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민족에 관한 운명적인 예정이 정말 있을까?(롬9:4~21)_2018-04-27(금)

by 갈렙 posted Apr 27,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오늘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개인과 민족에 관한 운명적인 예정이 정말 있을까?(롬9:4~21)
https://youtu.be/QeujkJ9eLZE

 

1.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이고도 운명적인 예정 있을까요?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이고도 운명적인 예정이 없다고도 말하는 분들도 있고 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없다고 말하는 자분들 중에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로는 칼빈과 그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그러한 주장들은 있어왔지만 이 두 사람들에 의해 어느정도 정리가 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 중에서는 과연 누가 더 성경적이며 누가 더 옳은 주장을 한 것인가요?

 

2.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론적으로 인생에 있어서 운명적인 예정하심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떤 안배는 분명이 있기는 있습니다. 이러한 안배에는 2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부모(조상)로부터 물려받은 안배가 있으며, 또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미리 예정된 안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컬어 "사역적인 안배(예정)"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어떤 특징이나 성격, 지혜나 명철 등이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그릇으로 쓰시겠다고는 하는 안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행9:15). 그러나 운명적인(숙명적인) 예정하심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간의 선택에 맡겨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에 맡겨두셨기에 우리가 결정하고 나가야 할 영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을 오늘도 개척해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자신이 가꾸어가는 것이요 그것을 만들어가고 찾아가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보십시다. 에서는 들사람으로서 익숙한 사낭꾼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야곱은 얌점한 사람으로서 늘 장막에 거주하면서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생이 꼭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두 사람의 인생이 크게 뒤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요?(신30:19~20)
신30:19-20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3.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거나 잘못 인도받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뱀의 형상으로 에덴동산에 침투함으로 인간의 삶은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나타나 인간을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망과 저주를 택하는데에 잘못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제자였던 베자는 인간이 타락할 것이라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의미로 선악과를 따먹을 것인가 따먹지 않을 것인가를 그들의 선탟에 맡겨두신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자 조장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타락 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여전히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겨 두셨는데, 그것은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이 살기 위하여서는 생명과 복윽 선택하고, 이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신30:19~20). 결국 인간이 파멸로 치닫거나 멸망당하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셔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칼빈처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중예정 즉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해놓으시고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 예정해놓으셨다는 주장은 과연 성경적이며 옳은 주장인가요?

 

4. 구원에 있어서 개인적인 어떤 예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단 한 건도 그러한 사례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어떤 특별한 안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에게는 우선적으로 어떤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그것 자체가 멸망과 구원을 결정해주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만세전의 개인예정은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자신의 민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을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5.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에게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주어서 그것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 메시야를 낳게 하기 위해서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민족(여인들의 태)를 통해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것 뿐이지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구원하기로 만세전에 예정해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마22장에 보십시오. 거기에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오는데,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여기에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잔치에 초대받은 은혜가 있을 뿐이지, 이들도 초청된 잔치에 참여할 것인지를 본인 스스로가 결정해야 될 사항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다 본인의 몫이지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때 생명과 복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정하는 자는 결국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고 마귀를 따르는데에 사용한다면 그는 결국 저주받고 멸망받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결정이나 선택에 있어서(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는 것이 또 한 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나와 내 후손들의 결정이나 선택에 있어서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면 그것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중보로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주셔야 할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꼭 구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더 주시는 것 뿐입니다(그것만해도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시 마지막에 가서는 또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결단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우리에게 듣는 말씀들 중에서 어떤 말씀을 내가 계속해서 들을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나의 후손, 국가와 민족, 교회와 가정을 위해 무슨 말씀을 듣고 얼마나 중보기도할 것인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듣는 말씀대로 살아가며, 중보기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상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18년 4월 27일(금)
2018년 남북정상회담의 날에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Articles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