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보완(20)] 왕노릇하는 자의 또 하나의 예표가 있다. 그는 누구인가?(창49:8~12)_2025-08-06(수)

by 갈렙 posted Aug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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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로마서강해 보완(20)] 왕노릇하는 자의 또 하나의 예표가 있다. 그는 누구인가?(창49:8~12)_2025-08-06(수)

https://youtu.be/wdRf7ifQJds

 

1. 들어가며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신분에 대해서도 증언한다. 로마서는 이 구원의 여정과 최종적인 신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특히 ‘왕 노릇하는 자’라는 개념은 사도 요한의 서신, 즉 요한복음, 요한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번 시간에는 로마서 강해의 연장선상에서, 창세기에 나타난 야곱의 아들들의 축복을 통해 ‘왕 노릇하는 자’의 예표를 심도 있게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 땅에서의 삶이 장차 천국에서의 영광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2. 천국에서 성도들이 갖게 될 세 가지 신분은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모두 동일한 신분을 갖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최소 세 가지의 뚜렷한 신분을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둘째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헌신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지위이다.

  셋째는 ‘왕 노릇하는 자’이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며, 이는 가장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권세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는 주로 아들과 상속자에 대한 개념을 다루지만, 왕 노릇하는 자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증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요한계시록 21장 7절은 이기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상속을 받을 것을 말하며, 22장 5절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을 명확히 선포한다. 이 왕 노릇하는 자들은 14만 4천 명으로 상징되는 특별한 무리에 속하며,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뿐만 아니라 성 밖의 민족들 위에서 철장 권세로 다스리는 권세를 갖게 된다. 이는 이 땅에서 죄의 성품을 완전히 변화시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성도들이 성 밖에서 연단을 받는 것과 대조되는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3. 야곱의 두 아들, 요셉과 유다에게 주어진 특별한 축복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열두 아들에게 각각 유언과도 같은 축복을 남긴다. 이 축복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의 두 가지 중요한 예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요셉과 유다이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각자의 분량에 따라 축복을 받았지만, 요셉과 유다에게 주어진 축복은 그 내용과 규모 면에서 독보적이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의 편애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난 인격과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평가이자, 장차 오실 메시아와 그분의 나라를 예표하는 심오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세상의 축복을 받은 자, 요셉
  창세기 49장 22-26절은 요셉에게 주어진 축복을 상세히 기록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는 말씀처럼, 그의 축복은 풍성함과 번영을 상징한다. 야곱은 요셉에게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을 빌어주며, 이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육적인 축복의 최고봉을 의미한다. 요셉이 이처럼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탁월한 인격과 삶의 태도에 있다. 첫째로, 그는 극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형들에게 배신당해 노예로 팔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이는 고난을 통해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둘째로, 그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성숙한 인격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그는 복수하는 대신 그들을 용서하고 돌보았다. 이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한 것이다. 셋째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자신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데 사용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7년 흉년으로부터 애굽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민족을 구원했다. 이는 권세의 진정한 목적이 섬김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처럼 요셉의 삶은 이 땅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며, 고난을 인내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적인 복으로 갚아주시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자, 유다
  요셉이 세상의 축복을 대표한다면, 유다는 영적인 축복, 즉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자의 예표이다. 창세기 49장 8-12절은 유다를 향한 야곱의 예언적 축복을 담고 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예언은 유다 지파를 통해 장차 메시아, 즉 온 세상을 다스릴 진정한 왕이 오실 것을 명확히 선포한다. ‘규’와 ‘통치자의 지팡이’는 왕권을 상징하며, ‘실로’는 평강을 주시는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예언은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다윗 왕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으며, 궁극적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지파의 혈통을 통해 이 땅에 오셨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은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칭하며, 유다에게 주어진 영적인 축복의 최종적인 성취를 확인시켜 준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남유다는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다시 회복되었고, 마침내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했다. 이는 세상적인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이 얼마나 더 중요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4.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과연 어떻게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이처럼 위대한 영적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었을까? 성경은 그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내렸던 세 가지 결정적인 행동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요셉은 생명을 살리는 중재를 기꺼이 자처했다. 그의 첫 번째 결정적인 행동은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할 때 그를 살린 일이다. 다른 형제들이 시기심에 불타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죽이려 할 때, 유다는 그들을 만류하며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창37:26-27) 라고 제안했다. 비록 노예로 파는 것 역시 악한 일이었지만, 당장의 죽음을 면하게 하고 생명을 보존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유다의 이 중재가 없었다면 요셉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고,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둘째, 요셉은 민족과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기희생적인 담보를 선택했다. 그의 두 번째 결정적인 행동은 흉년을 피해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갔을 때 나타난다. 요셉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요구한다.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완강히 거부한다. 이때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43:9). 이 약속은 단순히 말뿐인 약속이 아니었다. 유다는 레아의 아들로서, 평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라헬의 아들들, 즉 요셉과 베냐민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을 지키고, 나아가 굶주림에 처한 온 가족과 민족을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개인적인 감정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발로였다. 하나님은 바로 이 유다의 마음,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을 살리려는 그 중심을 보시고 그를 영적인 축복의 계승자로 삼으신 것이다.

  셋째, 요셉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 끝까지 헌신했다. 그의 세 번째는 앞선 두 행동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 즉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한 헌신이다. 왕 노릇하는 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많은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육적인 생명을 넘어, 영적인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포함한다.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늘에서 가장 큰 상급이 약속된 사역이다. 유다는 요셉과 베냐민, 그리고 온 민족의 육적인 생명을 살리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장차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5. 언약의 계승하는 것과 영적으로 축복받는 것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가나안 정탐 후,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믿음의 보고를 통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는 것을 안다. 이 두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바로 광야에서 불순종으로 쓰러져간 세대를 거슬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계승한 ‘이기는 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왕 노릇하는 자의 또 다른 예표들이다. 특히 갈렙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유다에게 주어진 영적 축복이 어떻게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계승되는지를 보여준다.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준다. 물질적 풍요와 군사적 강성함을 자랑했던 북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고난 속에서도 다윗의 언약을 붙들었던 남유다는 살아남아 마침내 메시아를 탄생시켰다. 이는 세상의 축복이 일시적이고 유한한 반면, 하늘의 신령한 복은 영원하며 그 가치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6. 나오며
  요셉의 삶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성실함과 인내가 어떻게 물질적인 축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유다의 삶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삶이야말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는 비결이며, 장차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영광스러운 지위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부와 명예에 있지 않다. 진정한 성공은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로 인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유다와 같이 남을 살리는 일, 즉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영광스러운 반열에 우리를 세워주실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와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최종적인 소망이자 비전이다.

 

2025년 08월 06일(수)

정보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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