의 법에 해당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자아 혹 혼이 생겨난다. 하지만 아담이후 모든 사람의 자아는 이미 육신에 팔려 있는 상태다. 왜냐하면 육신 안에 죄가 들어있기 때문이요 그 죄가 인간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죄를 실체화시키면 그것은 악한 영들을 가리킨다. 즉 뱀들과 귀신들이 육신에 들어있어서 우리를 자기들 쪽으로 끌어가서 온갖 죄된 욕망을 부추겨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 아래에 놓여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주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죄사함을 받아 거듭 태어나게 되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다. 그런데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죽음이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이며, 부활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 안에 어떤 것도 이 생명을 이길 수 없다. 죄도 사망도 사탄마귀도 이것을 파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태어난 사람은 다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죄를 짓고마는 죄와 사망의 법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게 되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게 해 주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사람 안에 장착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가 자기 안에 장착되었다고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법이 내 안에서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
3.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되기 위한 기초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어 생명의 성령을 받은 자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자이다. 왜냐하면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망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자기 안에 생명을 모셔들였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자기 안에 창조주의 생명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자기 안에 생명의 성령을 모셔들였다고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죄를 짓지 아니하고 생명의 성령을 따라살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명의 성령이 내게서 활동하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이라도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시지 결코 우리를 강제로 끌어가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의 기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되기 위한 기본조건이 무엇인지 확인해보도록 하자.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렇다. 누가 결코 정죄받지 아니하는가? 그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를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되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채, 만약 자아가 계속해서 죄된 육신을 따르기로 늘 결정하고 있다면, 그는 비록 자기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작동되지 않는다. 고로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다. 그것은 누가 부분집합이요 누가 전체집합인가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가령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으니, 나는 전체집합이고 그분은 부분집합이다. 전체집합인 내 안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부분집합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이때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분집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도 아니한 상태인도도, 자신은 절대 정죄함을 받지 아니한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성령을 받은 것 자체로서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다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고 만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도들의 대부분은 죄와 사망을 이기지 못한 채 산다. 그러다가 그만 죽을 때에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면서 성밖으로 쫓겨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어떤 이는 불못에 던지기도 한다(계22:15, 21:8).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은 엄연히 현실이다.
4. 생명의 성령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사람과 성령이 하나된 바로 그 영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롬8:2에 나오는 '생명의 성령'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놀랍게도 성경 66권에서 성령을 생명의 성령으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은 이 구절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야 한다.
먼저 이 단어를 헬라어 원문으로 본다면 우리말 성경과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성령'으로 나오지 않고, '생명의 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는 '생명'이란 헬라어로 '조에'라는 단어로서, 하나님의 생명이자 아버지의 생명이요, 변하지 않는 생명이요 죽지 아니하는 생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생명을 가진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다. 그러다가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으로 들어오셨다. 그러자 보내신 분은 아버지가 되신 것이고 오신 분은 아들이 되셨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자기 속에 생명을 갖고 있음과 같이 아들에게도 주어 그의 속에도 있게 하셨다(요5:26).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난 이들 중에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을 가진 것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생명을 해방하기 위해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겼다. 이는 자기 안에 들어있는 생명을 모든 사람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요12:24). 그래서 그분은 영이 되셨다. 그래서 부활후 예수께서는 숨을 내쉬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요20:22). 만약 예수께서 홀로 생명을 가진 육체로 존속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아버지의 생명은 오직 아들에게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생명을 나눠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죽음에 넘기시고 생명을 해방하시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기로 하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말했다(고전15:45).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고 계시는 성령님은 실은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후 예수님은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이고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생명의 영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역사하는 것이기에 생명의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헬라어 원문에는 '생명의 성령'이라고 나오지 않고, '생명의 영'이라고 나오는가? 그것은 생명주는 영이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 우리의 영과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고전6:17). 그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하나의 영이 되는 법칙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영 속에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거주하실 수가 있는데, 사람의 영 속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인하여 내 영과 성령이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 연합된 영을 가리켜,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서 사람의 거듭난 영이라고 번역하는 자도 있고, 성령이라고 번역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둘 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롬8:2에 나오는 표현을 '생명의 영'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생명의 성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것이다.
5.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실제적으로 작동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서 작동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먼저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를 사모해야 한다. 갈망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생명의 성령이 나를 주장하도록 그분을 허용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나를 주장하시도록 하려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8:5~6에서 이렇게 말했다.
롬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것은 내가 과연 육신을 따라가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연합된 영을 따라가려고 할 것인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때에, 육신을 따라가지 않고 영을 따가기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주는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이 주는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롬8:5에 나오는 '생각한다'는 동사는 '프로네오'라는 단어로서 그 뜻은 '생각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에 전적으로 마음을 두다. 전념하다. 전적으로 ~을 하고 싶어하다'는 뜻을 가졌다. 그러니까 단지 한 번 스쳐지나가는 생각 정도로 성령을 따라가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것을 강한 의지와 결단을 사용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롬8:6에 나오는 '생각'이라는 단어 역시 '프로네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프로네마'이다. 이는 단지 '생각' 자체를 넘어서 그것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는 성령을 따라는 것에 목표를 두고 그것을 이루려고 포부를 단단히 가지면서, 그것에 전념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을 영에 둔 생각을 계속해서 지속할 때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수 있다. 그러면 생명의 성령이 법이 나를 지배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6. 내가 내 속에 들어온 생명의 영에 집중하고 있다면 내게서는 과연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가?
그렇다면 내가 과연 생각을 육신에 두지 아니하고 영에 두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다시 말해, 내가 지금 죄와 사망의 법을 따라가고 있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성령을 따라가고 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조에)과 평안(에이레네)'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싸나토스)'일 뿐이다. 이는 결국 내가 무엇을 추구하려고 하고 있고 또한 무엇에 전념하고 있는지가 결국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고로 내가 만약 지금 죄와 사망의 법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사망을 맛보게 될 것이고, 내가 만약 지금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결국 생명과 평안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둘의 차이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먼저 사망의 느낌을 말해보겠다. '사망'은 어둡고 쓸쓸하고 냉냉하고 차겁다. 그리고 허무하고 쓰러지고 딱딱하고 메마르다. 그러나 '생명과 평안'은 이와 정반대다. '생명과 평안'은 따뜻하고 온화하며,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며, 밝아지고 소망이 생기고, 파릇파릇하고 신선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지금 죄와 사망을 추구하고 있는지 생명과 평안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이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육신을 따라라고 있는 자는 늘 육신이 좋아하는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가고 있는 자는 늘 성령이 좋아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따라가고 있었으며 과연 추구하고 있었단 말인가?
7. 나오며
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다만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수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영 속에 생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주는 영이신 예수님이자 성령님을 모셔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신 자와 모시지 않는 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만 자기 안에 생명이 예수님 곧 생명의 성령을 모셔들였지만 그분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지 못해서 우리는 죄와 사망에게 눌려 살아온 것이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안에 부분집합으로 들어오셨지만 우리는 이제 그분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부분집합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이다. 연합된 영이 나를 주장하도록 허용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드디어 내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과 평안이 찾아온다. 성령이 내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셨다는 표시이다. 이제 우리들 차례다. 내 안에서 성령의 성령의 법이 활동하도록 우리 자신을 성령께 내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의 열매를 맺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성화의 한 방법인 것이다.
2025년 05월 30일(금)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