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로마서강해 보완(01)] 거듭남(중생)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하며, 어떻게 받는가?(요3:1~16)_2025-07-16(수)
https://youtu.be/i7NdHEqlV5M

1. 들어가며 : 온전한 진리를 향한 여정은 어떤 것인가?
성경 66권은 각각의 고유한 빛을 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 그중 로마서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복음의 정수를 담아낸 위대한 서신서로서, 수많은 영혼을 회심으로 이끌어 왔고 기독교 교리의 굳건한 반석이 되어왔다. 그러나 로마서라는 단 하나의 창으로 성경 전체를 조망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전체 그림을 왜곡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다. 특정 교리나 익숙한 가르침의 틀 안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순간,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비추는 풍성한 진리의 빛을 놓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가 제공하는 위대한 통찰을 굳게 붙잡되, 동시에 로마서가 명확하게 다루지 않는 영역들을 다른 성경의 증언을 통해 보완하며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마치 한쪽 눈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넘어, 양쪽 눈을 모두 떠서 입체적이고 온전한 형상을 파악하려는 노력과 같은 것이다. 이 여정의 첫걸음은, 구원론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인 구속과 칭의와 중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로마서에 다루지 않은 ‘거듭남(중생)’에 대해서부터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2. 로마서가 명확히 다루지 않는 주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로마서
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그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롭다 하심(칭의)’를 말씀한다. 그러나 구원의 여정에는 칭의 외에도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또다른 이슈들이 있다. 로마서의 가르침만으로는 그것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주제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럿들을 다루는 주제들은 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들로서, 적어도 다음의 4가지 것들이 있다.첫째, 로마서에는 '거듭남(중생)'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로마서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지를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본성의 변화, 즉 ‘다시 태어남’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둘째, 로마서에서는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로마서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지만, 구원을 위해 필요한 믿음의 필연적 동반자인 회개, 특히 구원받은 성도가 살아가면서 반복적으로 해야 할 반복적인 회개의 의미와 실천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로마서에는 '죄의 실체'와 '영적인 싸움'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로마서 7장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죄의 강력한 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 죄의 배후에 있는 영적 실체, 즉 사탄과 귀신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로마서에서는 단지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권면의 말씀은 있으나, 우리 안팎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과의 구체적인 싸움과 그 방법론에 대해서 알려면 우리는 에베소서와 같은 다른 서신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넷째, 마지막으로 로마서에서는 '구원 탈락의 가능성'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로마서는 어쩌면 하나님의 선택과 견인(堅忍)교리를 통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교리와 견인교리가 로마서 9~11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서 9~11장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위와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처럼 들릴 수가 있다. 그러다보니 성도의 거룩한 삶과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책임이 약화될 위험성이 계속 도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성경들 즉 마태복음과 히브리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 탈락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균형잡힌 구원론을 확립할 수가 있다.
3. 우리가 성경을 보는 시각은 교리의 틀을 넘어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가 로마서가 지는 한계를 인지하는 일은 사실 로마서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 전체라는 더 넓은 맥락 속에서 로마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편협한 교리의 틀에 갇히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특정 교단이나 신학자의 가르침이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단의 교리는 정반대로 정의되기도 하고, 신학자의 가르침은 또 뒤집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판단 기준은 기록된 66권의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몇 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교리를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자들의 교리는 이신칭의를 교리를 기본적인 바탕에 둔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의 여정에 있어서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이지 그것이 완성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이신칭의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서 말씀하는 이신칭의는 사람이 구원의 여정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66권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다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하나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한쪽만을 믿고 주장하다가 다른 쪽을 듣지 않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훗날 자신의 교리에 갇혀 주님의 가르침을 놓침으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지금도 성경 66권을 깨우쳐주시는 성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구원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이야말로 다른 모든 서신서를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서신서의 기준으로 교리를 만들다가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제단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사복음서에서 말씀하셨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4. 구원의 첫 번째 세 가지 기둥은 무엇인가?
구원은 내가 단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진짜 본질적인 구원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데에 있어서 전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우리 죄인을 이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구원의 전체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구원의 여정에 필요한 단계들 중에 전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구원은 구속과 칭의를 통해서 시작되며 중생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후의 여정이 또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구원을 첫 출발을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핵심 개념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구속(救贖)과 칭의(稱義) 곧 법정적 구원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첫째로, 구속이란 예수께서 값(속전)을 치르고 우리를 되사신 사건을 가리킨다. 고로 구속은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로 값을 지불하시고 사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 고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통해서 치러진 일이다. 고로 죄인들이 구속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며, 우리 인간의 그 어떠한 공로나 노력도 여기에 들어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칭의란 이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법정적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가 구속을 받으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된 본성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義)를 전가해준다. 그래서 마치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자인 것처럼 우리를 여겨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과 칭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객관적이고 법적인 기초가 되는 것이다.
둘째, 중생(重生) 곧 실질적 구원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한다. 구원은 사실 법정적 선언에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죄없다고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린 것이지, 구속과 칭의가 곧 그의 영혼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구속과 칭의와 더불어 한 단계 더 나가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중생, 즉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거듭남이 없으면 사실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교회생활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거듭남이 없이 교회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자들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하면 구속의 은혜와 칭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치르신 구속의 사건을 믿어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곧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기 위해 속죄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속죄와 칭의를 통해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자랑할 수가 없다.
5. 중생(거듭남)은 왜 필요하며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는는 2가지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하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피흘려 죽으신 것이 곧 우리 인류의 죄들을 속량하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을 믿을 때에 사람은 구속과 칭의 은혜를 입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곧 그분 안에 들어있는 아버지의 생명을 해방시켜여 우리 믿는 모든 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생명분배를 위한 절차였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후15:45).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구속와 칭의를 받은 자에게 생명을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분배해 주신다. 이는 많은 하나님의 아들을 산출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신을 갖고 있었을 때에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독생자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 나눠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만세전의 경륜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부활체를 입어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을 때에 그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이자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단언하신 것이다. 구속과 칭의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육으로 태어난 것은 육일 뿐이라고 했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윤리적 개선이나 종교적 결단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는 영’이 되시어, 그분의 신적인 생명을 우리 안에 직접 분배하심으로 성취되는 놀라운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분배되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구속, 칭의, 중생이라는 세 가지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그렇다. 구원은 단 한 번의 구속이나 칭의로 완성되거나 종결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구속과 칭의 그리고 중생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working out)’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덮어주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에서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생명 곧 아버지의 생명을 분배해주기 위함이요, 죽어서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생명을 분배해주기 위함이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분배해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을 얻으려면 구속과 칭의와 더불어 중생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지금 죽어도 새 예루살렘 성밖이나 아니면 불못에 던져지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그것을 부인해서는 아니 된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2가지 사건 곧 구속을 통한 칭의와 생명분배를 위한 중생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행위책에 기록된 우리의 죄들이 예수님의 피로 덮어지면서 우리를 칭의를 받게 된다. 죄가 있으나 죄가 없는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생명주는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생명분배가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은 또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을 가만 두지 않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과 뱀들이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자라도 미혹하여 다시 죄를 짓게 함으로 구원에서 탈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후의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5년 07월 16일(수)
정보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