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교회(로마카톨릭)와 사데교회(종교개혁)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으려면(계3:1~6)_2018-07-11(수)

by 갈렙 posted Jul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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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두아디라교회(로마카톨릭)와 사데교회(종교개혁)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으려면(계3:1~6)

https://youtu.be/hlWJxK9cVrY

 

1. 요한계시록에 2~3장에 나오는 두아디라교회와 사데교회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 교회입니까?

 

2.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역사적인 해석법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두아디라교회는 중세로마카톨릭시대(A.D.590~1517)의 교회상황을 의미하고,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시대(A.D.1517~)의 교회상황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두아디라교회가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고, 음행해도 상관없다고 당시 주의 종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데교회는 살아있다고 하는 명성은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죽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데교회는 정통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실 그 신앙을 붙들고 있다가는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위기에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나 사데교회는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3. 두아디라교회와 사데교회의 공통점은 소아시아일곱교회 중에서 둘 다 주의 종이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앞에 나오는 버가모교회(로마국교시대, A.D.313~590)는 비록 성도들은 타락했으나(발람의 가르침을 받아들임) 주의 종은 타락하지 않았던 교회였는데, 두아디라교회나 사데교회는 주의 종이 타락한 상태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중에서 두아디라교회는 주의 종들이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성도들을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끌고 가고 있었고, 사데교회는 주의 종들이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정통신앙이라는 것이 오히려 구원받기 어려운 구원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두 교회의 차이점은 두아디라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에게 징계(본인에게는 질병을, 같은 동료에는 환난을, 자녀들은 사망의 고통)를 내렸기 때문에(계2:22~23) 자기들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사데교회는 주의 종들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자기들이 뭔가 잘못가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습니까?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미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채 있었으나 그 이름이 지워질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까?

 

4. 사데교회는 2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은 지 오래되었으나 자기들에게 믿음에 따른 온전한 신앙의 행위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었는데도 괜찮다고 가르쳤으며(계3:2), 또 하나는 범죄로 인하여 자기들의 옷이 더럽혀져 있는 데도 불구하고 회개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계3:4). 다시 말해,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면 반드시 믿음에 따른 선한 열매가 나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기만 한다면 그러한 선한 열매들이 없어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죄를 회개하지 않아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불러내신 만큼 자신의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하나님께서 예정하신대로 간다고)고 가르쳤기에,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른 선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이며(약2:26),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불못에 던져진다는 것(계21:8)이 성경의 가르침이자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으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범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 자기들의 겉옷이 더럽혀져 있어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에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소수이지만 누가 그나마 흰 옷을 입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5. 주님께서는 사데교회의 상황에서 구원받으려면 먼저는 자신의 신앙은 온전한 것인지를 점검하라고 하셨으며, 또한 지은 죄들을 낱낱이 회개하여 자기들의 더럽혀진 겉옷을 빨아 희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소수이지만 사데와 같은 지역에 그런 자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런 소수의 사람들이 사데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데와 같은 지역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계3:4원문참조). 이것은 두아디라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아디라 지역 안에 있었으나 두아디라교회 안에 속해 있는 않는 자들이 소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거짓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자들이었고 사탄의 깊은 것들을 간파하여 거기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계2:24~25). 결국 두아디라교회의 상황이나 사데교회의 상황하에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의 종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아닌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같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바른 구원론신앙에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의 종이 하는 말이니 그냥 맞겠지 하면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성경에서 나온 말씀이며, 바르게 해석한 것인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어떻게 들었으며 받았는지를 기억하여(믿음과 회개로 구원받는다)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하고, 단번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사데도시가 2번 점령당했는데, 그때는 바사왕 고레스의 병사가 사데의 보초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고서 도시를 성 위에 올라가는 방법을 깨닫게 됨으로 그 성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지금 어디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성경을 유심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이신칭의의 구원론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칼빈의 예정론이 어디에서 무엇이 틀렸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신칭의는 구원을 열어가는 여정의 시작인 것이지 결코 완성은 아닙니다. 예정론은 개인의 쓰임(사역)에 대한 예정인 것이지, 결코 개인의 구원에 관한 예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가 무릎을 치면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고 사도들이 받아서 전해준 구원관은 오직 "믿음과 회개"를 통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2018년 7월 1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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