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나 아니면 어느정도 남아있나?(계3:19~20)_2017-06-19

by 갈렙 posted Jul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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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전적으로 무능하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지 아니하시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결국 전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은혜가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3:20에서 왜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밖에서 서서 기다리고 계시셨던 것일까? 전능하신 능력으로 문을 박살내고 들어가셔서 인간을 구원해내셔야 하지 않을까?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그동안 잘 다루지 못했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성경적인 접근을 시도해보자.

 

1. 들어가며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파괴되었는가 아니면 파괴되기는 했어도 어느정도까지 남아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초기교부 어거스틴(A.D.354~430)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 루터(A.D.1483~1546)는 "인간에게 만약 자유의지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종속되어있는 노예의지일 뿐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자기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의지는 없다"고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종교개혁자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구원에 있어서 전적인 무능상태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구원을 위해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은총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바른 적용이었을까? 오늘 이 시간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가 어느정도 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보고, 우리의 자유의지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그리고 전적으로 무능한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롬3장의 말씀을 인용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래서 이 세상 사람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는데 하나도 없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선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말이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매월 일정금액을 헌납하고, 재산을 기부하고 죽는 등의 선을 행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이 틀린 것인가? 아니다. 성경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자가 성경말씀을 잘못 인용하고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롬3:10~12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롬3:9에 나와 있듯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 죄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근거로서 롬3:10~12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구약에 나와있는 성경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롬3:10~12의 말씀은 어디에서 인용한 것인가? 그것은 시편14:1~3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인용된 대상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시14:1)다. 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특별히 악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단 하나의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과장된 인용이다.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결국 구원에 이를만한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지은 죄를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 죄아래 있는 것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인용이요 잘못된 성경적용이다.

 

3.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 정도 남아있는가?

  그렇다면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정도 타락했으며 어느정도 약해져 있는가? 사도바울은 롬7장에서 인간의 자유의 타락정도를 이와같이 언급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18-21) 그렇다. 사람에게는 선함도 가지고 있지만 악도 같이 가지고 있는데, 아담의 범죄이후 타락한 인간은 선보다는 결국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진단이다. 그렇다. 타락한 인간이라도 선을 아주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도 있으나 결국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음을 말해준다. 만약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의 기준이나 사회법이 없고 양심대로 전혀 행하지 않아도 된다면, 자기 마음대로 살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빼앗고 강포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타락이후 태어난 가인의 행동이다. 가인은 인류 가운데 최초의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게 잠재된 죄된 본성은 그의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결국 돌로 쳐죽이는 일까지 서슴치 않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렇다.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타락이후 파괴되었다. 악에 의해 선이 잠식당해버린 것이다.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악이 뛰어들어 눌러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잔인하게 악해지지 아니한 이유는 사회도덕이 있고 종교적인 규율이나 국가적인 법이 있기 때문이다.

 

4. 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어느 정도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진단해주시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상태를 진단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인데, 사람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는 것이다(마12:30).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 42장에 나온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42장에서는 인간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사42:3)"이라고 했다. 그렇다. 인간은 상한 갈대다. 그대로 놔두면 반드시 꺾여져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이다. 가만히 놔두면 그 등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와서 갈대를 세운 뒤에 싸매준다면 이 갈대는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갈대요. 누군가가 와서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채워주면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는 등불인 것이다.

 

5. 타락했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것들 3가지는?

  이러한 현재 인간의 상태에 대한 좋은 예화가 있다. 인간은 물에 빠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헤엄을 치고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여기에 살아나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부르짖어 외치는 것이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에게,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에게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하여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정도라면 하나님께서도 굳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는 자신에게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라고 하신다(렘29:12~13, 사55:6).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부르짖고 기도하고 구하고 찾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해야할 몫이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께서 해주실 몫이 아님으 알아야 한다. 그것까지 하나님이 대신해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려서는 아니 된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읽어보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부르실 때에는 주저없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하신다(사55:1~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주님께로 나아올 사람들에 대한 자격에 제한을 두시지 않으셨다. 구약시대에는 일시적으로 유대인들만을 초청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이후에는 모든 조건을 다 철폐하셨다. 누구든지 구원얻기를 원하는 자는 값없이 와서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7-38)"

  셋째, 우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하라고 하신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양심이 있고, 사회적인 법률도 있고, 종교적인 규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돌이켜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것을 주문하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0-32)",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그렇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우리 스스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할 것인가 말 것인지를 우리가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의지는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구원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어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인식하고 있어서, 자신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또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인간은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가 바로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의 실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은 전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책임은 있는 것이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주님을 찾고 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돌이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대신해주는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긴 영역이다. 이것까지 강제하지 않으신다.

 

6.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신약성경의 증거는 무엇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 가장 잘 표현해주는 문구가 신약에도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3:20의 말씀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렇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시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신다. 우리 인간이 가진 권한을 강제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그분은 밖에서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분은 전능자이기에 집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 사람을 구해낼 수도 있으시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고 전능하신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손길을 뿌리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우리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아니 전능자이신 주님께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은 강한 자가 자신이 약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 행위를 할 때 뭔가를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7. 나오며

  그러므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무능하기에,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아니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하나님이 다 해주시고 그분은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인간의 능력의 한계로는 우리 스스로를 절대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수영도 하지 못하는 자가 물에 빠졌다고 가정해보자. 어찌 스스로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물에 빠진 우리가 부르짖어 소리침으로, 자신을 해달라고 구원자를 향해 외칠 수는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며, 죄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주님께 아무런 도움의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주님이 자꾸 와서 우리를 주시면 사탄이 참소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호소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그 죄값으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아는 자는 반드시 주님께 살려달다고 외쳐야 한다. 그분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마음 문 밖에 서 언제부터 그곳에서 다려왔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여 자신의 험난한 인생에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기를 기뻐하시며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써서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다음의 질문에 답해봅시다>

1.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초기교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루터의 견해는 어떠했었나?
2.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느정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인가?(롬7:18~21)
3.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어떠한 것인가?(사42:3)
4. 인간이 비록 타락했어도 인간에게 남아있는 자유의지는 어느정도까지는 되는가?(렘29:12~13, 사55:6,1~2, 겔18:23,30~32, 사55:7)
5.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은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나?(계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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