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서강해(04) 우연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가장 위대한 섭리의 시간(룻1:22~2:7)_2021-11-12(금)

by 동탄명성교회 posted Nov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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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WbeI3iujpYU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룻기서강해(04) 우연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가장 위대한 섭리의 시간(룻1:22~2:7)_2021-11-12(금)

https://youtu.be/WbeI3iujpYU  [ 혹은 https://tv.naver.com/v/23599444 ]

 

1. 인생의 성공의 잣대는 무엇인가?

  인생의 성공 잣대는 잘 사는 것이요 건강하게 사는 것일 수 있으며, 자녀가 잘되는 것일 수 있다. 재력자와 권력자가 되는 것,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 자녀가 출세하는 것 등은 인생 성공의 잣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생 성공의 잣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보이는 물질세계에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된 성공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의 영원한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곧 인생 성공의 열쇠는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며 결국에 나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내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의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오미는 처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으로 이주할 때에는 풍족하게 나왔으나 다시 고향으로 갈 때에는 비어 돌아가게 되었으니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그녀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 중에 가장인 자신의 남편을 잃어버렸고 자기의 두 자식을 잃어버렸으니 확실히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그녀는 2가지를 붙듦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째 그녀는 회개를 붙들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녀는 효심이 가득하고 신앙이 좋은 며느리인 룻을 데리고 돌아왔으니 그녀는 진짜 복된 인생으로 바뀔 수가 있었던 것이다. 

 

2. 룻이 이삭을 주우러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된 것은 우연인가?

  시어머니와 룻이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왔지만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그들에게 당장 무엇이라도 먹을 것이 필요했기에, 며느리 룻은 곧바로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이삭을 주우러 밭으로 나간다. 왜냐하면 그때가 마침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초실절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날 찾아간 곳은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유력한 자였던 보아스의 밭이었다. 보아스는 당시 재력있는 유지였다. 그래서 그는 큰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로 그해에 추수하는 일들을 직접 보려고 자기의 밭으로 나간 것이다. 그런데 그 밭에 룻이 와서 이삭을 줍고 있었다. 성경은 말한다. 그녀가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은 '우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곳에는 '마침' 보아스가 와 있었다고 말이다(룻2:3~4).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나고 있는 귀중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3.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우리는 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가?

  룻이 우연히 그 밭에 갔으나 보아스는 일부러 그 밭에 나갔다. 어찌되었든 보아스와 룻의 첫 만남이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날 보아스는 다른 과부들도 와서 이삭을 줍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와서 이삭을 줍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룻은 달랐다.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모압 지방에서도 괜찮은 집안 사람이었기에 때문에 그녀의 옷차림과 움직임은 전통적인 베들레헴 사람과는 조금 달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젊었었다. 예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금방 보아스의 눈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보아스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를 사환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그는 그녀가 모압 지방 사람이었는데 말론에게 시집와서 남편이 죽은 뒤에 시어머니를 따라온 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두고 왜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이 일이 장차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따르려는 이방인들을 취하여 자신의 아내를 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한 밭에서 만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가지였다. 이것들이 다 맞아 떨어져서 룻과 보아스가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첫째, 그때가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에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기간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룻과 보아스는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둘째, 보아스는 나오미가 내놓은 엘리멜렉의 밭을 살 수 있을 만한 재력가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 밭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보아스와 룻은 못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셋째,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율법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고 한다면 룻을 현숙한 여자이자 매우 신앙이 돈독한 여자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넷째, 그의 마음이 약자들을 배려하는 긍휼과 인애(헤쎄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부자라고 해서 그의 인심이 후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신앙도 좋았던 보아스는 인품도 훌륭하여 약자들을 배려할 줄 아는 자비로운 자였던 것이다. 다섯째, 아마도 그가 나이는 좀 들었겠지만 그때까지 총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엘리멜렉의 밭을 살 수는 있어도 룻을 부인으로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하나님의 간섭이요 섭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4. 룻과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실 룻과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둘이 만나게 하여 결혼시킴으로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고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 만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당시 룻과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첫째, 먼저 보아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엘리멜렉의 친족이었고, 그 마을의 유력한 재산가였으며, 자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도 귀히 여길 줄 아는 부드러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더욱이 그는 긍휼(헤쎄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약하며 아프고 불쌍한 자를 잘 돌아보는 자였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며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오미와 룻이 가진 기업(토지)을 물러줄 수 있는 능력가로서, 순번이 2번째인 사람이었다. 그러면, 룻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에 그는 과부였고, 이방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인격이 고결하였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며,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낮은 곳에 내려가서 일도 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순종적이었으며, 효심이 가득했고, 무엇보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고향과 친적과 아비집이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신앙이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으며, 최고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신앙이 좋았던 사람이었기에 서로가 의지가 되었고 기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5. 신앙하는 영적인 감각이나 신앙의 결단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신앙이 좋았던 보아스가 나중에 신앙을 갖게 된 사람 룻과 만났다는 것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아닌가 생각되어 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보아스나 룻이 서로의 처지를 알고 있었지만 둘 다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사실 보아스라는 이름과 룻이라는 이름 자체가 들려주는 교훈도 상당하다. 사실 성경에서 우연하게 등장하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보아스의 이름을 보자. '보아스'라는 말은 그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변 나라의 말로 풀이하면 '복된 자, 힘센 자'이다.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어의 어원으로 풀어보면 그 이름의 뜻은 '재빠름, 민첩함'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누군가가 영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을 때에, 즉시 자기의 것이 되게 하는 자는 그것에 대해 민첩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보아스는 이러한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룻'이라는 이름은 '친구' 혹은 '우정'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녀는 처음부터 결코 시어머니를 배신하거나 떠날 수 없는 사람으로 아예 안배가 되어 있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도 영적으로 민감하여 하나님이 보내시는 싸인을 금방 헤아릴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년 11월 12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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