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주일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가?(빌1:20~30)_2018-04-19(목)

갈렙 2018.04.19 17:16:48 동영상URL: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왜 우리는 주일을 목숨처럼 지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가?(빌1:20~30)
https://youtu.be/p2lxpX5Im-k

 

1. 안식일계명은 율법 중에서 절기법에 해당하여 예수께서 오셔서 성취하심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교회에서는 주일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요? 이 말은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아닐텐데, 그럼에 어떻게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요?

 

2.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지킨다는 것과 유대교인들이나 안식교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다른 개념입니다. 유대교인들과 안식교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그 기반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일성수를 유대인들 못지 않게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주일을 절기의 안식일처럼 지키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오셨어도 도덕법(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을 도덕법처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일에 어떤 물건도 사거나 팔지도 말고 오직 예배만 드리고 전도하고 심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근본적인 뜻과 의도를 알고 그 날을 지키라는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덕법으로서 그날을 지키라고 하신 근본적인 뜻과 의도는 대체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근본적인 뜻과 의도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라는 데에 있습니다(출20:8, 신5:12). 엿새동안은 육체를 위해 힘써 일을 해야 하겠지만 일주일의 하루는 그 일을 중지하고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우상숭배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십계명명이 최소한의 요구조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안식일을 절기법에 따라 지키지 않았어도 그들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가슴속에 품고 살았지만, 기근 때문에 야곱과 그의 식구들 70명이 애굽에 들어가 살게 됨으로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애굽의 신들(하토르와 같은 황소 신...)을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후에 당신자신 곧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결국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신 최소한의 장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것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영영 하나님을 잊어버리고서 자연만물이나 우상을 하나님으로 알고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최소한의 장치를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해서 주어진 도덕법 그리고 제4계명의 안식일준수명령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근본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만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날이 아니라, 겉으로는 일하지 않고 그날 쉬면서 제사를 드렸지만 사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드은 마지못해서 살진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고 절기를 지키고 자기들의 축제를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자손들이 마음에 악한 생각과 삐뚤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들이 가져오는 예물에 진절머리가 나리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고, 그들이 지키는 절기를 없애버리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기억하도록) 주신 율법을 받아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체 어떤 변고가 생겨서 이런 사단이 난 것일까요?

 

4. 전도서 7장 29절에 의하면,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꾀를 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언약백성들이라도 겉으로는 언약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 지키는듯 했지만 실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음란하게 살 수 있게 허용한 이방종교를 받아들이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들의 신들을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다 자기의 의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룩하게 살라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외면하고, 오히려 육체의 쾌락을 즐기고 권력을 부리며 사는 것을 더 좋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같이 돌판에 새기거나 양피지와 같은 곳에 쓴 것(비문이나 언약서)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아시는고는, 새 언약을 세우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요?(렘31:31~33)
렘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은 어떤 책에 기록해서 그것을 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버리는 것입니다(렘31:31~33).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 속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대신하는 보혜사 성령을 믿는 이들 속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책과 같은 것을 굳이 자기 곁에 두지 않고 있더라도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진짜 신자들 마음 속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들어가신 것입니다(요14:16~17).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자기 속에 성령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율법은 더이상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더이상 믿는 자들에게 초등교사(몽학선선생)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믿는 자들 중에는 여전히 하나님(창조의 은총과 구속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수두룩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대체 성령을 주셨지만 무엇이 문제가 된 것인가요? 또한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인간에게는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오셨어도 성령을 따라갈 것인가 육체를 따라갈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의 선택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상조치로서 율법을 주셨지만 겉으로는 율법을 준수한 척 하면서 자기의 육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성령을 따라 살아야 마땅하지만 겉으로만 성령을 따라가는 척하면서 사실은 귀신을 따라가며, 자신의 육체와 음란과 욕심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 성령이 행하는 것처럼 포장해서 말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믿는 자는 이제 더이상 율법(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죄된 본성을 가진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 밖에는 여전히 귀신들이 노리고 있기 때문에 보조적인 장치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원칙이었지만 다른 보조적인 장치들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육체를 쳐복종시키는 것(고전9:27), 과거에 한 일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빌3:12~15), 항상 기뻐하려고 노력고 하고, 쉬지 말고 기도에 힘쓰는 것(살전5:16~17), 원망과 불평하기보다는 범사에 감사하려고 하는 것(살전5:18).... 그렇습니다. 이런 일환의 하나로서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주일성수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를 율법적으로 지켜서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새 언약이 우리 내면에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보조적인 장치로서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8년 4월 19일(목)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