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52)] 신약의 거듭난 성도들은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할 수 없는가?(롬12:14~2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by 갈렙 posted Jun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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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IoH95K-DMVs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로마서강해(52)] 신약의 거듭난 성도들은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할 수 없는가?(롬12:14~2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IoH95K-DMVs

 

1. 들어가 

  로마서 12장 1절부터 15장 13절의 말씀은 성도들의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이다. 바울은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기록하였다. 앞부분은 신앙인이 갖춰야 할 신앙과 교리를 다뤘다(롬1:1~11:36). 그리고 뒷부분은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생활과 삶을 다뤘다. 그중에서 로마서 12장 14~21절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핍박자와 원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본문 가운데서 이번 시간에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과연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이 다루려고 한다. 이에 대한 질문과 답은  단순히 '된다, 안 된다'의 이분법적인 답을 넘어서 성경66권이 가르치는 것과 아울러 개인의 신앙 경험을 토대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에 대해 어떻게 대하라고 하셨으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원수들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2.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왜 더욱더 중요한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보다는 사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나 실다. 왜냐하면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구원의 첫출발에 해당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장차 천국에서 들어가서 누리게 될 우리의 지위와 신분 그리고 상을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과거에 자신이 지었던 죄들과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자신의 현실에 저주가 들어왔다고 깨닫고는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과거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중에 어떤 분들은 회개를 하면서도 회개기도문에 나오는 죄를 계속 짓고 있기도 하다. 어서 회개기도문으로 회개하여서 저주를 끝내고 싶은데 동시에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과 가난, 신기와 막힘의 저주가 잘 떠나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혈기분노의 죄를 회개하면서도 혈기가 올라오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면 또 혈기분노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내가 진실로 믿고 회개하여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부터는 진실로 회개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면 진정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진정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3. 신약 성경이 가르쳐주는 말하는 원수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은 어떻게 원수를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약성경의 기록들을 통하여 원수에 대한 가르침을 보게 된다.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예수께서 들려주신 산상수훈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통하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나타난 보복법으로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예수께서 직접 실천하신 삶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을 향하여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이라고 기도하셨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다.

  셋째,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의 삶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60) 그랬다. 스데반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시기질투심으로 인하여 그는 돌에 맞았다. 그러나 그는 돌에 맞으면서도 그들을 향해 저주하는 기도나 저주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산상수훈의 말씀이나 예수님과 그리고 스데반의 실제적인 삶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과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4.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원수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와 죽이려 하는 원수들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그대로 준수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필자도 군대 시절에 고참으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신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신앙을 지켜보려고 군종병이 되고자 했지만 자격미달로 군종병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군생활을 하여서 훈련병시절에 1등을 하여 사단장 표창과 아울러 포상휴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 되어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에 그때부터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다. 고참들이 군기를 잡아보려는 욕심으로 너무 학대를 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종교생활에 참여하자, 고참들이 저녁마다 밤12시가 되면 무저장창고에 불러들여 1시간씩 주먹으로 치고, 머리를 땅에 처박는 등의 얼차려를 실시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날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축구골대로 사용하고 있는 참나무를 가져다가 엉덩이를 친다는 것이 컴컴한 곳에서 잘못 쳐서 허리뼈를 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기절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군제대후 5년이 지났을 때에 허리는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전임전도사 6개월만에 사임을 하고 말았다. 혼자 단칸방에 누워지내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참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딱 1년이 채 되기 전에 허리를 고쳐주셨다. 그러나 그때 망가진 허리는 그대로다. 3번과 4번과 5번의 디스크에 물렁뼈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약 30년을 허리 때문에 무슨 일을 해 보지 못하지 않았다. 여전히 건강하게 살고 있다. 이것은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대신 사랑으로 품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나를 심하게 괴롭히던 한 고참 선임병으로 인해 꼬리뼈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것을 두고 후회하거나 저주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아찔하기만 하다. 그렇다. 우리의 삶에는 이처럼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가야 한다. 

 

5.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저주 기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남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서 시편을 읽어보면 놀라운 기도문을 발견하게 된다. 일명 저주의 시편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시편에서 저주의 시편은 총 3번 나온다. 시편 58편과 109편과 137편이다. 그중에서도 시편 109편에는 원수를 향하여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를 한다. 그런데 그가 누군지를 아는가? 그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 자요 하나님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자였다. 그는 바로 다윗이다. 이 시편의 제목이 아예 '다윗의 시'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저주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는가? 그리고 그 대상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리고 다윗은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을까? 한 번 그것을 들어보라.

 

시109:6-20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a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a 송사하는 자)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16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누구에게 이러한 저주의 기도를 올린 것일까? 결론적으로 보면 그의 시편의 저주기도가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심의 표출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대상자를 향해 복수심으로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린 기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저주의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결정할 일이다. 그러므로 저주의 기도는 단순히 분노의 폭발이다 복수심의 표출이 아니라, 모든 심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에 하나님께 청원하는 신앙고백적 행위였던 것이다. 즉, 인간이 직접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한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말한 원수들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A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A 신 32:35) 20 B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B 잠 25:21 이하)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와 스데반의 기도는 다르다. 저주하는 기도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리 않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나오는 저주기도는 그 자체로는 허용될 수 있겠지만, 신약의 은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영적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스데반이 보여준 것처럼,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6. 나오며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는가? 필자는 6년만에 초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는 과연 무엇이 원수에 대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원수사랑이라는 명령은 단순한 윤리적인 명령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와 축복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약의 성도들은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은, 원수가 변화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바라며 그들을 위해 축복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2025년 06월 27일(금)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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