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29)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믿음(행7:1~16)_2022-08-12(금)

by 갈렙 posted Aug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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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URL https://youtu.be/KykgKMpem7o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29)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아브라함의 믿음(행7:1~16)_2022-08-12(금)

https://youtu.be/KykgKMpem7o  [혹은 https://tv.naver.com/v/28578421 ]

 

1. 스데반이 공회석상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 가운데 잘못된 점은 무엇이었는가?

  스데반이 거짓고소자들에 의해서 산헤드린 공회석상에 서 있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육체의 할례를 받았던 자기자신들은 이미 선택받은 사람이며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화려하게 보이는 성전을 우상처럼 떠받들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자기들은 천사가 전해준 율법도 귀하게 여긴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는데도 그 예수님을 배척하고 결국 죽였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은 형식주의에 완전히 물든 나머지 하나님의 뜻과 실제에 대해셔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2. 스데반이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깨우치기 위해 설교에 첫번째로 등장시킨 인물은 누구였는가?

  그러자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깨우쳐주기 위해 첫번째로 아브라함을 등장시킨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스데반이나 공회회원이나 다같이 존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스데반은 공회에 있는 장로들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행7:2)" 그랬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부형들' 곧 '남자 형제들과 아버지들이여'라고 치칭함으로서, 먼저는 자신을 낮추었으며, 또하는 공회원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그들에게나 스데반에게나 다같이 존경하는 인물이자 그들의 조상이며 한 혈통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이 갖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들이 갖고 있던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3. 스데반이 아브라함을 맨 처음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성전과 모세의 규례로 자신을 고소했던 자들 앞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꺼냈던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성전과 모세의 규례가 형식주의로 흘러가서 이제는 거의 절대시되고 있고 우상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성전 건물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었으며, 모세의 규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전을 짓게 하신 목적과 모세를 통해 일러준 율법규례의 본래적인 의도에서 많이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과 스데반 자신에게 있어서 공통된 영역 곧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꺼내어 그들이 현재 어떤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자 공회원들이 아브라함이 가진 삶과 믿음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잡힌 것 하나 없었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따라갔는데, 지금의 세대 사람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붙들고 있다라는 것이다. 

 

4.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보이지 않고 약속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아브라함은 자신의 손에 어떤 것이 쥐어지지 않았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 그 증거는 이렇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에 쥐어진 것 하나 없이도 그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었다. 둘째로 어느 덧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그곳에서 발 붙힐 만한 땅도 유업으로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한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다는 것이다(롬4:19~21). 셋째로, 중간에 잠깐의 실수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이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할례를 행했는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기꺼이 감행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일주일동안 꿈쩍도 하기 어려운데, 아브라함은 자신과 13살된 이스마엘과 자기 밑에 있는 모든 남종들 약 1천여명에게 모조리 할례를 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만약 그때에 적이 쳐들어오면 한꺼번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과 자신의 집과 자신의 종들의 보호자요 수호자인 것을 믿었기에 그렇게 행돋한 것이다. 넷째로, 그가 살아있을 때에 약속의 아들로서는 이삭 딱 한 사람만 곁에 있었지만 그는 약속의 땅과 자손번성의 약속을 그의 아들에게 기업으로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이제 100세가 되어 기적처럼 얻은 아들이었던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혀 흐트러뜨림 없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우상이 될 만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100세 낳은 독자 이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아들마저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니 그냥 내어드린 것이다. 이것은 그가 보이는 어떤 것을 우상시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일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땅의 것을 결코 자신의 우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토 친척 아비집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카 롯도 떠나보낼 수 있었고,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도 후사의 명단에서 제외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100세 낳은 독자 이삭도 기꺼이 번제로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아브라함의 신앙으로부터 우리도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수 있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을 진짜 복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도 역시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기업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어야 한다. 곧 그분의 약속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늘에 처소를 예비해놓고 있다면 그대로 믿는 것이다. 맡은 일에 충성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눈에 보이는 복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의 잘못을 겸손히 시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는 어떤 것일지라도 기꺼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그날 할례를 받았다. 이는 그가 잠시 육체대로 행했던 것에 대한 회개의 표시였다. 육체대로 행하여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것이 바로 할례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할례를 한꺼번에 다 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자신과 식솔들 모두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 그것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눈에 보이는 단 하나의 축복이라도 주님이 달라고 하시면 기꺼이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린 일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그 일 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면 그냥 드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아들이 필요하다면 다시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은 것이다. 자기의 아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 당시 유대인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씨 곧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씨를 붙잡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육체의 할례만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고 한느 말이 나오자 화가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는 하늘에 닿게 된다. 그리하여 약 40년 뒤 A.D.70년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 속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만다. 

 

2022년 08월 12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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