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한 순간에 받는가 아니면 일생의 여정(서정)을 통해서 받는가?(히3:12~4:1)_2020-03-24(화)

갈렙 2020.03.24 07:54:35 동영상URL: https://youtu.be/ZymyvicQ9Ek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구원은 한 순간에 받는가 아니면 일생의 여정(서정)을 통해서 받는가?(히3:12~4:1)_2020-03-24(화)

https://youtu.be/ZymyvicQ9Ek

 

1. 히브리서는 누가 썼으며 로마서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히브리서는 누가 썼는지 사실 잘 모릅니다. 작자 미상인 것이죠. 바울이 썼을 것이라고 말들은 하지만 바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도 히브리서는 바울서신에 넣지 아니하고 일반서신쪽에 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히브리서를 바울이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까? 그것은 바울신학과 히브리서기자의 신학이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바울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을정도로, 이 책의 저자가 구약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는 아마도 바울로부터 배웠던 어떤 사람으로서 헬라철학의 수사학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아주 논리적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디모데를 형제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히13:22). 특히 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로마서가 "이신칭의"를 강조하고 있는 책이라면, 히브리서는 "구원탈락의 가능성"을 매우 심도있게 기술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구원을 히브리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나요?

  히브리서 기자는 결코 구원을 한 순간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하나의 여정(서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공동서신의 대표적이고도 공통적인 시각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가 그렇고, 야고보서나 유다서가 그렇습니다. 더욱이 요한계시록도 그렇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미 얻은 구원이라 할지라도 잘 보존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최소한 5 차례).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을 하나의 경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히12:1). 구원에도 출발이 있고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 고군분투가 있으며 완성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마지막 완주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구원은 왜 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없나요?

  구원을 한 순간이라고 한다면 한 번 구원얻은 사람은 한 사람도 구원에서 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구원의 여정에 들어온 자라 할지라도 구원의 여정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탈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들이 나오는데, 히브리서 3~4장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에 가면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경우도 그러한 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히12:16~17). 에서는 비록 이삭의 장자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결국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가지고 있던 축복이라도 계속해서 끝까지 갖지 못할 가능성을 히브리서는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4.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은 왜 일생의 여정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는건가요?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은 한 순간에 받는 것이기는 하나(그것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입니다)(히3:12,19), 그 믿음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구원의 여정에서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3:12,14,4:1).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믿었으나 나중에 믿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의 예를 듭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들 중에서도 영원한 하늘의 안식(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으니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마음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도 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겠습니다(히4:1).

 

5. 구원이 순간인지 아니면 여정인지를 알려주는 예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러므로 사람이 받는 구원이 정말 어떤 한 순간인지 아니면 일생의 여정을 통해 결국에 죽을 때에 완성되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광야의 놋뱀사건"입니다(요3:14~15).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니리, 이는 그를 믿는(믿고 있는) 자마다 영생을 [계속해서] [장차] 얻게(얻도록)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그렇습니다. 광야의 놋뱀사건은 누가 영생을 얻을 것인지에 관한 놀라운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출애굽2세대들이 불평하다가 죽게 되었는데, 그들이 그때 어떻게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는지에 관한 말씀입니다(민21장). 그들은 원망하다가 불뱀(독이 있는 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모세를 찾아가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했더니 하나님께서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자들이라도 그것을 쳐다볼 때에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장차 죄가 없는 죄된 육신의 모양(놋뱀)으로 십자가에 대신 매달리실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출애굽2세대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진짜로 그것을 쳐다보기 위해 장막문을 열고 나와서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기고는 끝까지 장막 박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누가 살고 누가 죽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사건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놓은 사실 자체가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모든 자들을 다 낫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소식을 듣고 정말 밖으로 나와서 직접 놋뱀을 쳐다본 자만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속죄의 은총을 베풀어주기 위한 선제조치(자격 취득)였던 것이지 그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라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예수께서 그 사람 마음 가운데 성령을 보내주시어 영생을 얻게 하시고, 또한 하늘에서는 생명책에 그의 이름을 기록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때 최종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아직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 믿음을 끝까지 보존할 것인지는 두고봐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다가도 총칼과 고문과 핍박 앞에서 그만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는지 모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죄의 처리는 어떻습니까? 그러한 죄는 회개할 때에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속죄의 은총이 부어지게 되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요일1:9).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은 죄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회개하는 자만이 최종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회개하지 않은 채 죄를 품고 있는 자는 결국 천국에 못들어가게 됩니다. 사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겨버리겠다고 했으며(계2:5),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계3:5). 그리고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못한 자는 결국 불과 유황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계21: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에 이미 구원을 받기는 받았지만 완전히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은 일생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죽을 때에 비로소 그때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야 그 사람의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2020년 03월 24일(화)

정병진목사