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강해(04) 모세를 불러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출3:1~22)_2021-08-23(월)

by 갈렙 posted Aug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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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j6WaC3hbOrM

모세는 40년동안 광에서 양떼를 치며 살았다. 그것도 40세부터 80세까지 말이다. 그러니 이제 그는 자신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여호와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누군지를 가르쳐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뜻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면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때도 말씀하셨지만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을 붙든다면, 우리는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며, 영이 살아서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든든한 보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어느날 훅~하고  불어버리면 날아가 없어질 것들이다. 절대 초월자요 창조주이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이 당신의 주인인가? 사실 그분을 붙드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이제 모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러 가보자.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출애굽기강해(04) 모세를 불러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출3:1~22)_2021-08-23(월)

https://youtu.be/IeD8Wj2BP0Y

 

1. 들어가며

  성경에 보면 어떤 인물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세히 기록되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다. 그러나 성경에는 모세 외에도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베드로, 사도바울 등의 부르심에 관하여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게서는 언제 어디서 왜 그를 부르시는가?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모세를 80세에 불러내신다. 그때는 그가 40년간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를 돌보고 있을 때였다. 그는 왜 부름을 받았으며,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순간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부여받았는가? 이때 모세의 모습은 매우 겸손하다. 40년전의 혈기가 가득했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나온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스라엘백성에게 자기를 보낸 하나님이 누군지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자,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을 알려주면서,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모세의 소명과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관해 좀 더 주의깊게 살펴보고자 한다.

 

2. 모세는 어디서 어떻게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

  모세는 어디서 언제 부름을 받았을까? 성경에 보니, 그곳은 광야였다. 그리고 그때는 모세가 시내산 근처 광야에서 미디안사람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출3:1). 그때 모세의 나이는 벌써 80살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양이나 치고 있는 80세의 노구를 그때에 불러내신 것일까? 그가 낳는 첫째아들의 나이가 벌써 38세나 되었는데, 왜 젊은 게르솜을 부르시지 않고 이제 아무런 소망없이 지내고 있는 노구를 불러내신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을 쓰신다는 것이다. 모세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애굽왕궁에서 40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인품을 갖추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했다. 그가 실력을 갖추기 위해 훈련받은 곳은 장차 자신이 들어가 이끌어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이자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고 있는 바로의 궁전이었다. 그리고 그가 인격을 다듬었던 곳은 광야였다. 왜냐하면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40년동안 광야에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현재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 우리가 자라난 장소까지도 다 당신의 쓰심을 위해 안배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낸 순간은 불이 붙어 있으나 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였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타서 없어지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먼저 구별시키신 후에 그에게 사명을 주신다. 그를 불러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출3:5). 그리고 그 순간 모래 위에 신발을 벗어야 했다.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빤히 바라보고 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볼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딤전6:16). 또한 그분만이 죄가 없으시고 그분만이 영광스러우시며, 그분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레11:45, 사6:3).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룩한 소명을 주신다. 그것은 가서 노예상태로 고통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민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라는 것이었다(출3:9~10). 왜냐하면 그들이 이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해 주셨던 땅에 들어갈 때가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의 족장들이었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은 어디였는가? 그곳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라고 하셨다(출3:8). 또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는데(출3:8), 그 땅은 당시 가나안 일곱족속(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 기르가스족속)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그런데 사실 가나안땅은 일부만 젖과 꿀이 풍성하게 날 뿐 모든 곳이 다 그러한 장소가 아니었다. 광야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왜 시내광야의 모래밭 한 귀퉁이가 갑자기 거룩한 장소가 되었는지를 이해했다면, 가나안땅이 왜 갑자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셨기 때문이요,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우벤자손 중 다단과 아비람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가나안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애굽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다(신16:13).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물이 풍성하여 목초지가 가득한 애굽땅이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 땅이 어떤 땅이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면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왕으로 대변되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아무리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하더라도 척박한 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척박한 땅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가?

 

3. 하나님은 다 아신다.

  모세에게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사실은 여호와의 천사의 모습을 하고 내려왔다.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모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출3:2). 그러므로 그때 여호와의 천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천사의 입을 통해서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여호와의 천사를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 두 분이나 세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에 올라가 보라. 거기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따로 만나게 될 것인지를 말이다. 아니다. 천국에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도 한 개뿐이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여호와의 천사일 뿐이다. 그런데 바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를 쓰시기 위해 그의 천사를 보냈고 그의 천사의 입술을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의 천사에서 나온 음성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 인간의 속내를 속속들이 감찰하고 계시는지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그들이 부르짖는 것을 들었으며, 그들의 근심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출3:7). 그렇다. 그분은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며 알고 계시다. 그분은 안 보고 계시는 것이 같으나 다 보고 계시며, 우리의 신음소리라도 안 듣고 계시는 것 같으나 다 듣고 계신다. 그분은 지금도 모든 사람 각자에게 붙여놓은 천사를 통해 인류의 모든 사항을 다 듣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러면 그분이 들으신다.

 

4.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모세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던 모세의 반응은 생각 이외로 아주 겸손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작고 초라한 사람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서 바로에게 가며, 또한 대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고 되물었기 때문이다(출3:11). 그렇다.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지식과 능력같은 힘들이 다 빠진 상태였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모든 일을 하고 나서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광야에서 40년의 훈련을 마친 모세는 이제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모세와도 함께 하여 모든 일을 행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누구라고 가르쳐 주셨는가?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질문을 받았고 답을 해야 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더러 누가 보냈느냐며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른지 대답을 가르쳐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지창조 이후 B.C.1446까지 단 한 사람도 묻지 않았던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를 가르쳐주신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혹은 야훼, 야웨)"의 이름이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우리는 모세에게 가르쳐준 그분의 이름의 뜻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이다. 이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혹은 "나는 ~라고 하는 나다" 라는 뜻이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I am that I am"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아쉐르"는 관계대명사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은 참으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이시다. 그분만 원인이 없이 존재하는 분이요, 스스로 존재하시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만이 피조물과 달리 절대초월자로서 영원히 혼자 스스로 계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분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하시어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캐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하는 분도 되시지만 그분은 다른 것들을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창조주요, 모든 것을 창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능자이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약에 들어와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요8:24,28,58). 구약에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신 그분이 피흘려 죽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신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천국에 가면 그분이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계22;1,3). 그분이 바로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를 성전삼고 거하고 계신다.

 

6. 하나님은 왜 한사코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시는가?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왜 한사코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하시는지를 살펴보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소개하실 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즐겨사용하신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 거룩한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등의 표현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사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먼저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2가지를 약속하셨다.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자손번성의 축복과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것의 처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창12:2, 13:16, 15:5). 그리고 그 언약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내려갔다(창26:4). 그리고 또다시 손자 야곱에게 내려갔다(창28:14, 46:3~4). 그리고 야곱의 때부터 자손번성의 약속은 성취되기 시작하였고, 그후 430년후에는 가나안땅의 약속까지 성취되기에 이른다. 즉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는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둘째, 하나님은 경륜적으로 역사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처럼, 그분의 역할을 각각 따로 감당하시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독자이삭을 모리아산 제단(골고다)에서 번제로 바치려 한 자였고, 독자 이삭은 모리아산에서 자신을 하나님께서 드린 자였으며, 야곱은 12아들로 번성하여 그 축복을 이어받은 자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성취하시고 그것을 효력있게 하신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신다.

  셋째,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활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이다(마22:31~32). 육신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도 살다가 죽었고 이삭도 죽었으며 야곱도 죽어서 막벨라굴에 묻혔다.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는 자들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산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늘 말씀하셨던 것이다.

 

7. 나오며

  하나님은 광야에서 양떼를 치고 있는 80세의 노구에게 찾아오셨다. 그것은 그에게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시기 위함이었다. 모세는 자신은 잘 몰랐지만 이미 40년동안 실력을 쌓았으며, 다시 40년동안 훌륭한 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신을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자를 들어쓰신다. 그래야 자신이 맡은 사명을 완수한 후에도 자기의 업적이라고 자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기를 보잘 것 없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신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절대초월자요 영원한 자이며,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는 전능자요 창조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절차를 따라 이루시는 분이자, 모든 믿는 자들을 천국에서 살게 하시는,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다름 아닌 신약에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전능자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자. 그러면 우리도 언젠가는 모세처럼 쓰임받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8월 1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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