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강해(01) 아프고 시린 마음 활의 노래에 실어보내다(삼하1:1~27)_2022-01-05(수)

by 동탄명성교회 posted Jan 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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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GO1523QJ8pY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01) 아프고 시린 마음 활의 노래에 실어보내다(삼하1:1~27)_2022-01-05(수)

https://youtu.be/GO1523QJ8pY [혹은 https://tv.naver.com/v/24488381 ]

 

1. 다윗은 사울왕의 죽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다윗이 아말렉으로 가서 시글락의 자기 주민들을 구해온 뒤 삼 일째 되는 날, 한 사람을 접하게 된다(삼하1:1~3). 그는 사울의 진영에서 나온 청년이었는데(패잔병으로서 아마도 고용된 용병이었던 것 같다). 사울왕의 소식을 가지고 일부러 다윗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전해 준 소식은 슬픈 소식이었다. 이스라엘의 군대가 패배하여 흩어졌으며 자기도 그들 중에 한 명이었는데,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그만 죽임을 당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물로서 사울왕의 왕관과 사울왕의 팔찌를 가져왔다고 했다(삼하1:10). 

 

2. 아말렉 청년의 보고는 진짜인가 거짓말인가?

  그런데 아말렉 청년의 보고는 모두 것이 다 진실은 아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직접 다윗의 대적자인 사울왕을 죽였다고 보고함으로써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서 거짓말을 지어서 말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으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아니면 어떤 특별한 혜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다윗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자기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는데, 사울왕이 자기의 창에 의지하고 있었고 전차와 기병이 그를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울왕은 중한 부상을 입었기에 자기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뒤따르는 자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가 어차피 죽을 것을 알아차린 아말렉 청년이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왕관과 팔찌를 벗겨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거짓말은 금방 파악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길보아 산은 험악해서 전차가 지나갈 만한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왕 곁에 부하들이나 병기든 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사울이 굳이 아말렉 용병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사울왕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자랑하기 위해 거짓말을 보태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그가 길보아 산에 갔을 때에는 사울은 이미 죽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사울의 머리 위에 있는 왕관과 그의 갑옷을 보았고, 그것을 벗겨 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보고는 사무엘상 31장의 기록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31장에 의하면, 사울은 적군이 쏜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게 되었으며, 병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으나 자신을 죽이지 아니하므로 스스로 자기의 칼에 넘어짐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3. 아말렉 청년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고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다윗은 비통한 마음을 금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날, 그는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을 하였다. 그러자 부하들도 같이 그렇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그 소식을 전한 청년을 부른다. 그리고 그가 아말렉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하를 시켜 그를 죽이도록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불사르고 자기의 가족들을 붙잡아 갔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감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다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에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다. 한 번은 엔게디의 동굴 속에서 있었고 그리고 또 한 번은 하길라 산에서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을 함부로 해치는 것은 그 종을 세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사울이 죽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심으로 죽게 될 것이고(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아니면 전장에서 죽게 되든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삼상26:9~11). 그런데 적군도 아니라 아군으로 고용된 청년이 사울을 죽였다고 했으니, 이는 그가 저질러서는 안 될 일임에 분명했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죽임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의 거짓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4.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접한 다윗이 그때 지어 불렀던 애가(조가)는 무엇이었는가?

  사울왕과 요나단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가슴 깊이 슬퍼한다. 이때 다윗은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조가(슬픈 노래)를 지어 부른다. 일명 '활의 노래'라고 한다(삼하1:17~18). 그렇다면 왜 다윗은 그 노래를 '활의 노래'라고 칭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왔다. 첫째는 사울이 그만 마지막에 가서 적의 궁수들이 쏜 화살에 맞아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삼상31:3). 둘째는 요나단의 활이 다윗을 구해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삼상20:17~42). 셋째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원래부터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었는데, 베냐민 지파의 왕과 왕자가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대상8:40). 어떤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활의 노래(삼하1:19~27)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은 두 용사의 죽음을 두고 견고한 화살이 꺾여진 것에 비유(대유법)함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요나단이나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후손으로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두 장수(사울과 요나단)가 하루 아침에 비참하게 죽게 된 것을 두고 두 개의 건장한 활이 꺾여진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5. 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슬픈 것인가?

  사실 그날 길보아 산에서 요나단이 죽은 것은 실로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울은 회개하고 죽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먼저 요나단의 경우를 보자. 그는 비록 아버지와 의견 충돌을 갖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아버지를 존중하고 아꼈기 때문에 끝까지 아버지의 곁을 지키려고 하다가 죽은 것이다. 아버지를 피신시키고 적들을 막아 내다가 그만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슬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요나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다윗보다 나이가 약 20살 정도 많은(아마도 당시 50세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이때 사울왕은 80세였다) 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그래서 차기 왕권은 요나단에게 넘어올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도 넘어갈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기꺼이 다윗으로 하여금 왕이 되는데에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이처럼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멋진 왕자였던 것이다. 그랬던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의 신변을 지키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다윗은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슬픔이 다윗에게 강물처럼 밀려왔을 것이다. 그러자 쓰라리고 아픈 마음을 다윗은 활의 노래로 만들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의 죽음도 역시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슬퍼한 것이다. 다윗의 슬픔에는 그가 죽기 전에 회개하고 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깊이 서려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윗의 충정심은 고스란히 그의 부하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으며, 그의 부하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종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잘 보고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2022년 01월 0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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