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제4과 구원받을 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가?
4. 구원받을 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가?
주님의 양 곧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는 만세전부터 이미 정해진 것인가 아니면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분의 양이 되는 것인가? 이것은 교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장로교단에 따르면, 구원받을 자는 하나님이 만세전에 미리 정해놓으셨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만을 예수님에게 보내주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로서 요10:29, 요6:37, 요6:39의 말씀들을 언급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한글개역성경이 잘못 번역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그것을 알려면, 첫 번째로, 헬라어성경 출간과 성경번역의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장로교의 만세전예정론 교리가 언제 확정되었는지 그 시기도 알아야 한다. 놀라운 사실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 들어가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구약성경부터 자주 등장하는 비유는 “목자와 양”이라는 비유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러한 비유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인물이 다윗으로 나온다(시23:1~3).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감히 어떤 신분의 사람으로 묘사한 사람이 없었는데,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하나님을 ‘목자’요 사람을 ‘양’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시편 100편 기자도 여호와 하나님은 양의 목자이며, 우리 인간은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라고 노래한다(시100:3~5). 그렇다면 왜 많은 비유들 중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목자와 양의 모습이 꼭 하나님과 인간의 모습을 많이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둘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목자 없는 양은 죽은 목숨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은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도 없으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양들에게는 다른 여타의 초식동물처럼 자기를 보호할만한 어떤 뛰어난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 양이다. 더욱이 양들은 푸른 초장이나 물가를 스스로 찾아갈 재주도 없다. 시력도 아주 나빠서 한치 앞도 못보고 이리떼들이 나타나면 그냥 물려간다. 그래서 양이 제 목숨을 부지하려면 오직 목자를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목자없는 양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2) 사람은 처음부터 주님의 양으로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나중에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인가?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과연 주님의 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나중에 만들어지는가 하는 문제다. 여기서 사람을 “주님의 양”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그의 백성들을 일컫는 말이었다(시100:3).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 일컫는 말이 되었다(요10:27~28). 그런데 대체로 장로교회에서는 주님의 양들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양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될 자는 이미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만세전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이 장로교의 입장이다. 결국 이미 정해진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쪽을 주장하는 교단도 있다. 그러한 교단에는 성결교단과 감리교교단, 구세군, 오순절교단 등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웨슬리안주의를 따르는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의 양은 만세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분을 따라가게 되면 주님의 양이 된다는 입장이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인가? 아니 어느 교단이 성경적으로 옳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3) 장로교는 만세전에 주님의 양이 될 자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놓으셨다고 믿는다.
먼저, 주님의 양 곧 신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만세전부터 정해져 있고 그가 하나님의 양이 된다는 입장부터 살펴보자. 이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나 될 수 없고, 오직 만세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한 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께로 나오는 자는 아무든지 나오지 못하며 오직 아버지께서 보내준 자만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고, 그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에 있어서 구원받을 자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는 대부분 칼빈의 5대교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자들로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인데, 이들은 구원받을 자는 만세전에 예정되어 있기에, 아버지께서는 오직 그들만을 예수님에게 보내준다고 믿는다.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오직 아버지께서 작정한 예정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 번 아버지에 의해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는 절대 구원에서 탈락되는 경우도 없으며,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4) 장로교의 만세전 예정교리를 뒷받침할 만한 성경구절은 과연 성경에 있는가?
그렇다면,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할 때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을 펼칠 때에는 반드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만세전 예정을 외치는 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하고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것들 중에서 요10:26~29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이다. 이들은 주 예수께서 영생을 주실 자들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예수께서도 한 번 그들에게 영생을 주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아무도 그들을 예수님의 손으로부터 빼앗아갈 갈 수도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양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만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된 주님의 양이란 누구일까?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이 누군지가 요10:29에 정확히 나와 있다고 말한다. 진짜 그럴까? 그렇다면, 이제 요한복음10장 29절을 찾아 읽어보자.
요10:29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렇다.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을 자는 아버지께서 다 예수님에게 (보내)주신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에게 주시는 아버지께서 만물보다 크신 분이므로, 아무도 아버지 손으로부터 그들을 빼앗아갈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세전 예정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요10:29을 아주 중요한 만세전예정론의 근거로서 제시한다.
5) 요한복음 10장 29절은 과연 만세전예정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말씀인가?
그런데 지금부터 놀라지 말라. 요10:29의 말씀은 만세전예정론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구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성경에 나오는 요10:29의 말씀은 우리말 개역성경에 나오는 말씀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헬라어성경에 보면, 이 구절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있은 한글개역성경과 전혀 다르게 나온다. 이제부터 살펴보겠지만 한 마디로, 한글개역성경에 나오는 요10:29의 번역은 ‘후대사본’이라 일컬어지는 소문자 헬라어사본으로부터 번역된 것으로서, 이것은 후대에 변경되어진 헬라어성경에 해당하는 원문을 번역한 오역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우리말 개역성경은 보다 더 원문에 가까운 대문자사본을 토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어떻게 되어서 요10:29의 말씀은 후대의 헬라어사본에서 번역한 것이 들어가게 되었을까?
6) 두 종류의 헬라어신약성경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가?
여러분은 헬라어신약성경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들어보았는가? 헬라어를 공부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헬라어를 공부하지 못하신 분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헬라어원문을 어떤 원문에서 번역하느냐에 따라 번역문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럼, 헬라어신약성경에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하나는 ‘표준원문(Textus Receptus)’이라는 헬라어신약성경이 있고, 또 하나는 ‘네슬-알란드(Nestle-Aland)’라는 헬라어신약성경이 있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성경은 네슬-알란드 헬라어원문에서 번역한 것이다. 그렇지만 킹제임스 성경류(한글킹제임스성경, 한글흠정역, 킹제임스완역판, 킹제임스흠정역)는 모두가 다 표준원문에서 번역한 성경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헬라어원문이 보다 더 성경원본에 가까운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네슬-알란드 헬라어신약성경이다. 왜냐하면 표준원문이 보다 더 후대에 나온, 소문자로 기록된 헬라어사본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헬라어신약성경이라면, 네슬-알란드원문은 보다 더 오래된, 대문자로 기록된 헬라어사본을 비교분석하여 찾아낸, 원본에 가장 가까운 헬라어신약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2개의 헬라어신약성경이 있게 되었는지를 잠깐 살펴보자. A.D.378년이 되자, 로마교구는 스스로를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구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당시 전 세계에는 5개의 기독교 교구가 있었다. 하지만 점차 다른 교구는 그 세력이 약해져갔고, 로마교구만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결국 로마교구가 대표적인 기독교교단이 되기에 이른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로마카톨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로마카톨릭에서는 성경을 당시 로마어(고대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을 토대로 당시 통용되는 로마어(당시라틴어)로 번역할 필요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때(A.D.382년), 로마의 주교였던 다마수스의 명령에 따라 제롬(히에로니무스)이 개정판 라틴어성경을 출간하게 된다. 이전에 흩어져 있던 옛 라틴어성경을 바로잡아 당시의 현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성경을 일컬어 소위 “불가타(Vulgate)”성경이라고 부른다. 불가타성경은 로마주교였던 다마수스의 명령에 따라, 제롬(히에로니무스, A.D.342~407)이 약20년(383년~405)간 번역작업을 시도하여 완성해낸 라틴어성경인데, 중세시대에는 로마카톨릭이 기독교의 대표교단이 됨에 따라, 오직 불가타성경만을 사용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난 어느 날, 영국의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1,320~1,384)가 라틴어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1,380년에는 신약성경을 출간하게 되었고, 1,382년에는 신구약성경을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때 처음으로 기독교에서는 불가타성경(라틴어) 이외에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종교개혁 이후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출간하도록 자극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1,450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됨에 따라 종이로 인쇄된 성경을 출판하여 독자들의 손에 들려주기 시작한다. 당시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면서 로마카톨릭의 사제였던 에라스무스(A.D.1,440~1,536)가 그 일의 선봉장이 되는데, 그가 한 일은 헬라어신약성경을 인쇄하여 출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에라스무스가 사용했던 헬라어 대역본들은 대문자사본은 하나도 없었다. 당시에는 오직 소문자사본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당시 존재하고 있는 5~6개의 소문자사본을 이용하여,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발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에라스무스 “헬라어신약성경”이다. 그렇지만 당시 소문자사본들은 다 후대에 나온 사본으로서 12세기 이후의 것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모든 평신도의 손에 헬라어신약성경이 쥐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에라스무스가 발간한 헬라어신약성경은 성경을 원문으로 읽고자 하는 모든 독자에게 커다란 기쁨의 소식이 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1,516년 헬라어신약성경 초판을 발행하게 되었고, 이어 1,519년에는 이것을 수정보완하여 제2판을 찍어내게 된다.
그리고 1,517년이 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이에 용기를 얻어 헬라어로 된 에라스무스발행 헬라어신약성경(2판)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한 번 시작된 헬라어신약성경의 출간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진전된다. 1,546년에는 프랑스 파리의 출판업자였던 스테파누스가 헬라어신약성경을 인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고, 칼빈의 직제자였던 데오도르 베자(A.D.1,519~1,605)도 소문자계열의 헬라어신약성경을 1,565년에 발간하게 된다. 그리고 1,611년에는 베자가 발간한 헬라어신약성경 제10판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때였다. 영국의 제임스 국왕도 1,598년에 나온 베자의 헬라어신약성경을 영어성경으로 번역하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바로 “킹제임스성경(KJV)”이라는 영어성경이다. 그러다가 1,624년이 되었을 때에, 엘제비어 형제들이 소문자계열의 헬라어신약성경을 출판하게 되면서, 책 서문에 “Textus Receptus”라는 문구를 집어넣는다. 이 뜻은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좋은 일반적인 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엘제비어 형제들이 발간했던 헬라어신약성경은 일약 세상 사람들에게 진짜 표준원문인 헬라어신약성경인 것으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엘제비어 형제들이 자신이 만든 신약성경이 잘 팔리도록 써넣은 문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엘제비어 형제들이 출간한 헬라어신약성경만이 가장 오류가 없고 완벽한 헬라어신약성경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여기서 또 알아야 할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개혁교회들이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도 바로 이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다. 칼빈(A.D.1,509~1,564)에 의해 시작된 만세전 이중예정교리가 이 시기에 완전 체계화되고 교리화된 것이다. 사실 칼빈의 직제자였던 베자(A.D.1,519~1,605)가 이 일에 앞장 선 인물인데, 그가 죽고 난 후 13년이 지난 1,618년이 되자, 예정론교리는 도르트 회의에서 공시적으로 기독교의 정통교리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그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칼빈의 5대교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칼빈의 예정론교리는 영국으로 건너가 1,648년이 되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낳게 된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란 1,643년~1,647년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회의 기간 중에 제작된, 전문 33장의 칼빈주의 장로교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이 신앙고백서는 1,648년 영국의회에서 처음으로 인준을 받은 후 전 세계로 펴져나갔으니, 오늘날 장로교회는 거의 대부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자신의 표준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다.
7) 예정론교리를 만드는데 사용된 헬라어신약성경은 표준원문(소문자)계열이었는가 아니면 네슬-알란드(대문자)계열이었는가?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저작은 아무래도 <기독교강요>에 견줄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예정론이 처음부터(초판,1536년) 들어간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교리는 <기독교강요> 제2판(1539년)부터 나오기 시작하더니, 제3판(1543~1550년)을 거쳐 제4판인 최종판(1559년)에서 완전히 확장(최종판)되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칼빈이 헬라어신약성경의 원문으로 사용했던 성경은 전부 다 소문자 헬라어사본(TR계열사본)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소문자사본들보다 더 앞서 만들어진 대문자사본이 아직 발견되기 이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독교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소문자사본보다 훨씬 더 오래된 대문자사본이 발견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때는 1,859년이었다. 독일의 티센도르프(Konstantin von Tischendorf)(A.D.1815~1874)라는 사람이 이집트의 시내산에 있는 성캐더린 수도원에서 소문자사본보다 훨씬 앞서서 쓰인 대문자 헬라어사본을 발견해낸 것이다(이것을 ‘시내산 사본’ 혹은 ‘코덱스알렙사본’이라고 부름). 이 사본에는 대부분의 헬라어구약성경(70인역)이 들어있었고, 헬라어신약성경 전체와 헤르마스의 목자서와 바나바의 편지 등이 들어있었다. 특히 헬라어소문자사본들은 8세기 이후부터 서서히 나타나 11세기에 이후부터 세상에 많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대문자사본은 대부분 A.D.300년부터 7~8세기까지만 통용된 것들이었기에 더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티센도르프에 의해서 더 오래되고 원문에 가까운 대문자헬라어신약성경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때까지 소문자계열의 사본이 주류를 이었던 시대는 물러가고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헬라어신약성경이라는 것이 오직 표준원문(TR)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은 소문자사본에서 대문자사본을 찾기에 이르렀고, 소문자사본은 더 이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대문자계열의 헬라어신약성경이 전세계교회의 대세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오자, 네슬-알란드에 의해서 만들어진, 보다 더 오래되고 정확한 대문자 헬라어신약성경(네슬-알란드 헬라어신약성경)이 출간되어 나오게 됨에 따라, 헬라어성경은 대문자사본을 더 오래되고 원문에 가까운 헬라어신약성경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헬라어신약성경은 Greek New Testament(GNT)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고, 그래서 대문자사본의 헬라어성경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헬라어신약성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소문자계열의 헬라어신약성경이 있고, 또 하나는 대문자계열의 헬라어신약성경이 있는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소문자사본에서 번역된 KJV영어성경은 결국 후대에 만들어진 헬라어사본(TR사본계열)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KJV영어성경이나 표준원문 헬라어성경은 대문자 헬라어신약성경보다는 보다 더 후대에 나온 성경으로서 그 신빙성이 떨어지는 성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말의 개역성경은 소문자사본인 표준원문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네슬-알란드 계열의 대문자사본을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8) 예정론교리를 뒷받침해 준다고 하는 요한복음 10:29의 말씀은 왜 소문자헬라어사본에서 번역한 것인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요한복음10:29의 본문은 대문자사본에서 번역하지 않고, 소문자사본의 것을 그대로 번역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개역성경은 거의가 다 티센도르프가 발견했던 대문자사본 계열에서 번역했는데, 유독 요한복음 10장 29절의 말씀은 표준원문에서 번역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칼빈의 예정론과 5대교리가 대문자사본보다는 소문자사본의 것이 훨씬 더 부합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제 그 증거를 살펴보자.
요10:29에 대한 헬라어신약성경은 어떻게 쓰여 있을까? 특히 훨씬 더 오래되고 권위있다고 판명된 대문자 헬라어신약성경에는 어떻게 쓰여 있는 것일까? 먼저 대문자사본에서 번역한 개역성경과 소문자사본에서 번역한 킹제임스성경을 살펴보자.
요10:29[개역개정판] 그들(남성,복수)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9[한글킹제임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더 위대하시니,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느니라.
요10:29[소문자사본에서 직역]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사람(남성,단수)은 모든 것들(중성, 복수)보다 더 크시다. 그리고 아무도 내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계속해서] 빼앗을 수 없다.
요10:29[대문자사본에서 직역]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것(중성,단수)은 모든 것들(중성, 복수)보다 더 크다. 그리고 아무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계속해서] 빼앗을 수 없다.
그렇다. 요10:29에 대한 번역된 성경본문은 한글개역정판이나 킹제임스성경 그리고 소문자사본계열은 똑같다. 단지 한글로 번역하다보니 나타나는 미묘한 차이밖에 없다. 하지만 티센도르프 계열의 대문자헬라어사본에 나타난 요10:29의 말씀은 이것들과는 전혀 다르다.
9) 요10:29의 본문은 어떤 것이 왜곡되어 번역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말 개역성경은 왜 대문자사본을 잘 번역해 오다가 이 부분에 와서 그만 소문자사본으로 바꾸어버린 것일까? 먼저,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자. 첫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대상이 단수(~것)에서 복수(그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둘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대상이 중성명사에서 남성명사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것”이라는 단어가 “~하는 자들(사람들)”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개역성경이나 킹제임스성경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주시고 있다고 번역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채 있는 것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아니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하게 되면, 칼빈주의의 예정론교리가 요10:29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이기에 우리말 개역개정성경에서조차 소문자사본의 헬라어신약성경을 그대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말 개역성경은 사실 소문자사본인 표준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표준원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즉 소문자헬라어신약성경인 표준원문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채 있는 자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다. “그들”이 아니라 “그”인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말 개역성경은 요10:29의 나오는 “그것”(중성단수명사, that)을 “그들”(남성복수명사, them)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번역이 아닐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을 “그들”로 바꾼 것은 요10:28절에서, 예수께서 영생을 주시는 대상이 “그들”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짜 맞추기 위한 의도적인 번역이 아닌가 싶다.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면, 보다 원본에 가까운 대문자사본에 나오는 요10:29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이렇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미 보낸 채 있는 것은 만물보다 더 큰(위대한)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에게 나와서 구원얻기 위해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께로 나아오는 자를 예수께서 계속해서 보호해주시고 지켜주고 이끌어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어떤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보다 더 강력해야 한다. 최소한 마귀가 가지고 있는 것들보다 더 강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것은 다 만물보다 더 클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래야만 예수께서도 구원얻기 위해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다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역성경이나 혹은 영어성경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것을 사람들로 번역한 것일까?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요10:28절에서 예수께서 영생을 주실 것이라고 했던 자가 바로 “그들(them)”이며, 영원히 멸망받지 않아야 할 대상도 “그들(them)”이고, 아무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자들도 “그들(them)”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것을 “그들” 곧 “사람들”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야만 만세전부터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는 예정된 자들이 있다는 칼빈주의 예정론과 성경구절이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큰 성경의 왜곡이며, 성경을 교리에 맞추기 위한 눈가림의 아웅인가? 그리고 얼마나 큰 불법적인 성경번역인가? 종교개혁 시대에는 대문자사본이 아직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제는 이미 대문자사본이 버젓이 출간되어 나와 있음에도, 왜 우리말 개역성경이나 영어성경들은 다 소문자사본에 나오는 왜곡된 헬라어본문을 번역해서 실어놓은 것인가? 왜 단수를 복수로 바꾸어놓았는가? 왜 “어떤 것”을 “그들”이라고 번역해 놓았는가? 만약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농간의 일환으로서 그때 일부러 왜곡시켜버린 것이라면 더욱 더 놀라 자빠질 일이 아닐 수가 없다(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성도들은 우리말 개역성경이야말로 그래도 권위있는 헬라어사본에서 번역한 것이라고 믿고 있을 텐데, 이 일을 어찌하라는 말인가? 지금도 왜곡된 요10:29절을 가지고 칼빈주의 예정론이 맞다고 떠들어대는 이들이 있는데, 이 일을 어찌하라는 말인가?
10) 신약성경 중에서 칼빈주의에 맞춰 왜곡되게 번역되어 있는 성경본문이 또 있는가?
더불어 또 놀라운 사실은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요10:29의 말씀뿐만 아니라, 요6:37과 39절의 말씀도 칼빈주의에 맞게 왜곡해서 번역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왜곡이 먼저 있었고 그것을 보고 만세전 예정이라는 칼빈주의의 교리를 만들었는지, 아니면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헬라어성경마저 왜곡되어버렸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묘하게도 요6:37과 39절의 말씀도 다 칼빈주의 예정론의 교리에 맞게끔 잘못 번역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가. 요한복음 6장 37절에 대한 왜곡된 번역
그렇다면, 요6:37과 39절의 말씀은 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 번역되어 있는 것일까? 먼저, 요6:37과 39절이 나오는 문맥을 한 번 우리말 개역성경으로 보도록 하자.
요6:35-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요6:35a).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오는 이는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6:35b). 그리고 주님을 믿는 이는 어느 때든지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6:35c). 그러시면서 예수님을 이미 본 채 있었던 자들이지만 현재 믿지 않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말씀하셨다(요6:36).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구절이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해놓았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a)” 하지만 이 말씀은 잘못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성경에 번역된 대로 본다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만 예수님께 나아오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를 예수님께서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렇게 번역하면 안 되는 것이다. 헬라어원문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6:37의 말씀이 지금 우리말 개역성경처럼 번역됨에 따라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지 않는 자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럼, 어떤 자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만세전부터 구원하시려고 작정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에게 보내주실 것이다. 그러면 그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예수님께서 나아가서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 구원받기로 만세전에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요6:37절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은 우리말 개역성경처럼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제는 요6:37에 대한 헬라어원문을 찾아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살펴보도록 하자.
그렇다. 이 문장이 바로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에 대한 헬라어원문이다. 이 문장을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요6:37[헬라어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현재] 주시고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달할,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현재] [스스로] 오고 있는 자(사람)(남성,단수)를 [나는] 결코 [확실히] 밖으로 내어쫓지(내어던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말 개역성경과는 앞부분의 절반이 판이하게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두 개의 번역을 비교해보자.
요6:37[개역개정]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남성,단수)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헬라어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현재] 주시고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달할,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현재] [스스로] 오고 있는 자(사람)(남성,단수)를 [나는] 결코 [확실히] 밖으로 내어쫓지(내어던지지) 않을 것이다.
헬라어신약성경(TR이든 네슬-알란드이든)에서는 분명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어 예수님을 향하고 다다르고 있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중성단수명사로서 “~는 모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에 해당하는 헬라어단어(‘판’)가 남성당수명사(‘파스’)가 아니라 “중성단수명사(‘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성경은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주시고 있는 대상을 남성단수명사인 “~는 모든 자(사람)”의 뜻으로서 “~는 자는 다(모두)”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그 뜻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말 개역성경 외에 다른 한글 번역본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을까? 놀랍지만 우리말 개역성경과 똑같거나 다음처럼 아예 “~는 사람”이라고 번역해놓고 있다. 자, 그럼, 몇 개의 번역본만 살펴보자.
요6:37[표준새번역]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6:37[공동번역]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요6:37[쉬운성경]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며, 내게로 오는 자르 나는 결단코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국에 나와 있는 수십 종의 한글성경들 중의 단 한 가지의 성경도 요6:37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을 따라 중성단수명사(모든 것)로 번역한 성경은 없다. 더욱이 후대에 번역되었으므로 보다 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표준새번역성경>이나 <공동번역성경> 그리고 <쉬운성경>에서조차도 전부 다 중성단수명사를 남성단수명사인 ‘사람’으로 번역해놓고 있다. 즉 어떤 번역본들 친절하게도 “~는 사람은 다” 혹은 “~는 사람은 누구나”라고 아예 대놓고 번역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근들어와 헬라어에서 직역해놓은 성경들이 있기에 그러한 번역본들 좀 다르지 않을까 해서 요즘 시중에 나와있는 직역성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오역은 똑같았고, 이런 우리말 헬라어직역성경들은 아예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번역해 놓았다.
요6:37[히브리어헬라어 직역성경(허성갑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고,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바깥으로 내쫓지 않을 것이다.
요6:37[원문번역주석성경(고영민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올 것이며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을 나는 결코 밖으로 내어 쫓지 않을 것이다.
요6:37[회복역]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로 올 것이고, 나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쫓아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최근에 헬라어원문에서 번역했다고 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래도 찾고 있는 <허성갑역>이나 <고영민역>에서조차도 요6:37에 나오는 앞부분을 남성단수명사(~는 사람)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회복역이라는 성경은 중성단수명사(~는 모든 것)를 남성단수명사(~는 사람은 다, ~는 사람은 모두)를 넘어서, 남성복수명사(~는 사람들은 모두)로 번역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그뿐인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로 ‘오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헬라어원문의 뜻을 제대로 번역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원문에 보면, 첫째,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모든 것이 “나에게(me)”가 아니라 “나를 향하여(toward me)”라고 나와 있으며, 둘째, “온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도 ‘에르코마이(come)’가 아니라, ‘헤코(reach, arrive)’라는 동사이기 때문이다. 이 동사는 마24:14 등에 나오는 동사로서, “다다르다, 도착하다, 도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6:37의 전반부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가장 올바른 번역이라고 하겠다.
요6:37a[헬라어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현재] 주시고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달할,도착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을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요6:37에 대해,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중성단수명사(‘판’)를 남성단수명사(‘파스’)로 번역해 놓음으로서, 뜻이 전혀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놓은 자만 예수님에게 나오게 될 것이고, 마치 그런 자만 구원얻을 것처럼 번역해놓았는데, 사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어떤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도달하게 되어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다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는 자만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나 예수님에게로 나아와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준 자만 구원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해석이자 왜곡이다.
나. 요한복음 6장 39절에 대한 왜곡된 번역
한편, 그 다음에 나오는 요6:39절의 말씀도 요6:37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왜곡(歪曲)된 번역 중의 하나다. 이 구절도 요6:37의 말씀처럼,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헬라어원문과는 달리 만세전예정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처럼 번역해 놓았다. 요6:39의 내용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우리말 개역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대로만 본다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내주신 자만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 같은 의미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요6:39절의 말씀은 우리말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요6:39[개역개정]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9[표준새번역]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6:39[공동번역]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6:39[한글KJV] 이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니, 즉 그 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요6:39[원문번역주석성경-고영민역]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가 내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6:39[직역성경-허성갑역]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이 내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내가 멸하지 않고 마지막 날에 일으키는 것이다.
요6:39[회복역]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사람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요6:39[신세계역]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이것이니, 곧 그분이 나에게 주신 모든 사람 가운데서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내가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말 성경번역본들을 살펴보면, 저마다 비슷하게 번역해놓기는 했지만, 개역성경을 제외하고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주시고 있는 것을 ‘사람’이나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물론 개역성경은 “~신 자”라고 번역함으로써, 그것이 중성명사가 아니라 남성명사인 것으로 번역하고 있기는 하다.
자, 그럼, 우리말 개역성경과 헬라어원문(이곳은 TR이나 네슬-알란드원문이나 동일함)을 동시에 비교해보도록 하자.
요6:39[개역개정]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사람)(남성,단수)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9[헬라어직역]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나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을 [내가] 그것(중성,단수)에서부터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날 [내가] 그것(중성,단수)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다.
그렇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이와는 전혀 다른 말씀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마지막 날에 다시 일으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한편,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 자신에게 도달할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예수님에게 스스로 나아오고 있는 자를 결코 밖으로 내어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두 말씀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을 이 땅에 이미 보내셨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어떤 것을 보내주고 계셨다. 그런 것들로는 성령도 될 수 있고, 지혜와 명철, 권세와 능력, 영광, 이름 등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사용하여, 예수님에게로 스스로 나아와 구원얻기를 원하는 자들을 하나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맞아들이신다고 하셨다. 이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어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혹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 주신 것 중의 하나라도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마지막 날에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될 것들은 하나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6:40의 말씀이다.
요6:40[헬라어직역]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다. 아들을 [현재] 보고 있는 모든 자(사람)(남성,단수)와 그분 안으로(그분을) [현재] 믿고 있는 [모든 자]가 영생을 [계속해서] 얻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내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렇다. 요6:39~40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있고(39절), 예수님을 보고 믿는 자를 향한 아버지의 뜻(40절)이 있는 것이다. 먼저,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보고 믿고 있는 자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고 믿고 있는 자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그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더라도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성경번역본들은 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사람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것도 그냥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라는 말을 추가했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에는 “하나도”라는 말이 아예 들어있지 않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자를 예수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보다 더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번역에 끼워 넣은 듯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개인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만세전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있었다는 의미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대상은 ‘중성단수명사(모든 것)’이지, ‘남성단수명사(사람)’ 내지는 ‘남성복수명사(사람들)’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요6:37과 39절 말씀이 어떻게 왜곡되어 번역되었고 그것을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만세전 예정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본문들은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만세전 예정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든지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에게 나아오고 있고 믿고 있는 자를, 예수께서 계속해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어떤 것을 활용하여 그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제는 요한복음 6장 35절부터 40절까지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를 따라 번역해보고자 한다. 즉 헬라어에서 직역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 개역성경이 얼마나 이 부분에서 중요한 구절을 왜곡되게 번역해놓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른 구원론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6:35~40(헬라어직역)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나를 향하여 [현재] [스스로] 나오고 있는 자는 결코 [확실하게] 죽지 않을 것이다. 내 안으로(나를) [현재] 믿고 있는 자는 결코 [확실하게] 영원히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다. 나를 [이미] 본 채 있으면서도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37 아버지께서 내게 [현재] 주시고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달할,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자기를 위해] [현재] 오고 있는 자(사람)(남성,단수)를 [나는] 결코 [확실히] 밖으로 내어쫓지(내어던지지) 않을 것이다. 38 왜냐하면 내가 하늘로부터 [이미] 내려온 채 있는 것은, 내 뜻을 [계속해서] 행하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나를 [과거에] 보내셨던 분의 뜻을 [행하고자 함이다] 39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나에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중성,단수)을 [내가] 그것(중성,단수)에서부터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날 [내가] 그것(중성,단수)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다. 40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다. 아들을 [현재] 보고 있는 모든 자(사람)(남성,단수)와 그분 안으로(그분을) [현재] 믿고 있는 [모든 자]가 영생을 [계속해서] 얻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내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스스로 구원얻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아온다면 그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이미 보아왔지만 그때까지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고 애석하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와서 자기를 믿는 자를 결단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구원하시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을 향한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요6:37에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당시에 주시고 있는 어떤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 중에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예수님에게 도달할 것이라는 것이다(요6:37).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오는 자는 결코 쫓겨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가서, 요6:39에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아버지의 뜻은 이미 예수님에게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요6:39).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의 뜻도 계시하셨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바고 있고 믿고 있는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을 갖는 것이라고 하셨다(요6:40a).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마지막 날에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하셨다(요6:40b).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40절까지의 본뜻이다.
그렇다. 요한복음 6장 37절의 헬라어원문을 직접 보니,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당시 주시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만세전에 아버지께서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아버지께서 아들로 하여금 아들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다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들로는 하나님의 지혜도 될 수 있고, 보혜사 성령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능력이나 권세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도 되고, 거의 모든 것들이 다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에게 나아오고 있고 믿는 모든 자를 다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다시 일으켜 세워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만 주시고 있었던 어떤 것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요6:37a). 그것이 그때 당시에도 예수님에게 도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만 주시는 것으로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어떤 것들이었다. 그러니 우리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을 따라가게 된다면 우리도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게 되면, 우리도 결코 중간에 타락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알고 그분을 믿게 되면, 자신의 영혼이 목마르지도 배고프지 않고 죽지도 않게 된다는 것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믿음이 적극적으로 필요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께서 당시에 들려주신 말씀을 우리도 늘 경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하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요10:27). 그러면 우리들도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구원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요6:39의 말씀도 요6:37의 말씀처럼,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주시는 사람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은 이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예수께서 당신을 바라보며 믿는 모든 자들 잃어버리지 않고 다 지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을 믿기 위해 그분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것을 가지고서, 예수께서도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사탄마귀로부터 지켜내어 천국에까지 인도해 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11)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양으로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나중에 정해지는가?
이제는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어 구원받게 할 자들 곧 예수님의 양은 만세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정해지는 것인가? 정말 예수님의 양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어서 주님이 양이 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후자라는 것이다.
이 세상 천지에 하나님의 자녀(예수님의 양)로 탄생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다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다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요8:44에서 우리 모든 인류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주님의 양) 곧 예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래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때부터 육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양들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언약을 붙잡고 후손들을 낳으며 메시야를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그들을 영적인 하나님의 양들이 되게 해주시는 않는다. 다만,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도록 먼저 초대되었고 먼저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진 것뿐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양과 목자의 비유”라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울타리 안에 들어있는 양들이라는 것이다(요10:14~16). 그들은 잠시 울타리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목자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영적인 당신의 양으로 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자 문지가(세례요한이 될 수 있고, 성령님이 될 수도 있고, 아버지 하나님이 되실 수도 있다)가 문을 열어주어서, 목자되신 예수께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자는 울타리 안에서 이미 구원으로 초청받은 양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는가? 서두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양들은 목자가 없으면 죽은 목숨인데도 그들은 목자의 음성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본래부터 양들이기에, 양으로서 생명을 얻고 유지하려면 어찌하든지 목자를 따라나서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을 이끌어 생명 강가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목자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무서운 이리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려고 하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참 목자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목자를 따라나서지 않았고, 계속 울타리 안에 남아버린 것이다.
그럼 울타리 안에 남아있는 그들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울타리를 넘어들어온 도둑과 강도에 의해 살육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살륙당하지 않는다면, 둘째로, 아마도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목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다. 그것은 요10:16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울타리 밖에 있는 양떼들도 인도하러 오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참된 목자로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도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교회)가 되어 한 목자의 목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오순절상령강림사건이후에는 울타리 밖에 있는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처음부터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먼저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다가 목자로부터 먼저 부름을 받는 자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대표는 역시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다. 하지만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울타리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울타리 안에서든지, 울타리 밖에서든지 누구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서야 목자로부터 생명을 얻고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잠깐동안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겠지만, 결국 도둑이나 강도에서 살육당하게 되거나,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이 떨어져서 결국에는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울타리 밖에도 양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울타리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그냥 밖에 있었다. 이들은 우리는 “이방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목자되신 예수께서는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뿐만 아니라 울타리 밖에 있는 그들도 인도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나서기만 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라나섰던 유대인들(초대교회)처럼 이방인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한 무리의 양들이 되어 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보호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울타리 밖에 있었다가 예수님을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선 이방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만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부터 목자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이방인들도 이미 얻은 구원에서 얼마든지 탈락될 수 있기 것이다. 구원이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처음부터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먼저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다가 목자로부터 먼저 부름을 받는 자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대표는 역시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다. 하지만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울타리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울타리 안에서든지, 울타리 밖에서든지 누구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서야 목자로부터 생명을 얻고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잠깐동안은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겠지만, 결국 도둑이나 강도에서 살육당하게 되거나,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이 떨어져서 결국에는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울타리 밖에도 양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울타리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그냥 밖에 있었다. 이들은 우리는 “이방인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목자되신 예수께서는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뿐만 아니라 울타리 밖에 있는 그들도 인도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나서기만 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라나섰던 유대인들(초대교회)처럼 이방인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한 무리의 양들이 되어 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보호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울타리 밖에 있었다가 예수님을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선 이방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만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부터 목자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이방인들도 이미 얻은 구원에서 얼마든지 탈락될 수 있기 것이다. 구원이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처음부터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양은 없다. 다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마귀의 자녀들인 것이다(요8:44, 요일3:8). 그러나 어느 날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던 유대인들이든, 아니면 울타리 밖에 있었던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졌던 유대인들이나 혹은 육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이나 할 것 없이, 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서기만 하는 그들은 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해 있었더라도, 목자를 따라나서지 않는 유대인들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서는 자만이 그분의 양이 되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12) 나오며
그러므로 주님의 양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설 때에 비로소 그분의 양으로 선택되어지기 때문이다. 마22장에 나오는 어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를 보라. 주님께서는 그때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2:14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청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모두가 다 선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양들일지라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받는 자로서 선택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어떤 자가 구원의 초청을 듣고 주님을 믿고 따라나섰다고 해서, 그러한 한 번의 결단이 영구적으로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는 않는 것이다. 만약 한 번이라도 주님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면, 끝까지 그분을 믿고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양으로 선택되어져서 천국에 골인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시 믿고 따라가다가도 중도에 예수님을 버리고 딴 길로 가버린다면, 그는 반드시 버림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안타까운 심정을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나를 향하여) 오기를 원하지 아니 하는도다(요5:39)” 그렇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울타리 안에 있던 양들이었다. 육적인 하나님의 양들로서 선택을 받았고 육적인 보호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목자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꺼리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약하고 병들고 천대받는 소외된 자들을 달랐다. 그들 기꺼이 주님을 따라나선 것이다. 그들은 바로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순절성령강림사건이후부터는 이방인들도 초대되었다. 그래서 그들도 주님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결국 그들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 요3:16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음성을 따라나서면, 그도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 예수님을 믿고 따라오는 양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다 내려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요6:37,39,10:29).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을 끝까지 붙들고 그분을 따라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이 주님의 양으로 선택되어지고 그가 바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