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요약하며
1. 들어가며
믿는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바울이 전하지 않았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의 복음을 전한 만큼 행위 구원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이 주장은 타당하고 옳은 것일까? 바울은 정녕 믿음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했으며, 행위구원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나름대로의 성경해석을 마치 바울의 주장인 것처럼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거기에다가 선행과 구제와 기부와 같은 행위들이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바울이 전했던 참된 구원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예수님의 구원관과 비교해서 살펴보면서, 이 책에 썼던 내용들도 함께 하나씩 하나씩 정리해 볼까 한다.
2.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 정말 저주받는가?
어떤 믿는 이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주장이 진정 성경적인 주장이며,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만약 이 사람의 주장이 “맞다”라고 한다면, 아마도 예수님과 야고보도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주의 친동생 야고보는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7:19-21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순간에 그때까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불못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사실 주님께서는 심판 때에 개인의 신앙을 어떻게 판단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들이 맺은 열매라고 말씀하셨다(마7:16,18~20). 그러므로 그날에 주님께 “주여! 주여!”하고 말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여! 주여!”라는 외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불신자인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주님을 믿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7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천국백성의 윤리를 들려주고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여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불신자가 예수님더러 얼마만큼 “주님! 주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한 번은 그럴는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을 믿지 않는 자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양심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7:21에 나오는 이들은 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자들이다. 그런데 비록 예수님더러 주님이라고 불렀던 자라 할지라도 버림받을 자가 있음을 예수께서는 말씀해주셨다. 그는 어떤 자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다. 그런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도 행함으로 그 신앙이 뒷받침되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도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인가?
여러분은 믿음의 결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해 신앙생활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결국 구원의 최종목표란 내가 죽을 때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병고침을 받거나 부자가 되었어도 죽어서 천국에 못 들어갔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탈출시키어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눅9:31). 그러므로 예수믿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되거나 병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온전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이 세상에서 육신적인 축복을 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럴지라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하여금 죄사함을 받게 하고(막10:45)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10:10)이기에,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실패한 것이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가 궁극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마7:21). 결국 산상수훈의 결론은 누구라도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런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자로서 지혜로운 자이기 때문이다(마7:24). 만약 마지막의 날, 심판주 앞에 섰을 때에 내게 아름다운 열매 맺은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다. 그 사람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자로서,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마7:26). 그렇다. 자신이 참된 신앙을 가졌다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그분 앞에 섰을 때에 열매없는 자 곧 행위의 열매가 없는 자는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바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에 따른 행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예수님만 말고도 크게 강조한 분이 있다.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다. 그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그것을 언급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말했다. 누가 믿음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에 따른 행위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믿음이 어찌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말이다. 왜냐하면 행위들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말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다 믿기 때문에,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두려워 떤다는 것이다. 하지만 귀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으로 옮겨지지 아니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헛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의 사례를 들어서 이 사실을 더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은 과연 어떻게 해서 칭의(稱義)를 받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가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반드시 자신의 행위들과 함께 계속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해, 믿음의 행위들이 나타나는 믿음이야말로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에게서 영혼이 빠져나갈 때에 그 사람이 마치 죽은 자가 되듯,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어 있기에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행위들을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확인하라고 주장하는 야고보는 진정 저주를 받을 사람인가? 그리고 지옥에 떨어질 사람인가?
3.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진정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복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 자기가 무슨 복음을 전했는지 분명히 밝혀놓았다. 그래서 자기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 자신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갈1:6~9).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주었던 복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울이 자신이 나름대로 체계를 세워서 만들어낸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바울의 복음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그에게 계시로 가르쳐준 복음이었기 때문이다(갈1:11~12).
갈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랬다. 바울은 바울 자신이 누군가에서 배워서 자기가 체계로 잡아놓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가 직접 듣고 배웠던 복음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협조자였던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의사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엄청난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때 바울은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기까지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결단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서 밀레도에서 자신이 개척해 세웠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했을 때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자신이 가르치고 전했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행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그렇다. 그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나 상관없이 그들에게 “하나님 안으로의 회개”(헬라어 원문참조)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의 믿음(헬라어 원문참조)”을 증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전한 은혜의 복음이란 단지 “오직(only)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었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그가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렇게 말했다.
행17:29-31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실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전하셨던 복음과 똑같은 것이었다. 바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막1;15).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마4:17, 요7:37~39).
그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공생애 기간에 딱 2가지만을 외쳤다. 하나는 회개하라는 것이었고(마4:17), 또 하나는 예수님 당신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었다(요6:35).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냈으니, 누구든지 회개하는 자는 다 용서받고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그 사람 속에 있게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당신을 대신하여 생명의 성령이 오셔서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죽을 때까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죄를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이 찾아오면 회개한 후에 천국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행위구원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저주를 받는 것은 아니다. 행위가 믿음에 따른 열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얻기 위해 행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참 믿음을 가진 자로서 나타나는 열매들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에 따른 열매들은 지금 내가 믿음을 가진 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주는 척도(barometer)가 될 수 있다.
사실 예수께서 행위를 언급하고 야고보가 행위를 언급한 것은 믿음의 시초가 아니다.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볼 때요 믿고 난 뒤 한참 후의 일이다. 특히 그 시점이 심판 때가 많다. 즉 인생의 여정을 다 마치고 나서, 이제 심판대 앞에 섰을 때다. 만약 누군가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고 해보자, 그 순간 어떤 열매가 나타나겠는가? 당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날마다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가다 보면, 그에게도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심판 때까지 갔는데도, 자기에게서 선한 열매 하나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언급하는 곳은 이와는 반대의 상황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했을 때다. 그것은 예수님과 야고보가 말했던 상황과는 정반대의 시기인 것이다. 사실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자신의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율법의 모든 조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힘입는다. 그분의 칭의(稱義)로 옷을 입기 때문이다. 비록 나 자신은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그분의 의가 내게 전가(轉嫁)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우리도 의로운 자라고 불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義)를 곧 나의 의(義)로 인(印)쳐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믿음으로 말미암은 “전가된 의(義)”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를 가졌을 때,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란 우리가 처음으로 믿을 때에 주어지는 신분의 변화요, 믿을 때에 값없이 주어지는 놀라운 은혜인 것이다.
4. 종교개혁자들은 왜 중세교회를 개혁해야만 했는가?
그랬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으라는 “천국과 회개복음”이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나름대로 체계를 가지고 만들어낸 어떤 복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께서 그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복음이었고(갈1:11~12), 그것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구원얻어 천국에 들어오라는 복음이었다. 사도바울은 바로 그것을 전파했고, 그것을 통해서 많은 백성들을 천국백성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그것에는 갈라디아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 중세교회 때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이 전파했던 구원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 중세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통한 구원과 공로를 통한 구원을 가르쳤다. 사실 중세의 로마카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교회에서 베푸는 고해성사와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많이 빗나간 것이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직접 회개하면 다 용서받는 것이지 굳이 신부를 찾아가 그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며, 그때에 신부로부터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을 들어야 죄사함받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월권행위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대신하려고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을 공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천국에 “쏙~”하고 들어가려면 “선행”과 “기부”를 하라고 했다. 예를 들어, 베드로성당의 건축을 위해 헌금을 하게 되면, 자기를 구원할 공로가 모자라 연옥에 있는 자신의 부모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고 가르쳤다. 로마카톨릭이 성경에 없는 연옥설을 만들어낸 것도 커다란 잘못이기는 하지만, 행위(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의 공로로 구원얻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람 자신이 행한 어떤 공로(功勞)나 선행(善行), 기부(寄附)같은 것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고 외친 것이다. 그러다보니 초기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교회와 선행을 통한 구원관의 잘못됨을 전파하게 되었고,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을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루터(A.D.1483~1546)에서 칼빈(A.D.1509~1565)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칼빈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그러자 구원의 촛점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왜냐하면 칼빈이 중세시대의 어거스틴의 구원관을 다시 끌어왔기 때문이다. 칼빈이 어거스틴(A.D.354~430)의 절대 작정에 따른 구원관을 끌어온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작정하신대로만 구원얻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가 중세의 잘못된 구원관으로부터 바른 구원관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다보니,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해버린 것이다. 오로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만큼(엡2:8)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어떤 결단이나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칼빈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을 강조하다보니, 구원은 만세전 예정에 따라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루터의 초기구원론에서 벗어나, 그만 만세전 예정에 따른 구원론으로 그 방향을 틀어버린다. 그것은 그의 책인 <기독교강요>에 순차적으로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자신의 책 <기독교강요> 첫 판(1536년)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독교강요> 제2판(1539년)에 가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라는 것을 집어넣게 된다. 결국 칼빈이 <기독교강요> 제4판(최종판, 1559년)을 낼 때에는 그것이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제자였던 데오도르 베자(A.D.1519~1605)가 칼빈의 만세전예정론을 한층 더 강화시키더니, 1618년 도르트 종교회의에서는 칼빈의 5대교리를 정통교리로 확정하게 된다. 그러자 칼빈의 예정론은 갑자기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되고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5. 종교개혁자들이 놓쳐버린 구원의 또 하나의 핵심요소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가 잃어버린 구원의 핵심 요소였던 “믿음”을 되찾아왔다. 공로나 선행같은 행위로 구원얻는다는 중세시대의 잘못된 구원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적인 주장을 되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전통이 루터에서 칼빈으로 이어짐에 따라 기독교계는 급속히 칼빈주의화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개혁신앙은 곧 칼빈신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칼빈주의가 기독교계의 핵심신앙으로 자리 잡을수록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바른 구원론의 핵심요소인 “회개”가 뒷자리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회개하지 않아도 예정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굳이 회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면,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구제불능의 상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무능하며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전적 타락).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따라(무조건적인 선택),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이 그 사람에게 주어질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게 된다(불가항력적인 은총).
그리고 칼빈은 더욱 더 놀라운 주장을 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보내주신 자만 예수님께 나아가 구원얻는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칼빈은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내주신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제한 속죄).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 번 예수믿고 구원 안으로 들어온 자는 절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든지 그를 보존하고 인도하여 구원얻게 하실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성도의 견인). 그러므로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세전에 작정하여 선물로 주신 구원인데, 어찌 그 구원이 영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은혜가 되고 맞는 말 같은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전제(前提)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죄를 깨닫게 하시고 믿도록 초청하시면, 인간은 그 초청에 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정도로는 타락해 있었기 때문이다(계3:20, 마22:1~14). 인간이 타락한 것은 맞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심지)”과 같다는 것이다(마12:20).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있는 것은 확실하다(롬3:9). 하지만 전적인 타락의 상태나 전적인 무능의 상태에 있지는 않는 것이다. 다만 상한 갈대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완전히 꺾어져서 곧 죽게 될 것이다. 또한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다. 그냥 그대로 놔두면 반드시 꺼져버릴 등불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도와주시면,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 주님의 진단이다. 인간이 비록 상한 갈대가 되기는 했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꺼져가는 등불이지만 주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다시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약간이지만 그래도 남아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실 때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시고 마음의 눈을 노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는 순간 믿음으로 반응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작정한 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에 우리가 응답할 때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누구는 멸하기로 작정하신 적이 없으시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고, 결국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누구든지 택함을 입는 것이다(마22:14).
그러므로 구원받을 대상에 대해서 주님은 어떤 육체적이나 혈통적 혹은 학벌적인 조건으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신다. 그분은 이제 무조건적으로 초청하신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는 우리가 죄인이 되었든지 이방인이 되었든지 아무런 상관없이 부르신다. 이제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반응하기면 하면 구원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려는 은혜를 듣고도 외면하는 자는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는 남아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기에, 계속해서 주님을 거부한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어떻게 되어서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가 있는 시대가 된 것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제한된 몇몇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3:16). 예수께서는 결코 만세전에 아버지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다(요일2:2, 딤전2:4).
요일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다만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만세전에 택정함을 입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의 피의 효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속죄를 위해, 흠없는 어린양으로서, 영원한 제물로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셨기 때문이다(요3:16, 히9:12, 22). 그러므로 그분의 피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있다(딤전2:4). 그리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얻기를 바라신다(벧후3:9).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려면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면 된다. 그분의 초청을 외면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분의 초청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에 선택되어지는 것이다(마22:14). 구원받기로 만세전에 어떤 자가 선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주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그 순간에 선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는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은 자들만 예수께 보내주신다는 칼빈의 주장이 진짜 맞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런 자들만 예수께 나아와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그는 그러한 근거로서 요6:37,39과 요10:29을 언급했다. 하지만 놀라지 말라. 이러한 말씀들은 헬라어원문 특히 대문자사본을 찾아 읽어보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왜곡해서 번역해버린 것이다. 특히 6:37과 39절의 말씀은 헬라어성경본문과 완전히 다른 번역이다. 그리고 요10:29의 말씀은 대문자사본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변개된 소문자사본을 가지고 번역해놓은 결과물이다(이것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어놓았다). 얼마나 다르게 번역해 놓았으니 잠깐만 살펴보자.
요6:37[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헬라어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현재] 주시고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달할,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현재] [스스로] 오고 있는 자(사람)(남성,단수)를 [나는] 결코 [확실히] 밖으로 내어쫓지(내어던지지) 않을 것이다.
요6:39[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9[헬라어직역]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나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을 [내가] 그것(중성,단수)에서부터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날 [내가] 그것(중성,단수)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다.
요10:29[개역]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9[대문자사본에서 직역]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것(중성,단수)은 모든 것들(중성, 복수)보다 더 크다. 그리고 아무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계속해서] 빼앗을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은 자만 구원얻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라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셨다(눅14:15~24). 그렇다고 믿는 그 순간에 구원이 끝난 것은 아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마10:22, 딤후4:7~8, 고전9:27, 계14:12). 믿는 자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낱낱이 회개하고, 날마다 깨끗하게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계2:5,16,21~22,3:3,19,22:14). 또한 죽는 그날까지 믿음이 변치 않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의 구원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죽을 때에 가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6. 그렇다면 바울이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던 “다른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다른 복음”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갈1:6~9)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말이다. 그때 베드로는 사도바울에게 그의 얼굴 앞에서 책망을 받는다. 맨 뒤에 비로소 사도가 되었고,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부르던 후발주자가 어찌 감히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예루살렘교회를 세운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갈2: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그랬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가장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해야 할 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울에게 은인과 같았던 바나바도 마찬가지였다(갈2:13). 그들의 행동은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이나 곧 예수께서 전해준 복음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도 여전히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는 받아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도 안식일은 지켜야 하며, 예수님을 믿어도 음식을 가려먹어야 하고,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에 그때까지도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 예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언제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언제 죄인이나 이방인들과는 식사하지 말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는가? 주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신 적이 없으시다. 오직 우리 주 예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고, 인류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할례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왔을 때에, 그만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해버린 것은 책망받을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자 안디옥교회의 대표자였던 바나바도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가 버렸다. 당시 유대교의 장로들의 유전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식사하는 것은 위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의 행동을 보고는 엄히 책망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았으면, 율법이나 장로들의 유전에 규정된 의식적인 행위들에 주의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율법의 의식들을 지켜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만 순간적으로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던 “다른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구원얻는 것이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는 부족하니, 율법에 나오는 의식과 규정들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려 했던 “다른 복음”인 것이다. 사람이 구원얻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고 회개하면 된다. 어느 누구도 구약의 의식법적인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의롭게 되거나 죄사함을 받을 수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얻게 되는 것이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언급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아도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거져 구원얻는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은 폐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도덕법이라 일컫는 “십계명”만큼은 오히려 한층 더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신구약의 모든 성경말씀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님을 믿어도 계속해서 우상숭배하거나, 살인하거나 간음하거나 거짓말하는 자는 다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되어 있다(계21:8,22;15).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식법들은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는 않지만, 도덕법인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죄가 되며,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한 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예수께서 오셔서 폐지하신 것은 율법 중에서 의식법들에 해당한다. 그런 것들로는 안식일법, 절기법, 제사법, 성막법, 성결법, 음식법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사실 다 메시야가 누구시며, 메시야가 오시면 어떤 사역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예표들이다. 그런데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그런 것들은 다 성취하셨기에, 믿는 자들이 그것들을 더 이상 지킬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할례를 받지 않아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음식을 가려먹지 않아도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도 안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어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마11:28~30,12:8). 우리 믿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유월절양을 잡지 않아도 예수께서 유월절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예수님을 믿게 되면 죽음의 재앙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 중에서 도덕법에 해당하는 십계명만큼은 다르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윤리이기 때문에, 이것을 허물어뜨릴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계21:8).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도덕법에 대해서만큼은 더 주의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래서 실제로 음행하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음행하면 그도 이미 간음을 행한 자라고 하셨다(마5:27~28). 그런 때에는 간음죄를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살인은 직접 행하지 않았어도 사람에게 욕하는 자는 살인자가 되기 때문에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5:21~22). 그러므로 남을 욕한 자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사실 율법에는 없는 규정들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어도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가 잘못하여 산상수훈의 계명들을 지키지 못했다면, 즉시 회개하여 꼭 용서를 받기를 바란다. 천국은 믿고 회개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결국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 곧 저주받을 것이라고 했던 “다른 복음”이란 사람이 행위로 구원얻는다는 복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구원이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며, 예수님을 믿는 것 말고도 지켜야 할 조항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님도 믿고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음식도 가려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을 믿고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공로가 필요하니 공로를 충분히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속죄양으로 오셔서 죽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도 구원에는 아무 소용이 없고, 공로를 쌓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가 구원받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죄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천국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믿음에 따른 열매로 나타나는 행위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구원을 향해 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에 유익하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얼마나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자신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부족한 것을 행위로 대신 떼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위가 많은 자는 그렇게 못하는 자를 늘 정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죄를 짓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된 믿음, 온전한 믿음, 구원얻기에 합당한 믿음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바로 그 복음이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으로서 자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복음이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면 된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중세시대의 잘못된 구원론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해야하고, 세례를 받아야 죄사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다. 그냥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 된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거기에다가 어떤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에도 속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잘못된 구원론에서도 속히 벗어나 성경적이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이 칭의(稱義)를 얻든지 아니면 구원을 얻든지 그것은 “오직(only)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오직 믿음”이라는 문구자체도 성경에 없는 표현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에 대한 반동으로서, 행위가 아닌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그만 “오직 믿음”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올바른 구원인가?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처럼 “믿음”과 “회개”를 통한 구원이다(막1:14, 행20:21). 특히 사도바울이 말한 “믿음”이라는 것도 행위의 반대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성”에 대한 믿음이었다(갈2:16).
갈2:16[헬라어직역]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왔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충성됨)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실성(충성됨)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는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는 율법의 행위로부터 [장차]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누구라도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성에 기초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갈2:16). 이것은 자신에게 행위가 하나도 있지 않아도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구원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충성됨)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뜻이다. 사실 사람이 구원얻는 것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들을 지켜서도 아니며 또한 자신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실성(충성됨)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고, 사도바울이 전해주었던 참된 복음 곧 “회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을 이제는 우리도 알고 믿고 전파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토록 외치고 또 외쳤던 참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날마다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를 바란다. 이제는 종교개혁자들마저 놓쳐버린 “회개”의 중요성을 더욱 붙들기를 바란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열매로 나타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결국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는 오직 회개하고 난 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